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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9/21 14:58:17
Name mayuri
Subject (스포!) 최근 본 영화 리뷰 : 세 가지 색 화이트, 세브린느,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요즘 다시 옛 고전 영화에 빠져서 찾아보고 있어요. 그 중 몇 가지.


세가지 색 - 화이트  

색 시리즈가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기도 해서 봤는데 사실 프랑스 영화라기보다는 폴란드 영화에 가까워요.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사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아시아인이 이해하거나 깊이 공감하기에 태생적으로 어려운 영화이긴 합니다. 저는 색 시리즈 중 가장 마지막이라는 ‘세 가지 색 - 레드’를 먼저 봤는데, 레드 같은 경우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 어느 정도 즐길 수 있겠지만, ‘화이트’ 같은 경우는 스토리 자체에 유럽권의 이념적인 배경이 짙게 깔려 있어요.

서사에 집중하는 영화라서 딱히 미장센도 화려하지 않고 음악도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이 부분은 오히려 마음에 들었어요. 요즘은 빈약한 스토리를 감추려고 미장센과 음악에 집중하는 영화들도 많다보니... 외적으로는 줄리 델피를 좋아해서 보는 것이 즐거웠네요. 평론가 듀나는 줄리 델피에 대해 미국 사람이 그리는 ‘프랑스 여자’ 이미지에 잘 어울린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한 적 있는데(정확하진 않음),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면서 줄리 델피에게는 유럽 영화도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어요. 굳이 따지자면 미국 영화에서 델피가 생기를 얻은 듯 싱싱하고 빛난다면, 이 영화에서는 빛나진 않아도 물에 녹아들듯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었네요. 스토리의 힘인지, 감독의 역량인지, 배우의 재능인지(혹은 세 가지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색 시리즈를 보면서 느낀건데 이 영화들도 참 90년대 유럽 분위기가 낭낭합니다.



세브린느  

남편을 사랑하지만 관계에서는 어려움을 겪는 부인이 자신의 불안함과 억압된 욕망을 바깥에서의 위험한 성적 모험으로 해소하려고 한다는 내용. 시놉시스만 보면 뭔가 60년대 유행한 ‘부잣집 마나님의 억압된 자유와 욕망의 해방’을 외치는 자유부인(;;)스러운 내용인가 싶은데 실제로는 좀 더 복잡합니다. 주인공인 세브린느는 어디까지나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날이 가면 갈 수록 커져감에 따라 불안함과 강박을 느낍니다. 그 어려움을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이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 아닌가 싶은데, 결국 결말을 보면 지나치게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성적으로 외도를 함으로서 본인이 해방감을 느끼고 주체권을 찾으며 그리하여 남편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다만 ‘성적으로 예민하여 외부에서 몰래 해결하는 부르주아 여성’의 이미지는 가족 해체와 성 지향성 스펙트럼의 시대인 지금에 와서는 그 공감대가 다소 바랜 경향이 있죠.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인 세브린느 캐릭터가 역을 맡은 배우인 카트린느 드뇌브가 이전에 연기한  로만 폴란스키의 ‘혐오(repulsion)'의 주인공 캐롤과 매우 닮아있다는 겁니다. ’혐오‘의 캐롤은 지나치게 결벽적인 성향의 소유자로, 그녀를 심리적으로 보호해주는 언니가 남자친구와 여행을 간 틈을 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며, 성적으로 뒤틀린 상태로 폭발해버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캐롤‘이 결혼하면 ’세브린느‘같은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요?
여담이지만 세브린느 속 패션과 미장센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부르주아 파리지엔느의 패션이 인상적이서 구글 검색을 해보니 이브 생 로랑 디자인이라는 것 같네요. 패션에 감명받은 것은 저만이 아닌지 상당한 인터넷 블로그를 찾을 수 있었어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모종의 이유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말 그대로 술 먹고 끝장을 보기로 한 ‘벤’과 라스베가스에 사는 거리의 여인인 ‘새라’가 만나 연인이 된다는 내용. 개인적으로는 제가 술을 좋이하지 않는지라 잘 이해되지 않았던 영화인데... 제가 탐닉하는 대상인 디저트나 스낵류로 대입해보면 좀 더 공감하게 될까요? ‘사탕을 좋아하는 벤은 설탕 중독으로 끝을 보자는 심정으로 디저트의 도시 파리로 간다.’
... 글쎄요.

굳이 이해를 해보자면 벤은 어떤 크나큰 슬픔과 상실감을 겪어 자포자기한 인물이고, 새라는 힘든 삶 속에서도 삶을 치유하고 원상태로 되돌리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아픔을 이해했기에 각자의 방식(벤은 폭음하는 것, 새라는 밤일을 계속 하는 것)에 서로 터치하지 않기로 하고 지냅니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삶의 방향성은 만났을 때부터 어긋나 있었고(벤-죽음, 새라-함께 하는 삶) 서로에게 원했던 것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두 사람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고통을 잠재울 짧은 위안. 이러한 관계의 배경으로는 환락의 도시인 라스베이거스가 잘 어울리죠.
엘리자베스 슈의 새라 캐릭터는 다소 평면적이었고 니콜라스 케이지의 벤은 좀 모호했지만 두 사람의 지극히 파괴적이면서도 또한 서로를 위하는 애정은 인상적이었어요. 90년대 미국, 우울한 재즈의 배경이 특이하게 로맨틱하면서도 슬픈 영화였네요. 밤에 맥주 한잔 하면서 혼자 보면 좋을 영화(물론 저는 영화를 보면서 사탕을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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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고나
22/09/21 15:27
수정 아이콘
세브린느는 엄청 기대하면서 비디오 태이프 빌렸는데 생각보다 안 야해서 실망했습니다. 안 야한 거 감안하고 보니 미묘한 은유들과 이후 시대 에로영화들에 나오는 전개를 한참 먼저 내놓았다는 대단함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22/09/21 15:41
수정 아이콘
요즘 나오는 마라맛 미디어들에 비하면 사실 자극적인 장면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총쏘는 장면도 실소가 나올 만큼 맥없더군요(이건 '네 멋대로 해라'의 장면을 오마주한 거라는 이야기도 있지만요). 은유 메타포의 해석이나 탐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즐기실 것 같아요.
마카롱
22/09/21 16:06
수정 아이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본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내용이 기억이 안나지만, 보고나서 우울감이 심하게 왔던 것은 기억합니다.
22/09/21 17:48
수정 아이콘
많이 우울한 영화인 것 같긴 해요. 좋으려나 싶으면 와장창 깨지는 것이 반복되는 서사이다보니… 근데 그게 또 라스베가스의 분위기와 묘하게 매치되어서 매력적이더라구요.
22/09/21 17:19
수정 아이콘
세가지 색 시리즈는 걸작이죠, 블루와 레드는 감독 특유의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라 살짝 지루해지는 면도 있었지만, 감독이 화이트는 "평등" 이라는 주제를 동유럽 혁명 이후에 서유럽과 동유럽의 격차를 부부관계로 비튼게 재치있다고 느꼈습니다.
22/09/21 17:50
수정 아이콘
저는 가장 초기작인 블루를 나중에 볼 예정이다보니 약간 순서가 흐트러진 감이 있긴 한데 그래도 참 스토리적인 면에선 요즘 나오는 영화들과 다른 느낌이 있더라구요.
마스터충달
22/09/21 17:47
수정 아이콘
저도 <세 가지 색: 화이트>를 최근에 봤는데요. 나머지 2편은 옛날에 봤는데, 왜 이것만 안 봤는지 보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말씀하신대로 우리나라 정서랑 안 맞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이 영화가 폴란드 영화가 아니라 프랑스 영화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는데, 이유는 영화가 담고 있는 민족적 정서가 프랑스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무슨 얘기가 떠올랐냐면, 프랑스 사람들은 고급차가 지나가면 "와~ 부럽다. 나도 돈 많이 벌어야지."가 아니라 "저 차 주인 끌어내려서 같이 걷게 하자."라고 생각한다네요. 이게 프랑스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등인 거죠. 그런 정서가 영화에 아주 잘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너가 날 아프게 했으니, 똑같이 아프게 해 줄게." 했더니 "아아...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았습니다~"라고 나오는 게... 이건 한국인 정서는 확실히 아니더라고요. 크크크
22/09/21 17:52
수정 아이콘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도미니크는 초장부터 너무나도 프랑스인이지만 카롤은 처음에는 애처로웠다가 점차 흑화하는 점이…크크크
여담이지만 ‘지독한 사랑’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프랑스 영화가 많은 것 같아요.
웃어른공격
22/09/22 00:39
수정 아이콘
그당시 영화 포스터를 인테리어에 쓰거나 편지지로 쓰는게 유행이었었는데...

이상하게 블루랑 레드는 많은데 화이트는 적었던 느낌...
22/09/22 07:47
수정 아이콘
블루랑 레드는 뭔가… 포스터가 있어보여서 그런걸까요 크크크 색채도 강렬하죠. 확실히 90년대에 영화 포스터로 꾸민 가게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영화 포스터로 방을 꾸미는 건 한때 제 로망이었는데 포스터 구하기도 힘들고 관리도 어렵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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