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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2/27 16:07:46
Name aDayInTheLife
Link #1 https://blog.naver.com/supremee13/222605868118
Subject <드라이브 마이 카> - 모든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의 에필로그다(약스포)

저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부산국제영화제에 나왔던 영화, 혹은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영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이동진 평론가가 만점을 준 영화'로 기억했고,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 뭔가 익숙한 이야기가 들려서 뭐지 싶다가 오프닝 크레딧을 보고서 깨달았습니다. '아 이거 하루키 단편 영화화구나.'

나름 하루키 팬을 자처하는 입장으로 약간 당황했습니다.


넵, 이 영화는 동명의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소설을 영화로 옮긴 이야기입니다. 기초적인 뼈대, 그러니까 도입부터 중반까지는 비슷하게 흘러가지만 단편 영화를 3시간에 가까운 영화로 옮긴 터라 후반부에는 많은 각색도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이 아내 '오토'의 외도 사실을 알고, 또 그 아내가 갑작스레 사망하고 마는 사건입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그제서야 배우들, 스태프들의 이름이 뜨는 걸 생각하면 거기가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점이라고 해도 될거 같아요. 영화 상으로도 히로시마에 도착하는,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구요.


영화는 지나온 길을, 그리고 지나가고 있는 길들을 보여줍니다. 앞이 탁 트인 길은 딱 한번, 그것도 엔딩에서야 나오게 됩니다. 영화에서 모든 인물과 모든 사건들은 철저하게 오프닝의 이야기들에 종속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은 어쩌면 이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앞의 일의 에필로그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영화는 그렇게 과거에 종속된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체호프의 말을 빌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에 언급된 '바냐 아저씨' 연극을 통해서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연극에 캐스팅된 극중극 배우들입니다. 시작 부분의 '고도를 기다리며'도 그렇고, '바냐 아저씨'도 그렇고, 연출가이자 배우로 설정된 가후쿠는 다양한 언어가 섞인 채로 연극을 연출합니다. 어쩌면 영화의 서사와 감정을 보편화하기 위해서 일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중간의 '통역가'로서의 주인공을 보고 싶네요.


영화에서 아내의 이야기는 정작 아내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주인공의 도움 없이는 이야기는 휘발되고 말 이야기들 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각본으로 다듬을 수 있게,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게 하는 것은 주인공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극에서 '바냐' 역할을 맡은 배우는 중국어도, 영어도 못하고, '옐레나' 역할을 맡은 배우는 일본어를 모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수어를 하는 한국인 캐릭터도 나오죠. 각기 다른 언어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연극이 나올 수 있음에, 이야기가 말을 걸어 어떠한 화학 작용이 일어나듯이, 영화는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저는 보면서 은근히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떠올랐습니다. 상처를 받아야할, 그것도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만큼 상처를 받아야하는 사람이 상처를 애써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 그 순간을 지나치고 나중에야 내가 아팠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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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츠
21/12/27 16:13
수정 아이콘
조금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던 마지막 씬 빼고는 꽤 괜찮게 봤던 것 같네요
aDayInTheLife
21/12/27 16:19
수정 아이콘
곰곰히 생각해보면 굳이 마지막을 어떻게 해야했을까 궁금하긴 합니다. 저는 음… 약간은 어거지다 싶지만 그래도 회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엔딩이라고 생각해요. 원작은 지금 책을 찾아보고는 있는데 단편의 엔딩도 잘 기억나지 않네요ㅠㅠ
22/01/06 08:30
수정 아이콘
내용에 비해 3시간이 지루하지 않으니 제 기준으론 아주 재밌는 영화였어요.
지금 일본에 있어서 시간 내서 히로시마도, 홋카이도도 가 볼 수 있어 좋네요 흐흐
그런데 결말 해석 좀 해주세요
aDayInTheLife
22/01/06 09:03
수정 아이콘
저는 일종의 안식, 회복이라고 생각해요.
상처받아야 할 상황에 적절한 만큼, 적절한 강도로 상처받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 회복하게 된 이야기. 그런 점에서 앞에 뚫린 길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아마 제가 본지 좀 되서 정확하지 않지만 앞이 뚫린, 앞을 바라보는 장면이 아마 유일한 걸로 기억하거든요. 다만, 그 회복의 장소가 이질적인 장소, 일종의 방랑벽이 작용한 장소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의뭉스러운 마무리라고나 할까요.
히로시마도, 홋카이도도 가보고 싶네요… 삿포로는 가긴 했는데 너무 짧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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