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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2/17 23:21:11
Name 계층방정
Subject 그들은 왜 대면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3)
https://pgr21.com/freedom/94365 그들은 왜 대면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1)
https://pgr21.com/freedom/94394 그들은 왜 대면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2)

지난 두 글에서는 개신교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를 불러오면서까지 대면예배에 집착한 이유를 종교적, 정치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사상적인 이유인 반지성주의를 살펴보겠다.

반지성주의는 미국의 복음주의에서 파생된 현상이다. 미국의 대각성운동 당시 개신교도들의 침체된 영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일어난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학식이 부족한 소외계층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면서 학식이 없어도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음을 강조했고, 또 자신들이 직접 신과 소통할 수 있음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쌓았다. 이 과정에서 학식과 지성은 마치 구원에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되어 경시되었고 복음과 구원은 반지성주의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더구나 보통교육이 널리 퍼지기 전까지 –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 지식과 학문은 엘리트층, 그러니까 왕과 귀족의 것이었다. 미국 독립 혁명은 이런 엘리트층에 대한 도전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건인 만큼 엘리트층의 전유물이었던 학식과 지성에 대한 반감은 미국 사회의 한 기둥이 되고 말았다.

반지성주의는 단순히 무지나 지식을 거부함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개신교계에서 가짜 학위공장을 만들어가면서까지 그럴듯한 학위가 있는 목사를 양성하기에 애쓰고, 신자들의 헌금을 아낌없이 쓰면서까지 담임목사에게 외국의 유명 신학교 학위를 달아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창조과학회에서도 교수 직함을 달고 있는 회원이 잔뜩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약간 다른 설명이 있는데, 큰 그림에서는 사실 같을 수도 있다.

한 가지는 지성과 지식을 분리하고, 개신교계의 지에 대한 갈망은 사실 지식에 대한 갈망일 뿐 지성은 버려졌다는 것이다. 호프스태터의 정의에서 지성은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며 사색적인 측면’이고, 지식은 ‘두뇌의 우수함’이다.
기독교라면 종파 불문하고 지성과 감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이런 균형 중에서, 미국 복음주의는 영적인 각성과 고양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감성으로 크게 치우친 균형에 해당한다.
이렇게 지성이 빠져버린 반지성주의적 개신교에서는 지식에 대해 위계를 형성했고, 지식을 통해 높은 위계에 올라갈 수 있음은 인정했지만, 그 위에 영적인 각성과 고양감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는 ‘영적 위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영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배우지 못해도 이 영적 위계에 올라가서 개신교도들의 스승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성은 이 위계를 뒤흔드는 적으로 인식되어 배척되었다. 그래서 개신교계에서 학위와 신학 교육에 열심을 내면서도 반지성주의 안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에서 세계를 선과 악, 성령과 사탄, 순종과 거역 등의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본다는 점에서도 지성은 배척되었다. 무지성이 선이요, 성령이요, 순종이며, 지성은 비판적이고 창조적이고 사색적이라는 점에서 악이요, 사탄이요, 거역으로 간주되었다.

또 다른 설명은 현대 개신교의 반지성주의적 면모가 구시대적인 게 아니라 사실은 엄청 현대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옛날 로마 시대의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이 보통 알고 있는 자연적인 설명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신앙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에 나와 있는 문자 그대로 세계가 창조되었으리라고 꼭 볼 수 없다고 했다. 진화론, 빅뱅(빅뱅은 이론 제시 당시 너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 창세기 1:3을 연상시킨다고 오히려 과학자들에게 배척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등 성경에 문자 그대로 기록된 내용과 다른 우주와 지구와 생물 창조를 논하는 과학적 이론이 성경과 모순된다고 갈등하는 것 자체가 엄청 현대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창조과학회가 하는 활동은 구원이나 은총 등 진짜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인식한 원시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이 ‘진짜 과학’이고 현대 과학은 ‘가짜 과학’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과학이란 게 많은 사람들에게 권위를 형성할 만큼 중요하기커녕 독립적으로 존재하지조차 않은 성경 저술 당시에는 존재할 수조차 없던 방식이다. 역시 현대적인 현상이다.

성경은 적어도 2천 년 전에 쓴 문헌이다. 당연히 2천 년 전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먼저 이해해야 알 수 있다. 원래 신학은 2천 년이 지나오면서도 당대의 이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개신교도들은 2천 년 전의 문헌을 현대적으로 읽는 바람에, 2천 년 전의 지식을 바탕으로 현대적 지성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꼴이 된 것이다. 당연히 현대적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지성과 충돌하게 되었고, 결과는 반지성주의적으로 보이는 시대착오인 것이다.

두 가지 관점 모두 개신교 내에서 지식을 추구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현대 지성과 대립하는 관계에 빠지게 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지성 자체를 신앙을 뒤흔드는 적으로 취급하든, 지성의 기반이 될 지식을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서만 가져오든, 결국은 현대적인 지성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고 반지성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개신교는 대면예배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방역 전문가는 세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요, 목사는 영적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자니, 목사가 영적 카리스마로 선포하는 말씀이 방역 전문가보다 더 권위 있고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목사 본인도 지성을 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자신의 영적 능력을 통해 직접 받은 계시가 참 진리라고 여기니, 그게 대면예배였으면 대면예배를 드리라고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은, 2천 년 전 성경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쌓은 모순적인 지성을 바탕으로 대면예배가 옳다고 결론짓고, 방역 전문가의 말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지껄이는 소리로 치부하니, 대면예배를 드리라고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이렇게 두 가지로 썼느냐? 대면예배의 선봉장으로 유명한 두 목사 전광훈과 손현보의 행동은 따로따로 서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광훈은 장로회 목사지만 대신복원이라는 군소교단 소속으로 사실 오순절교회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직접 받은 계시, 이른바 직통계시를 중시하는 자인 반면, 손현보는 직통계시나 기적, 방언 등의 오순절교회에서 중시하는 초자연적 요소를 완고하게 거부하는 장로회 고신측 목사다. 대신복원과 고신은 대면예배 못 잃어 대한민국 못 잃어 하는 교단이라는 점은 같지만, 한쪽이 다른 쪽을 이단으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런 반지성주의적 면모는 역시나 미국을 통해서 더욱 강화된다. 미국 개신교계와 유사과학계의 반지성주의와 음모론은 열심히 한국으로 수입되고 있다. 한국 개신교에게 미국 개신교는 이상향이니만큼 미국에 퍼지는 반지성주의와 음모론이 한국에서 아 깨어있는 나라 미국은 세상이 숨기는 진실을 홀로 전파하고 있다고 거꾸로 추앙을 받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개신교 반지성주의에서 지성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데에는 이들의 믿음이 의외로 취약한 기반 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과학에 따른 코로나19의 처방을 받아들이는 게 뭐가 문제냐 한다면, 어떤 이들에게는 이는 곧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요,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믿음이 강한 것 같지만 사실 엄청 약한 것이다. 고작 과학적 설명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신앙이 통째로 부정될 만큼. 이들의 믿음은 아주 불안정하게 세워진 거대한 건축물 같은 것이어서, 누가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믿음이다. 그래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밖에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니까, 아 신앙이 독실하구나 이렇게 보일 수가 있고, 장려되기까지 한다. 이는 야구의 외야 수비와도 같다. 외야 수비를 진짜 잘 하는 외야수는 이병규처럼 수비를 하는 듯이 안하는 듯이 편하게 하는 선수지만, 너무 편하게 하니까 설렁설렁 한다고 ‘라면 사러 동네 마실가는 듯한 이병규’ 즉 ‘라뱅’이라는 욕을 먹었다. 오히려 몸을 날리는 호수비로 일관하는 외야수는 사실 타구 판단이 빠르지 못해서 그런 건데, 관중은 이에 열광한다.

개신교 반지성주의의 또 다른 한 요인은 개신교 지성으로 세상을 살아나가는 게 너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영역에서 예수의 가르침대로,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답을 구하지만 답을 얻지 못했을 경우, 쉬운 해결책은 지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 내용이 세상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하면, 결국은 신앙을 버리거나 지성을 버리게 된다. 신앙을 버리면 교회를 떠나고, 지성을 버리면 반지성주의적 개신교에 귀의하게 된다.

또는,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대답하지 않은 영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직통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들으면 항상 예수의 가르침대로,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오순절주의가 있다. 이건 개인 의견인데, 직통계시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영적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에 의존하게 되거나,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를 예수의 가르침 그 자체로 취급하게 되며 반지성주의로 빠질 위험이 크다.

지금까지 대면예배에 집착하게 되는 개신교 반지성주의에 대해서 살펴봤다. 반지성주의가 비롯한 배경을 살펴보면, 지성이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영적 카리스마에 대한 의존, 지성을 엘리트의 전유물로 취급, 믿음을 잃을까 하는 극단적인 불안감, 지성적인 종교생활의 실패 등 다양한 원인이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문제들에 대해, 개신교 반지성주의는 아주 매력적인 답을 제시해준다. 세상과 교회를 고립시키고, 교회를 퇴보시키는 대가로.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려운 문제를 개신교에 던져준다. 무식한 사람, 공부할 수 없는 사람까지 구원받게 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모든 사람을 무식한 사람, 공부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고? 무식한 사람도 구원받고 영적인 거인이 될 수 있다는 복음의 원치 않는 동반자는 유식해봐야 쓸모없다는 거니까.

이상으로, 그들은 왜 대면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연재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대면예배 문제를 통해 현재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했습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글은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 7장 〈복음주의는 반지성주의적 영성을 가졌는가〉 (김현준)과 기독교사상 2004년 6월호 특집에 수록된 《근본주의는 ‘시대와의 불화’를 빚었는가》(김기현) - http://www.gisang.net/bbs/board.php?bo_table=gisang_special&wr_id=125&main_visual_page=gisang - 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해서 쓴 글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 두 글을 읽어보십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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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8 00:17
수정 아이콘
제가 개신교 신앙에 대해서 파고들면서 제일 충격받았던 부분이, 창조론/지적설계론같은 것들의 역사가 매우매우 짧다는 점이었습니다.
적어주신대로 개신교의 반지성주의적인 면모가 굉장히 현대적인 사상이었더라고요.
사실 이건, 가톨릭과 분리되면서 과거 가톨릭의 유산-지성적인 탐구-을 제대로 잇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봅니다. 적어주신것처럼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과도 연결점이 있고요. (근데 미국내에서도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는 약간 다르게 보지 않던가요? 한국에 들어온 반지성주의는 복음주의에서도 한발짝 더 나아간 근본주의계열의 영향이라고 알고있었습니다)

적어주신대로 개신교 지성으로 세상을 살아나가는것이 너무 어렵다는것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걸 공부하고 추구하는 분들도 사실은 많이 계시지만 잘 드러나지 않아서 아쉽기도 하죠. 결국 세상에서 보는건 전광훈 같은 사람들이니까요.

개신교를 꽤 열심히 믿고, 앞으로도 꾸준히 믿어나갈 예정이지만.. 적어주신 내용은 정말 아쉽고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 이쪽으로 공부하려고도 많이 하고, 이런 공부를 위한 책들도 꾸준히 번역되면서 출간되는 편이지만 한국의 기독교 분위기에서는 정말 소수파라는걸 항상 실감하기도 합니다.
계층방정
21/12/18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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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와 근본주의는 구분할 수 있는 개념이긴 하지만, 〈복음주의는 반지성주의적 영성을 가졌는가〉에서는 영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신앙의 실천을 중시한다는 면에서 복음주의 그 자체에서 비롯하는 반지성주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반지성주의는 근본주의만의 문제만이 아니며, 심지어 기윤실 등 기독교 지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에서조차 반지성주의를 외면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해요.
저도 지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루는 신앙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개신교에서 지성의 가치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같은 형제로서 Restar님을 응원합니다!
21/12/18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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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제가 기윤실쪽인 복음주의쪽에서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의 결을 가지고 있다보니.. 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긴 하네요. 나중에 저 책을 좀 읽어봐야겠어요.
왜냐하면 반지성주의냐, 신앙이 우선되느냐의 관점차이가 좀 생긴다고 보는데.. 복음주의쪽이 어쨌든 지성보다는 개인적 신앙영성을 중시할수밖에 없다보니 그런 말이 있는것 같네요.
그런데, 개인적 신앙영성이 지성보다 앞서지 않으면 그건 신앙인가? 라는 근본적 의문이 있다고 봐서요;;

뭐 여기서부터는 신학적인 얘기가될것같네요ㅠ
계층방정
21/12/1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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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혹시나 오해하게 하셨나 저어해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 (전략) 이러한 사상은 역설적이게도 근본주의는 물론이고 신복음주의(소위 복음주의 우파)와 어느 정도 차별화를 시도한 보다 개혁적인 복음주의(소위 복음주의 좌파) 그룹에서 전개되었다. 존 스토트(John Stott) 신부로 대표되는 영국 성공회(저교회) 복음주의와 로잔언약(1974년)의 기조는 1987년 전후, 1990년대에 한국 개신교에 알려져 영향을 미쳤다. 보다 지적인 기독 지성 운동(기독교 세계관)과 사회참여의 방식(예컨대 기윤실)으로 전개된 이른바 '사회참여 복음주의' 또는 '참여형 복음주의'로 알려진 이 흐름은 복음을 현대 상황에 적용/적응시키려는 노력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현대성(세속 학문)과 대결하여 반지성주의적 측면이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90-2000년대 기독 지성 운동에는 비교적 다양한 지적 자원이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모두 거론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으로 프란시스 쉐퍼는 반지성주의가 언제든지 지성의 형직을 띨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기독 지성 운동은 근본주의의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며 차별화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세계를 기독교 대 비기독교 간의 '영적 전쟁'으로 환원하면서 기독교 이외의 세계와 존재를 타자화하는 크리스텐덤(Christendom)의 욕망을 드러냈다. 지성을 추구하는 현대 복음주의 운동도 여전히 근본주의의 반지성주의를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노골적인 극우 개신교 선동가들과 생태적으로 온건한 복음주의 지식인들은 열광과 혐오의 강도가 겉으로는 달라보일지언정 모든 학술적 지식을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파악파고 재단하는 반지성주의적 태도를 공유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수 개신교의 광범위한 복음주의적·반지성주의적 저변은 기독 지성의 매개를 거쳐 극우 정치 세력의 탄생과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 (중략) ...

결국 기독 지성인들에게 어떤 '신실한 신앙'이란 지성적(비판적·성찰적)이어야 할 결정적 순간에 신앙의 이름으로 지성을 기각할 수 있는 의지와 결단을 의미한다. (후략)

저도 글을 읽을 때에는 긍정적으로 읽었지만, 이게 너무 지성 쪽에 치우친 견해는 아닌가 좀 검토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저자인 김현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총신대 역사교육과 학사, 서강대 사회학과 박사라고 하네요. 구글 스콜라 검색해보면 https://scholar.google.co.kr/citations?user=CrBEghgAAAAJ&hl=ko 저서들이 나오는데 이 사람의 견해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선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8시 53분
21/12/18 01:04
수정 아이콘
신학전공자라 그런지 더 글이 술술 읽히네요 크크.
써주신 글들은 저도 현장에 있을때 고민하던것이었고 신학교 다닐때도 지성과 영성이 함께 가야한다고 배웠지만
또 현장에선 현실이 달라서 뭐야 이거 무서워 했던 적도 있고.
반지성주의라는 말을 보니 자네는 그렇게 공부해서 뭐할라고? 기도 열심히 하고 성경 열심히 보고 그래야지
목회자야 하는 소리를 열두번도 더 들었던 기억도 나네요.
안타깝지만 반지성주의적 형태는 더 강해질듯합니다. 신학연구한다고 기도안하고 성서 안보는것도 문제긴 한데.
반대의 경우가 너무 당연시되어있는것도 사실이라. 이건 또 목회자의 지적 역량과도 연결되긴하겠지만 그것까지 가면 댓글이 너무 길어지니.
아무튼 연재해주신 글 잘 봤습니다.
21/12/18 01:25
수정 아이콘
제가 성도로서 교회 몇군데 다녀보고 이런저런 목회자분들 만나면서 실제로 느끼는 것들인데...
실제로 지성을 중요시하시고, 설교시간에 그런 지성의 고민들을 담아내시며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설교가 필요해서 모이는... 일종의 '소수파' 성도들이 모이는 편이고요.
문제는, 그런 교회는 대형교회로 성장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설교를 중요시하고 설교의 메세지와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도들은 거리가 있더라도 '찾아서' 교회로 오기 때문에 지역교회로서 대형교회로 성장하기가 어렵더라고요.

목회자에게 사실 일차적으로 중요한게, 성도들을 만나고 목양하는 일 - 사람을 응대하는 스킬이 중요시되고.. 그 다음에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부분이 중요시되다보니 '설교와 메세지'라는 부분이 뒤로 밀리는 목사님들과 교회를 많이 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와 메세지만 중요시하다가 정작 목양을 놓치는 목사님도 실제로 목격했었고요.

이게 결국 여러가지의 목표를 동시에 노려야하는 일이고, 여러가지 요구 속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 일이죠.
그게 참 어려운 일이고, 사람이 결국 쉬운길을 찾게되는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록타이트
21/12/1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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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숫자적으로 일정 이상 성장하면 더이상 건강한 교회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Restar님께서 언급하신 이유 때문이라면 일정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게 정말 큰 복이에요. 성경을 보면 단 한 번도 수적 성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된 부분이 없는데도 그것을 마치 지향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도리어 예수는 반대로 말했는데 말이죠.
21/12/18 11:18
수정 아이콘
어.. 제가 많지는 않아도 다양한 타입의 교회를 경험하면서 느끼는건데, 교회의 성장은 일정수준까지는 필요하고 소위 대형교회가 가능한 역할들도 분명히 존재하더라고요.

제가 말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들은, 교회가 재정적으로나 인력으로나 쪼들릴수밖에 없다는거죠. 특히 담임목사가 말씀/지성에 신경쓸수록 그 이외의 부담을 경감해줄 부목사와 주일학교를 맡아갈 전도사들이 필요한데 이걸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성장이 필요합니다. 특히 주일학교 사역이 제대로 나눠지지못하고 대충 묶어서 하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근데 작은교회일수록 목회자가 부족하고 그 부족함을 담임목사가 커버칠수밖에 없죠..

특히 개척교회로 시작하시는 분들이 그러다보니 성경공부보다는 성장에 집중하게되죠. 그러면서 성장이 이뤄지면 성장지상주의가 되는거고요..

결국 이런게 균형점을 어느곳에서 찾을까의 문제긴 합니다; 참 어려운 문제에요.
록타이트
21/12/1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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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소위말하는 [대형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 한국 교회의 목회자가 비성경적으로 편중된 직분이고 이로 인해 성도의 계층화와 교회의 종교 콘텐츠화가 심각하게 진행됐다고 봅니다.
21/12/18 12:46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 대형교회가 감당해야하는 영역이 환상이라는 부분도 어느정도 동의합니다.
다만 여기서부턴 대형교회의 정의부터 맞춰야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건 좀 논쟁이 될것같으니 여기까지 하죠. (전 대형교회와 메가처치는 또 별개의 영역이라고 봐서;;)

말씀하시는 부분들이 지나치게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점이 아니신가 싶긴 합니다. 개척교회-소형교회의 목회자의 삶이란 그냥 본인과 가족의 모든것을 교회에 갈아넣지 않으면 운영자체가 안되는 경우가 많아서;;;;
록타이트
21/12/18 14:14
수정 아이콘
저는 사실 한국 교회의 현 모습이 종교개혁 전 카톨릭과 거의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는데, 그 중심에 목회자 중심의 '제도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의 삶이란 그냥 본인과 가족의 모든것을 교회에 갈아넣지 않으면 운영자체가 안되는 경우] 가 지금 한국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가장 큰 이유라고 보고요. 그렇다고 목회자만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에게 그런 역할을 강요하는 교회 구성원 모두의 잘못이니까요. 성도가 성경에 무지하고 본인과 본인 가정을 바르게 세우는데 책임의식이 없이 편리함만 추구하니 한국 교회는 그 니즈만 충족시키며 몸둥이만 커졌죠. 규모가 커지니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인력과 자원이 필요하고 그게 없으면 교회가 유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죠.

장로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관련 문서 중에 목회자에게 당부하는 내용을 보면 가정의 예배와 가르침은 가장들에게 맡기고 그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죠. 성도의 무지성화는 목회자의 무지성화도 부추깁니다. 목사가 건강한 신학에서 벗어나도 바르게 교정할 힘이 없어지니까요. 저는 국내외의 가정 단위 규모의 교회들에서 대안들을 보았는데, 말씀하신 주일학교를 연령 별로 나누는 것이 필수적인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1/12/1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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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가정단위 소규모 공동체 신앙을 이상적으로 보시는 느낌이네요. 저는 한국 개신교의 상황을 보면서, 중앙의 통제가 완전히 존재하지않는 개개의 신앙추구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보는 입장이라서요;;
말씀하시는 가정단위 공동체에서는 주일학교가 연령별로 있을 필요가 없는것에 대해서는 공감하는데, 그게 아닌 상황에서는 연령별 구분이 있어야한다고 봅니다.

사실 한국 교회의 근본적 문제에는 난립하는 신학교와 난립하는 목사자격이 있다는건 대부분 공감하는 바죠. 근데 그걸 통제하지 못한다는게 개신교 신학인거고요.
록타이트
21/12/1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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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 때 가정교회를 보며 (가정에서 모이는 모든 교회가 아닌 국제적으로 교류하는 하나의 교단느낌의 가정교회)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만 현재는 그러한 위험 보다 중앙 통제에서 오는 위험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신학교나 교단은 개 교인과 교회의 신학 건정성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중앙 통제가 되면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음에도 중앙 집중으로 인한 부작용은 도리어 더 큰 규모의 해악으로 돌아오는 걸 보며 내린 결론입니다.

저는 인간의 죄성이 극단으로 치우치려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안전지대를 만드는 순간 오히려 더 곪아 썩어들어가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안전한 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난립하는 신학교와 목회학위]가 그에 대한 증거이구요. 제가 생각하는 신학적으로 가장 안전한 교회의 모습은 모든 성도가 성경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토론하는 것입니다. 신학 학위를 가진 목사의 존재는 당연히 좋은 역할을 할 것이며 그 전문성을 존중받을 수 있겠지만 이 모든게 전자가 전제가 되어야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파, 신학교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성경에서도 직분을 세울 때 사람의 '생활'을 바탕으로 검증하라고 했죠. 생활을 바탕으로 검증하기 위해서는 생활이 공유되어야 합니다. 성례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가능하려면 적정한 규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층방정
21/12/18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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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께서 말씀하시는 [대형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예시라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21/12/1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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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는 부분은 지역사회 후원/봉사에 대한 부분입니다.
교회는 지역에 영향을 미쳐야하고, 그걸 감당하기 위해서 일정이상의 규모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소규모 교회차원의 지역봉사도 많은데, 그걸 넘어서는 규모에서요)

그리고 교회개척을 돕는 일? 제가 다녔던 곳 중에서는 부목사가 교회 개척하는일에 재정적/인적 지원을 해주면서 많은 지원을 해주더라고요.

근데 윗분하고 얘기하면서 생각하는건데.. 교회의 규모를 어떻게 부르느냐에 대한 정의가 먼저 필요할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메가처치를 별도로 봐야한다는 입장이라;; (개인적인 기준은 장년 출석성도 만명이상이면 메가처치가 아닐까 싶어요)
메가처치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은 없다고보고, 대형교회까지가 감당하는 정도가 최선이라고 봅니다.
계층방정
21/12/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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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 영역이라면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구제 업무까지 사도들이 하다가 업무과다로 구제는 집사들에게 일임하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만 집중했죠. 현재 교회의 사회행사 참여를 목사가 총괄하는 경우가 많은데 록타이트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성경적으로 편중된 직분으로서의 목사가 이 점에 관련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게 록타이트님의 생각과 비슷할 수도 다를 수도 있는데, 지겹게 인용하는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 의 3장이 〈공공신학과 교회의 정치〉입니다. 이번 연재글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은 주제이지만요. 여기에서는 공공신학이라는 것을 소개하는데, 기독교인이 세속 사회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서 꼭 기독교적 사회단체에 의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149쪽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전통적으로 교회는 지역사회를 섬기기 위해 단체를 직접 만들어서 하다 보니 교회의 규모가 일정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공공신학에 따르면 교회가 홀로 공적 사업을 하는 것보다 시민사회와 함께 지역사회를 섬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지적합니다.
록타이트
21/12/1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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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 많으신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시민 사회와 함께 하든 교회와 교회가 힘을 합치든 모두 괜찮지만 '특정 규모 이상의 사역'을 위해 교회의 크기가 커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진 못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록타이'트'입니다. 크크.
계층방정
21/12/19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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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책 3장 내용에서는 대형교회가 독자적으로 뭐 하려고 하는 걸 지역 주민들이 안 좋게 본다고 지적하며 공공신학의 방법을 통해 대형교회가 아니더라도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제시하기 때문에 록타이트님의 의견과 많이 일치할 것 같습니다. 이름 잘못 써서 죄송합니다. 수정했습니다.
록타이트
21/12/1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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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지역에 영향을 미쳐야하고, 그걸 감당하기 위해서 일정이상의 규모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정 이상의 규모로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데는 동의할 수 없네요. 교회가 지역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은 성도가 이웃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과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특정 규모 이상의 영향력을 미쳐야 하기 때문에 교회가 커져야 한다는건 빈대 잡자고 집안 다 불태우는 격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형 교회와 메가 처치를 나누는것 또한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것이, 메가처치가 되지 못한 것이 대형교회이지 결국 목회자 한 명의 영향력으로 인한 규모임에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죠. 정 규모를 도모해야 한다면 밑에 계층방정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교회간 협력을 통해 얼마든지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람직한 파라(para)처치라고 생각하구요.

아, 그리고 규모에 대해서 정의를 말씀하셔 그런데 저는 모든 성도들이 서로 사정을 살피며 인사하고 교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면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많아봤자 백명 안팍이 되겠죠. 물론 제 의견이 현 한국교계에서 극단적인 것임은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성경 안에서 찾은 이상은 그렇습니다.
21/12/1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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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교회가 시스템적으로 '목사가 말씀강론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고 , 재정자립이 가능하고 분야별로 필요한 사역자들을 세울 수 있고, 일정이상의 후원을 하고, 어느정도 공간이 있는 자기 교회건물이 있으면 대형교회로 볼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소형은 개척교회나 미자립교회고, 중형은 재정자립까지는 어떻게 되는데 사역자나 공간이나 여러가지가 부족한 교회로 봅니다.
저는 담임목사가 목회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필요한 규모가 대형교회까지는 가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만큼 사실 한국 교회에서 목사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많다고 보거든요.
어디 나오는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제가 생각하는 분류입니다.

2. 일정이상의 규모라함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개별차원이 아니라요.
그런데 그걸 위해서 대형교회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대형교회는 되어야 그런 역할이 감당가능해진다는거죠.
그리고 좋은 개척교회를 위한 좋은 목사를 세우는것도 필요한 역할이고요. 좋은 목사를 세우는건 좋은 학교가 아니라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빡빡하고 갈아넣는 교회가 생각보다 훨씬 많아서;;

3. 제가 장년 출석인원 100~150명 규모의 교회를 다니면서 느낀건데, 목사 한사람이 커버가능한 숫자가 백명 이하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정말로 목사가 말씀사역에만 집중하는게 불가능하더라고요; 규모가 작으면 사역자의 재정/인력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면 목사가 사람들을 다 커버하지 못하죠.
그래서 성도들을 위해서도 시스템을 만들고 굴리는게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시스템에 성도들을 참여시켜야 성도들의 지성이나 가정내 신앙도 세워줄 수 있는거라고 보고요.

시스템을 목사중심으로 굴리는건 문제인데, 성도와 함께하도록 굴리는건 상당한 가능성이 있더라고요.
록타이트
21/12/1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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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에 대해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말씀 강론을 담당하는 사람이 꼭 학위를 받은 목회자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은 원론적으로는 '목사'의 일이 아니라 '교사'의 일이고, 교회의 의사 결정 하에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부가 주장하는 목사의 축복권, 설교권과 같은 독점적 권한이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 강론의 역할이 더 많은 사람에게 부여되면 꼭 누군가가 전임으로 그 일을 감당해야 할 이유도 없어지며 해외에서 경험한 교회들에서 방금 말씀드린 예시들도 목격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아직 직접 경험해보진 못했네요. 말미에 말씀하신대로 성도와 함께하도록 굴리려는 시도는 적지 않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 여전히 말씀하시는 역할이 무엇인지 모호하게 다가옵니다. 저는 개별이 모여서 얼마든지 규모있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개척 또한 꼭 목사가 하는 일이 아니라고 보고, 좋은 교회 개척자를 세우기 위해서 '규모있는' 교회가 필요한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 저는 그 시스템을 인위적으로 만들 필요 없이 각 가정이 그 시스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가르침과 제자화의 책임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며, 디모데 서신과 디도서에 나오는 방식의 장로(리더) 선출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가정이 없이 홀로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위한 별도의 시스템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21/12/18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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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럼에도 교회가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교회의 긍정적인 역할또한 계속해서 봐왔기 때문에 의견 자체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의도로 말씀하시는지는 알것같습니다. 일단 이건 제가 좋은 가정교회를 경험해보지 못해서이기도 하기때문에 뭐라고 더이상 의견을 얹기가 어려운것 같습니다.

그리고 2번의 대형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는, 저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 대형교회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했던 말이 아니었습니다. 제 나름의 기준으로 설명했듯이, 어느정도 재정자립이 되고 지역사회에 공헌이 가능할정도로 성장한 대형교회가 할 수 있고 해야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했던 말입니다. 저는 좋은 부목사를 키워서 자립시키는것 역시 대형교회가 감당해야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부목사를 키워서 메가처치로 확장시키는데 일조하는게 아니라요.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갈림길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목사나 전임사역자의 역할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계신것 같은데, 이건 신학적으로는 어떤 의미인지 저는 판단이 잘 서지 않네요. 개인적으로는 그게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있습니다. 목사의 독점적 권한이 비성경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만큼은 제가 더이상 논할 내용이 아닌것같네요.

그래도 의견 나누는 과정이 즐거웠습니다. 답변 계속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록타이트
21/12/1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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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또한 교회가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교회가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을 할 것인가? 라고 하면 안타깝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사를 관통하는 섭리를 무시하고자 하는 건 아니구요, 다만 인간이 만든 시스템은 계속해서 임계점에 다다르고 그렇게 되면 재조직화를 거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는 현재 임계점을 넘어갔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Restar님과 대화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층방정
21/12/18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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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을 보면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더라 등 수적 성장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이 있지 않나요?
록타이트
21/12/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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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객관적인 언급일 뿐 긍정적으로 보기 애매하다고 봅니다. 같은 예로 예수를 따르는 무리도 수천이었지만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죠. 그리고 그 무리를 하나의 교회 보기도 어렵구요. 오해의 소지가 보여서 첨언하자면 회심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긍정적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내용이 개교회가 특정 규모 이상이 되어야 할 당위를 주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뜻이었습니다.
8시 53분
21/12/19 01:07
수정 아이콘
말씀해주신것처럼 설교와 목양이 중요하고 둘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는건 참 중요한데.
그게 정말 어렵고도 어렵습니다.
제가 예전에 있었던 교회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설교를 매주할때는 준비할것도 많고
설교는 거의 토요일에서 일요일넘어가는 새벽에 쓰다보니 이게 잘 된건지. 어쨌는지 알수가 없었는데
교회 그만두고 한 두달있다가 갑자기 한주 설교를 부탁받았을때는 거의 3-4일을 공들여서 준비했더니
부장님이 아니 도대체 이렇게 설교할수 있으면서 왜 있을때는. 크크크. 이랬던 경험도 있을정도로.
설교와 목양이라고 쓰고 일이라고 부르는것의 밸런스는 정말 맞추기 어렵습니다.
저야 워낙 부족하니까 한편도 헉헉대긴했지만 담임목사님들은 대략 1주일에 적으면 5편 많으면 10편의 설교를 준비하고
교인이 없으면 없는대로. 많으면 많은대로 생기는 여러 교회 제반 문제들을 고민하고 처리하다보면
몸이 망가지는 경우도 종종있고요.
타협해서 설교 혹은 목양 이러거나 아니다 둘다 안해 하고 탈주하는 경우도 종종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장에 있는 제 친구들이 여전히 만날때마다 토론하는 주제인데 결론은
응 담목되면 고민해 부목님 이러고 친구들은 너는 안수나 받아 전도사야 이러고 끝납니다 크크.
계층방정
21/12/18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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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전공자라면 제 글이 얼치기라는 거 잘 아실 텐데 그래도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신학전공자 분들은 삶에서 직접적으로 고민하는 부분일 것 같아요.
8시 53분
21/12/19 01:13
수정 아이콘
얼치기라뇨 생각해볼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뭐 신학전공을 했지 목회자는 아니라서 고민만하고요.
친구 목사들은 정말 치열하게 노력하고 또 공부합니다. 물론 요즘엔 탈주가 트렌드라. 탈주러들도 종종있고요 크크.
아구스티너헬
21/12/18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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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문제는 로마카톨릭이 가장 타락한 순간에 이에 대한 강한반동으로 나온 교파(?)이기 때문에
로마카톨릭에서 당시 배불리는데 남용한 모든 교리를 강하게 부정하면서 시작하였고 이로인해 예수 이후 성경연구와 교부들이 이룩한 논리체계가 무너진 상태로 시작되었다는게 문제라고 봅니다.

그결과가
이신칭의라는 인스턴트식 구원,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값 싼 믿음,
성령을 무시하는 공격적 전도 문화,
논리의 부재속에 지나치게 영성만 강조되는 반지성주의,
오용되는 순종을 통한 4위일체(성부,성자,성령,목사)


이런 현대 개신교의 모든 문제를 야기 하고 있다고 보고있습니다.

정반합의 원리에서 기존 로마카톨릭의 정에서 시작되어 개신교의 반을 지나 정작 합은 개혁된 로마카톨릭이나 복음주의 이외의 온건한 개신교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21/12/18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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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유산을 전부 부정하면서 중세까지쌓아올려졌던 지성을 다 버리다시피한게 큰 문제였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근데 이신칭의나 값싼믿음이라고 표현하신건 개신교가 아닌 기독교 자체의 교리 아니던가요; 행위가 결정하지 못한다는게 기독교의 기본인데요..;
공격적 전도나 반지성, 4위일체같은 부분은 개신교가 쌓은 잘못된 유산이지만요;;
아구스티너헬
21/12/18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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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아닙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은.
로마서를 인용하여 "오직" 믿음으로서만 의롭다 입니다. 그에 따른 실천인 성화는 칭의에 조건이 아닙니다.
카톨릭에서 성화를 불법/편법 적으로 해석하여 나온게 면죄(벌)부 임으로 이에 대한 강한 반동으로 성화(선행, 교리에 따르는 삶, 등등)는 칭의에 조건이 아니며 단지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 라는게 개신교의 핵심교리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따르는 삶은 구원의 조건이 아님으로 "값싼" 믿음이 되었죠.

그래서 루터가 개신교 성경에 야고보서를 제외하려고 했습니다.(그리고 몹시 싫어했습니다. 지푸라기 같은 종이묶음이라고 도 했죠)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는 말이 루터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거거든요.
21/12/18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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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교리는 잘 몰라서 여쭤봅니다.
카톨릭에서도 '구원 자체'는 '믿음'에서 나오는것이 아닌가요?
성화 - 믿음에 따른 실천은 믿음과 구원 이후의 상급에 대해 영향을 끼치는 개념이 아닌가요?

카톨릭쪽에서는 실천이 없이는 아예 구원이 없는개념인가요?
아구스티너헬
21/12/1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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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예수님이 대속한 죄는 원죄(아담 선악과 절도죄) 뿐이죠.
이 원죄 때문에 아담은 천국에서 퇴거되었으니 예수님이 원죄를 대속하였다면 아담의 후손은 복권되어 천국에 다시 아담 시민권을 얻는 개념입니다. 다만 여기 따르는 조건은 "믿음"이죠 고로 인간은 믿음을 통해 구원받습니다.
근데 이러면 어떻게 되냐하면 사법기능이 무력화 됩니다.
살인 강간을 일삼아도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이땅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되겠죠
그래서 성화가 강조되는 겁니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 구원받지 못한다는거죠.
근데 성화가 까다롭잖아요? 그래서 이거에 대한 판단을 신부가 하는 겁니다.
잘못을 하면 고해를 하고 신부가 이를 해석하여 참회하면 용서하는 겁니다. 현실판 사법부 기능을 한거죠
근데 신의 자비는 끝이 없기 때문에 고해를 하는데 용서를 안할수 없죠.
매일 한명씩 살인을 하고 고해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죄와 벌이 구분됩니다.

고해를 통해 죄(원죄 말고 현생의 죄)는 용서받고 여전히 천국 시티즌쉽의 예비명단에 있게되지만. 그 죄에 대한 벌은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연옥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죄는 용서받아 지옥을 안가지만 연옥에서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다 받고 천국으로 가는거죠.
면죄부는 사실 면죄가 아니라 면벌입니다.
차곡차곡 쌓인 벌을 선행과 배품을 통해 차감한다는 개념이거든요.(염라대왕이랑 비슷하죠 양팔 저울에 죄와 선행에 무게를 측정하는..)
근데 이게 후대에 편법적으로 운용되면서.. 성물을 사 모으면 벌이 차감된다하고 사람들에게 카톨릭 교회가 돈을 받고 성물을 팔다가 야매 성물 만들기도 귀찮아서 종이쪽지(면벌부)로 만든겁니다.

이걸 보고 치가 떨린 루터는 연옥을 부정하고 죄와 벌의 구분을 부정하고 올바른 성화에 대한 신부의 판단권한인 고해를 부정하고 오직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라고 고대로 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린 지성의 교리를 부정한 겁니다. 그리고 그게 개신교의 핵심 교리가 된것이죠. 그래서 개신교는 죄와 벌의 구분이 없고 연옥이 없습니다.
그리고 개신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순종"의 개념이 나오죠. 이게 근래에 목사에 대한 순종이 되어서 문제지만.
21/12/18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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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신교는 죄와 벌의 구분이 없고 연옥이 없죠.
적어주신것처럼 죄와 벌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밀양이 이 주제였죠 아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내재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야한다는게 개신교의 교리이긴 하죠. 기본적으로는 바울의 이야기처럼 천국도 다 같은 천국이 아니고, 지상의 삶에 의해서 천국의 상급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제가 배웟던 목사님같은 경우에는, '죄와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라고 하셨었죠. 죄와 용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풀어야 하는거고,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는 화해의 과정이 별도로 필요하다고요 이런게 실천의 영역인데, 말씀하시는것처럼 이런걸 제대로 설교하시는 분이 드문것도 사실입니다.

개신교쪽의 신학이 값싼신앙이라고 취급받을건 아니지만, 죄와벌의 개념을 모호하게하고 개인의 양심에 맡기다보니 부정적인 요소가 강해졌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공감합니다.
아구스티너헬
21/12/19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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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값이 싸다라는 표현은 싸구려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믿음의 대가로 지불해야되는 노력이 폄하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워서 누구나 부담없이 믿습니다를 외칠수 있죠.. 말씀을 따르는 무거운 믿음의 무게는 꽤나 많은 신자들이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목사들도 딱히 지적하지 않죠.

이분들이 사후에 그분의 신판을 받을때 과연 어떤 판결을 받을지는 저도 참 궁금합니다.
계층방정
21/12/18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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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대 한국 개신교의 많은 문제점이 종교개혁 당시를 고수하는 분파에도 있지만 오히려 19세기 말 영미권 부흥운동을 고수하는 쪽에서 더 많이 나타난다고 봐서, 종교개혁 당시보다는 19세기 말의 사회적 분위기를 더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전광훈 등 대면예배 문제는 실천하지 않는 믿음과는 거리가 멀죠. 오히려 실천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문제라...
아구스티너헬
21/12/18 22:48
수정 아이콘
실천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이루신 것처럼 이땅에 천국이 열리는 것을 위함이죠.
모두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만 살면 굳이 천국이아니라 이땅이 천국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말이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게 아니라 목사의 말에 순종하여 폭력과 불법을 "실천" 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실천과는 거리가 멀죠.
실천은 성화니까 말이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엄중한 코로나 시국에 대면예배를 강행할리 없거든요.

저는 19세기말 영미권 부흥운동은 루터로 부터 잉태된 값싼 믿음과 논리로부터의 괴리가 처음엔 카톨릭의 문제점에 반하여 긍적적으로 작용하다가.
그 문제점의 중화 기능을 초월하여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계층방정
21/12/1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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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제일교회 본인들은 대면예배가 성화에 어긋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면예배 때문에 코로나가 퍼졌다는 생각 자체가 거의 없어요. 정부가 중국인 입국을 안 막아서, 대중교통을 안 막아서,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를 안 막아서 코로나 퍼뜨려놓고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거짓말로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실천하지 않는 믿음이 문제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머리를 비우고 실천만 하는 믿음이 된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구스티너헬
21/12/1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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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성화에 대한 성직자의 판단 권한을 부정한 개신교에서 심지어 성직자도 아닌 목사가 무엇이 성화인지 왜곡해서 교인들에게 실천을 강요하고
그걸 무지성으로 받아들여 투쟁하는 신도들이 현 개신교 문제를 실날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21/12/1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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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개신교 신도도 아닌 처지로 ..이런 댓글을 다는 게, 온당한가..싶기도 합니다만.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목숨과도 같고, 아무리 사회적 어려움이 있어도 ` 모이는 예배`를 해야하고,
또 `모이는 데` 힘써야 한다는 종교적인 깊은 의미쯤은.. 들은 풍월로도 대충 알고는 있습니다만.

이런 시국에도 꼭,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실 뜻일까..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드릴 합당한 예배인가... 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군요.

다같이 모였냐 안 모였냐, 또 모이는 장소가 어디냐 교회인가 집인가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가요.
하나님은 모이든 못 모이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고, 또 기뻐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려주신 글은 솔직히 좀 어렵고요, 비신도로서의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닉언급금지
21/12/18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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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생각키에는 '주님 여기 한 명 더 올려보냅니다.'에 해당할테니 기뻐하나보죠.
계층방정
21/12/18 12:31
수정 아이콘
개신교 신도 아닌 분들과도 개신교의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것을 저는 환영하고요, 좀 더 쉬운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댓글로 짧게나마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미국 개신교가 지성이 부족한 사람들도 구원받게 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엉뚱하게도 지성 없는 교회를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이유는 지성 없는 교회를 만든 결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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