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12/16 00:19:03
Name 올해는다르다
Subject 잡생각 - 정약용의 편지들
안녕하세요. 잠깐 환기가 될만한, 가벼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정약용은 말년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중에 교과과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교과서에도 수록됐던게 자식들에게 소박한 삶과 채식을 권하는 글인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략)
검소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 음식은 연명으로 되는 것이다. 좋은 등심고기나 청어 같은 맛있는 생선도 입술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물건이 된다. 목구멍을 넘어갈 것도 없이 사람들이 침을 뱉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귀중한 것은 성실함이다. 세상에 속여도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속여도 되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자기의 입이다. 험한 음식으로 잠시 잠깐 속이고 지나가는 것-이것이 좋은 방법이다.

 올해 여름 내가 다산에 있으면서, 상추 잎으로 밥을 주먹만 하게 싸먹었다. 어떤 손이
 “쌈을 싸먹는 것이 절여 먹는 것과 다릅니까?
하고 물었다. 내가
“이건 다산 선생이 입을 속이는 방법일세.”
하였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모름지기 이런 식으로 생각해라. 정력과 지혜를 다하여 뒷간을 위하여 충성을 바칠 필요가 없다. 이것은 궁핍한 처지를 헤쳐 나가기 위한 방편이 아니다. 하늘에 닿게 부귀하다 하더라도, 선비가 집안을 거느리고 자신을 단속하는 법이 이 두 가지-근면과 검소를 빼놓고는 착수할 곳이 없는 것이다.
(하략)


일단 좋은 말이죠. 그런데 마찬가지로 타지에서 유배중이던 형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은 또 다릅니다.

(전략)
1년 365일에 52마리의 개를 삶으면 충분히 고기를 계속 먹을 수가 있습니다. 하늘이 흑산도를 형님의 식읍지로 만들어주어 고기를 먹고 부귀를 누리게 하였는데도 오히려 고달픔과 괴로움을 스스로 택하다니, 역시 사정에 어두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들깨 한 말을 아이 편에 부쳐 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입니다. 또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 장, 기름, 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초정 박제가의 개고기 요리법입니다.
(하략)

자식들한테는 나도 채소쌈만 먹는다고 하면서 풀만 먹으라더니, 형님한테는 개 수육 만드는법 강의를 하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물론 사람 됨됨이가 이중적이라 그런게 아니라, 유배 중인 형의 건강을 염려해서 그런 것이겠죠. 하지만 옆에서 자기들끼리 개고기 삶는거 보고 있으면 채식이고 상추쌈이고 집어치우고 싶은 것도 사람의 마음이고요.

그럴 듯한 말을 하기는 쉽고, 그걸 이렇게 비꼬는 것도 쉽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에서 원칙을 제대로 세우고 지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거 같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임전즉퇴
21/12/16 05:40
수정 아이콘
채식vs육식은 재미있는 발상인데 진지하게 보자면 흙수저생존요리vs자취생영끌요리 구도 같네요. 양자가 모순되는 것만은 아니고 말씀처럼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죠.
다산은 청렴결백으로만 똘똘 뭉쳐서 위대한 선비가 아니라 이런 진솔한 목소리를 남겨서 매력적이죠. 일단 이런 자필을 많이 하셨고, 아주 역적으로 몰리지 않아 그게 많이 살아남아서 다행..
시원한물
21/12/16 07:16
수정 아이콘
흑산도가 정약전의 식읍이라니 다산의 형님 농치는 솜씨가 일품이군요.
그러고보면 정약전 선생이 생선은 원없이 드실 수 있는 단백질 풍족한 환경에 계시긴 했습니다.
21/12/16 08:45
수정 아이콘
윗내용은 풍비박산난 집안에 남겨진 자식들에게 보내진 편지라는 배경을 고려하면
표면적인 채식권유나 식탐을 버리라는 내용과는 다른 속뜻이 읽히기는 합니다.
굵은거북
21/12/16 08:55
수정 아이콘
년 52마리를 먹으라면 매주 개한마리씩 드시란말인데. 그때도 주 7일제 였을까요?
답이머얌
21/12/16 11:03
수정 아이콘
냉장 냉동 기술이 없던 그 시대에 최대한의 보관 기간을 고려해서 그런거 아닐까요?

여름은 3~4일로 짧게 잡고, 겨울은 10일 이상으로 길게 잡고 해서 말이죠.

냉장냉동 기술이 없던 시절이라 음식물 보관 기간에 있어서는 현대인보다 경험적으로 훨씬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21/12/16 10:10
수정 아이콘
"text는 context를 가진다"는 사실의 한 보기 아닐까 싶습니다.

정약용이 공식적으로는 배교하였으나, 내심에는 주/주일 개념이 남아 있었다는 흔적도 보입니다.
굵은거북
21/12/16 12:42
수정 아이콘
맞네요! 주일의 흔적이군요! 궁금증 해결했습니다.
21/12/16 10:55
수정 아이콘
동자승들에게 고기 먹이시던
어느 큰스님 모습이 떠오르네요.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0786 초등교사노조 서울 집회…“늘봄학교, 지자체가 맡아야” [144] 칭찬합시다.11679 24/01/27 11679 0
100785 대구 이슬람사원 앞 돼지머리 둔 주민 ‘무혐의’ [176] lexicon10701 24/01/27 10701 12
100784 FT "남녀 가치관차이, 갈등심화는 범세계적 경향" [128] 숨고르기11711 24/01/27 11711 0
100783 서울 도봉구 방학동 아파트 화재사건 분석이 나왔습니다 [34] Leeka9173 24/01/27 9173 3
100782 월 6만2천원에 대중교통 무제한 이용 '기후동행카드' 드디어 나왔습니다 [53] 프로구29275 24/01/27 9275 0
100781 파리엔 처음이신가요? [22] 아찌빠5945 24/01/27 5945 23
100780 [에세이] 이 길이 당신과 나를 더 가깝게 해주기를 [1] 시드마이어2919 24/01/26 2919 5
100779 유럽연합의 규제에 맞춘, 애플의 서드파티 스토어 허용 + NFC 개방 발표 [30] Leeka6916 24/01/26 6916 3
100778 비권 92학번은 동년배 운동권에 미안함을 느껴야할까? [167] 칭찬합시다.9838 24/01/26 9838 0
100777 꼭두각시의 주인 [12] 머스테인4128 24/01/26 4128 2
100775 지방노동위원회 채용내정 부당해고 사건 패소 후기 [50] 억울하면강해져라8706 24/01/26 8706 46
100774 도대체 왜 손흥민은 박지성보다 국대에서 부진하게 느껴질까? [170] 개념은?14131 24/01/26 14131 9
100772 배현진, 서울 길거리에서 피습 [169] 김유라21544 24/01/25 21544 0
100771 영남지역 교수가 경북일보에 이준석의 천하삼분을 응원하는 칼럼을 기고했네요. [471] 홍철9554 24/01/25 9554 0
100770 5분기만에 SK하이닉스가 흑자 전환했습니다. [13] DMGRQ6591 24/01/25 6591 2
100769 잊혀진 다이어트 - 32kg의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난 후기 [23] 랜슬롯6047 24/01/25 6047 16
100767 서천 시장 방문 관련 논란, 대통령실과 상인들의 다른 의견 [61] 빼사스11604 24/01/24 11604 0
100766 주말에 23년을 회고할 장소 추천 합니다.(feat. 홍대 T팩토리) [3] 판을흔들어라6496 24/01/24 6496 4
100765 가사를 좋아하는 노래들. [47] aDayInTheLife3648 24/01/24 3648 2
100764 이준석-양향자 합당 선언…"서로 비전·가치에 동의" [34] Davi4ever9048 24/01/24 9048 0
100763 위선도 안떠는 놈들 [179] 김홍기21475 24/01/23 21475 0
100761 [역사] 손톱깎이 777 말고 아는 사람? / 손톱깎이의 역사 [29] Fig.16529 24/01/23 6529 14
100760 우리 정치의 일면 [58] 하늘을보면9962 24/01/23 9962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