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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0/04 12:33:11
Name 아난
Subject <오징어 게임>의 수수께끼 하나 (스포일러) (수정됨)
다른 데쓰게임물과 달리 게임에 참여하고 주요 조역으로서 캐릭터가 세세히 펼쳐보여져 시청자로부터 어느 정도 공감이나 친근감마져 끌어내는 인물이 주최자로 밝혀진다는 것은 <오징어 게임>의 특장점이다. 그 인물, 즉 오일남은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단순하지 않은 인물이다. 이해가 (금방)되지 않는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도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은 재미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게임을 즐기지는 않는다(그가 구슬 게임에서 지고도 살아남은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치명적인 질병으로 얼마 안 남아 있다고 해도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생사가 갈리고 내가 이기면 상대방이 죽는 게임을, 사람들이 떼거지로 죽어나가는 게임을 오일남처럼 즐길 수는 없다. 오일남은 첫번 게임부터 전혀 움츠리지 않고 즐거워 죽겠다는듯이 몸을 움직인다. 자신의 기지가 큰 역할을 해 줄다리기 게임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누워있는 상태에서 그가 짓는 환희에 넘쳐 있는 표정을 보라. 그 승리로 상대편 열명이 죽은 상황의 끔찍함, 그 승리의 아슬아슬함은 보통사람들한테는 그런 표정을 못 짓게 한다.

그가 즐긴 것은 문자 그대로의 게임만이 아니다. 그는 선한 인간이 과연 얼마나 존재하는가를 건 게임도 즐겼다. 그는 선의 미미함을 믿는다. 그가 자신의 그 믿음이 약간이나마 깨질 가능성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 기대 없이는 그 게임이 그리 즐거운 것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실 그는 이미 성기훈이 어느 정도 선한 인물임을 경험했다. 약한, 악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타자를 위해서 얼마나 자신이 위험해지는 것을/불리해지는 것을 감수할 수 있느냐 면에서 성기훈은 꽤 선한 편인 인물이다. 그가 오일남이 가장한 치매를 이용한 것은 악하기보다는 약한 것이다. 그것은 기만적인 방식의 이기적인 행동이었지만 조상우의 적극적인 기만적 행동보다는 훨씬 덜 이기적이다. 게다가 지영은 새벽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희생시키는 선함을 보여주였다. 지영의 그 선택은 상당히 논리적이다. 둘중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면 누가 죽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낳는가를 따져서 해당되는 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다라는 본능적 자기중심주의를 초월해 나를 완전히 이성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종교들에서 처음으로 장엄하게 확인된 극렬한 이타주의가 보통 사람들에게도 보인다는 사실의 드라마틱한 과시이다.      

오일남이 지영의 그런 자기 희생을 보고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자기희생이 아주 드물게나마 보통 사람들한테서도 보인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삭막한 자본주의적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들을 경험했던지 간에 오일남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지영 정도는 아니더라도 분명 선한 인물들을 접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오일남은 향수에 젖을 정도로 유년기를 제법 즐겁고 따뜻하게 보낸 걸로 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일남이 잔인함의 극한을 달리는 데쓰게임의 주최자라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오일남의, 배려라기보다는 얼마나 복귀할지에 대한 호기심 덕분으로 게임을 벗어난 이들 중 상당수가 다시 게임에 복귀했지만 그 복귀는 빚지고 지옥같은 삶을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일회차 게임 참가 전에 게임 탈락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것을 주의받았다면 과연 몇명이나 게임에 참가했겠는가?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던 것 뿐이다. 오일남 자신은 그 빚들을 지고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게임 참가자들의 판단이 아니고 그리 판단하는 것과 그 판단에 따라 대량살인이 귀결되는 기획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이다.

오일남은 이미 돈이 충분하기에 돈을 더 벌기 위해서 그 게임을 주최한 것이 아니다. VIP들은 그 게임을 운영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이 드니 끌어들인 것 뿐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대량살상을 자행하는 테러리스트들처럼 어떤 숭고한 이념을 위해서 그 게임을 주최한 것도 아니다. 오일남은 그저 재미를 위해서, 선의 미미함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만의 하나 깨질 가능성을 기대하고서, 그러나 그 믿음이 깨질리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게임 주최자가 된 것이다. 그 게임이 극단적인 데쓰게임인 것은 그래야 더 재미있기 때문에, 그래야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관찰하는 재미가, 정확히는 자신의 믿음이 확증되는 재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일남은 순전한 악의 현신이다. 그 순전한 악은 사회에 구조적으로 자리잡은 불평등, 재기불가능, 승자독식주의의 악을 능가하는 것이므로 결코 후자들을 리얼리즘적으로 유비하는 것이 못 된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시청자들은 오일남이 어쩌다 그런 인간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일남이 극소수나마 문자 그대로 선한 인간들조차도 가차없이 죽음으로 내모는 게임을 그저 재미를 위해 구상하고 실행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맥락은 드라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다가 우리 다 죽어' 하는 그의 외침은 연극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는 선의 미미함은 믿어도 선을 알아보는, 선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므로, 제법 행복했던 유년기를 보낸 인물이므로, 그가 복수심 따위의 개인적 감정과 돈 욕심과 어떤 숭고한 이념 - 이 모든 것들과 아무 관계없는, 순전히 재미만을 위한 대량살인 게임의 주최자라는 사실은 이해되기 힘들다.      

재미를 위해 대량살인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오일남의 악함은 세계가 선해질 희망이 없기 때문에 소수의 선한 인간들의 존재 의미도 없다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의 의미가 없다는 냉소적 믿음을 가리킨다. 그 믿음은 선이 아예 없다는 믿음이 아니라 너무도 미미하게만 있어서 세계는 계속 패배하고 실패한 이들의 지옥으로, 악이 선을 압도하는 지옥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오일남은 자신이 창조한 그 데쓰게임의 세계가 현실 세계보다 더 지옥같지는 않다고 믿는다. 따라서 마지막 게임에서 성기훈이 이겼다는 것은 그에게 또는 드라마상 별 의미가 없다. 동사할 처지에 놓여 있는 노숙자를 외면하지 않는 정도의 지극히 간단한 선함보다 더 큰 선함을 이미 기훈과 지영이 드러냈는데도 오일남은 요지부동이었다. 드라마가 괜히 오일남이 자신이 그 마지막 게임에서 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죽게 한 것이 아니다.

물론 오일남의 이런 믿음은 타당하지 않다. 하나의 전체로서의 세계는 지옥도 같다고 해도 그 지옥도의 여백을 찾으려 애쓰는, 또는 그 지옥도에 여백을 만드려고 애쓰는 소수의 인간들은 늘 있고 그들의 그런 노력은 세계가 계속 지옥도로 남아 있게 되어도 의미있는 것이다. 게다가 다시 말하지만 오일남이 어쩌다 이런 잘못된 믿음을 가진 인물이 되었는지를 드라마는 전혀 보여주지 않으며 그의 보여진 모습 일부는 그의 그 믿음과 어긋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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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4 12:56
수정 아이콘
(수정됨) 주최측과의 사전 모의가 있었다면, 오일남이 실제로 목숨을 걸어야했던 게임은 줄다리기 뿐입니다.
구슬게임에서 지고도 살아남은 것도 우연이 아니며, 오일남에게 총이 발사되는 장면은 카메라 트릭을 이용해 교묘하게 담장에 가려집니다.
4번 게임까지 즐기고 오일남은 무사히 게임에서 빠져나온 겁니다.

+ 지금까지 쓰신 글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크
읽음체크
21/10/04 12:58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글만 올려주시면 참 좋을텐데
알카즈네
21/10/04 12:58
수정 아이콘
제목에 오징어 게임 관련 써주시지.. 글 제목 자체가 약스포이긴 하고
전 아무 생각없이 oil man으로 이해하고 또 중국 관련 뭔가 싶어 무심코 글 클릭했다가 후회 중이네요.
6화까지 본 상태인데 그래도 일남이형 뭔가 있다는 건 대놓고 복선이 너무 많아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잠재적가해자
21/10/04 13:01
수정 아이콘
제목에 오징어게임 포함했으면 제목 자체가 거대한 스포일러가 되버려서 클릭 안해도 안 본 사람들은 자동스포가 되버리죠... 어쩔수 없는거같습니다 이미 나온지 2주 가까워진 상황이니
포메라니안
21/10/04 13:28
수정 아이콘
원래 제목이 뭐였어요??
알카즈네
21/10/04 13:33
수정 아이콘
오일남의 수수께끼(스포일러)였어요. 지금은 감사하게도 피드백 해주셨네요.
뭐 이걸 oil man으로 읽은 건 작성자분 성향을 떠나서 순전히 제 잘못이긴 합니다...
21/10/04 14:29
수정 아이콘
아이고 안타깝네요.. 아무리 흐린 눈하고 있더라도 하도 원치 않는 스포를 많이 당해서 전 중요한 이벤트 무스포로 즐기고 싶을 때 아예 에어플레인 모드 켜 놓고 퇴근하면서 로컬 저장 음악만 듣습니다. 커뮤니티 접속은 안할 수 있어도 나도 모르게 트위터 같은 거 습관적으로 켜서 담원 충격의 1패 이런 거 볼 때가 많아서... 오징어 게임도 이 악물고 스킵 해 가면서라도 확 몰아봤었네요
맑은강도
21/10/04 13:07
수정 아이콘
저만 그랬나요.
잘 읽다가 댓글보고 다시 글쓴이 확인하고 놀랐네요. 크크
21/10/04 13:21
수정 아이콘
오일남이라는 캐릭터는 더 잘 표현해낼 수도 있었다고 보는데 아쉽긴합니다.
21/10/04 14:11
수정 아이콘
딴 건 몰라도 단간론파의 밤에서는 오일남도 죽을 뻔 했죠.
데브레첸
21/10/04 16:1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오일남을 넘어 안 풀린 떡밥이 정말 많은데 후속작을 노린 것 같기도 합니다
후속작을 기대해보죠 크크크
플리트비체
21/10/04 18:08
수정 아이콘
'돈이 너무 없거나 많은 사람은 인생이 재미가 없다'
인상깊은 그의 대사였습니다
그의 캐릭터와 목적에 대해 여러 분석을 해볼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저 대사가 함축하고 있다고 봅니다 '재미'
저도 최근에 느끼는 거지만 인생에 점점 재밌는 것들이 줄어듭니다 어릴 때 딱지치기하던 순수재미를 넘어설만한게 딱히 안보이죠 현실 팀플 게임을 목숨걸고 한다? 재미 끝판왕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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