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09/06 23:25:29
Name bettersuweet
Subject 내 마지막 끼니
장례를 치르고, 일 년에 한두 번쯤 봉안당에 들르는 일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마치 슬픔 총량 불변의 법칙이 있기라도 한 듯, 봉안당에서 슬픔을 만끽하면 만끽할수록 일상에서의 슬픔은 줄어들었고, 그렇게 자연스레 우리는 다시 예전의 평온했던 일상을 되찾았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될 무렵에서야, 봉안당 곳곳마다 켜켜이 쌓인 봉안함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켜켜이 쌓인 타인들의 슬픔을 보면서, 매정하게도 나는 이 슬픔이 나 하나만의 것은 아니구나 하는 이기적인 위안을 얻었다. 몇 개월에 한번씩 그곳에 들를 때마다 빈칸으로 남아있던 봉안당 칸 하나하나가 촘촘히 채워졌고, 남겨진 사람들의 편지, 사진들을 보며 생전 그들의 삶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다지만, 모든 사람의 죽음은 각각 다른 무게를 가졌다. 20대 초반에 갑작스럽게 삶이 끝나버린 여느 청년의 마지막과 일가족이 모두 지켜보는 자리에서 천수를 누리고 떠난 어르신의 죽음이 같은 무게를 가졌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없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년을 가진 봉안함 하나하나의 주인들을 보며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하루가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불과 몇 달 전 내가 이 자리에 왔을 때 멀쩡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던 누군가는 몇 달 후 이 칸의 주인이 되었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화폐는 유한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가지듯, 삶 또한 그 유한함 때문에 의미를 얻는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을 우리 함께 흘려보내기에 함께 있음이 더 소중하고, 유재하의 1집은 유재하 2집의 부재 때문에 더 큰 울림을 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우리 삶이 유한하다는 것만 알 뿐, 그 길이와 깊이를 알지는 못한다. 봉안함 속 편지에는 그 무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후회하며 뒤를 바라보며 서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더 잘할 걸 하고 아쉽게 되뇌지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어리석은 후회일 뿐이다. 우리는 망자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도, 그 끝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는걸.

나도 그들을 흉볼 처지는 아니다. 임박착수형 인간 최성수는 마치 무한한 시간을 가진 듯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니까. 몇 년째 머릿속으로만 다짐 중인 부모님의 건강검진 계획부터, 연락해야지라고 몇 년간 되뇌다 결국은 끊어져 버린 관계, 매해 작년 목표를 복사 붙여넣기 하는 버킷리스트 작성까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 미루기투성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할때도 마치 영원한 삶을 살 것처럼 표현을 아끼고 아끼며 결국 그 기회를 놓치곤한다. 다 알면서도 그렇게 우물쭈물 하루하루 살다 보면 나 또한 언젠가 끝을 맞이하겠지.

회사에서 퇴근해 푸석푸석한 닭가슴살을 목구멍에 욱여넣는다. 봉안당에서의 교훈 덕분에 이 닭가슴살이 내 생애 마지막 끼니가 될 수 있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멈출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내일은 일어나면 아무 말 없이 어머니를 한번 꾹 안아드리리다 다짐하고 잠을 청한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1/09/07 00:56
수정 아이콘
고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는 느낌이고 무어라 댓글을 달아야 할지 몰라서 좋아요 누르고 그래도 부족해보여 주절주절 댓글 달아봅니다.

인생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감정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아가는 과정같습니다.
인민 프로듀서
21/09/07 18:4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158 일러스트레이터 이노마타 무츠미 사망 [17] Myoi Mina 24623 24/03/19 24623 1
101157 [번역글] 추도:토리야마 선생 희대의 혁명아가 걸어온 진화의 길 [13] Starscream3976 24/03/19 3976 8
101156 자애와, 동정과, 역겨움을 담아 부르는 ‘가여운 것들’ (스포일러 주의!) [10] mayuri3586 24/03/19 3586 2
101154 평범한 개인 투자자는 주식을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가? [77] 사람되고싶다9335 24/03/18 9335 15
101152 해외직구는 좋지만... 역차별 받는 국내 수입업자들? [123] 아서스14557 24/03/18 14557 6
101151 슬램덩크 극장판을 얼마전에야 봤습니다. [35] rukawa5571 24/03/17 5571 0
101150 meson님이 올려주신 연개소문의 승첩에 대한 글을 보니 떠오른 기억이 있습니다. [2] 니드호그2403 24/03/17 2403 7
101149 쓸때없이 맥북프로를 산 의식의 흐름과 10일 후기 [30] 한국화약주식회사5093 24/03/17 5093 1
101148 이엠텍 4070 슈퍼 78만 핫딜+3D Mark 할인. 그 외 잡설 [30] SAS Tony Parker 4269 24/03/17 4269 2
101147 [역사]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9. 나가며 [10] meson1768 24/03/17 1768 15
101146 [역사]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8. 태산봉선(泰山封禪) [6] meson3053 24/03/16 3053 13
101145 (스포)요즘 본 영화 감상​ ​ [4] 그때가언제라도3753 24/03/15 3753 0
101144 제게 초능력이 생긴다면,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영원히 살도록 할겁니다 [51] 보리야밥먹자7081 24/03/15 7081 0
101143 [역사]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7. 선택과 집중 [10] meson3813 24/03/15 3813 9
101142 오랜만에 랩 작업물 올려봅니다! (스파6 류 테마 등) [4] 개념치킨2509 24/03/14 2509 7
101141 『드래곤볼』과 함께 하는 인생 (토리야마 아키라 추모글) [26] 두괴즐3768 24/03/14 3768 18
101140 [역사]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6. 고구려의 ‘이일대로’ [1] meson1990 24/03/14 1990 12
101139 [역사]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5. 예고된 변곡점 [4] meson3006 24/03/13 3006 12
101138 [공지]선거게시판 접속 방법 안내 공지 [7] jjohny=쿠마5399 24/03/13 5399 1
101136 LG전자, 2024 울트라기어 OLED 모니터 라인업 가격 및 출시일 발표 [48] SAS Tony Parker 7954 24/03/12 7954 1
101135 [역사]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4. 침공군의 진격 [5] meson2396 24/03/12 2396 11
101134 [잡담] 북괴집 이야기 [5] 엘케인4326 24/03/12 4326 20
101133 수원 거주민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최근 1주 간 사건 3개 [22] 매번같은13953 24/03/11 13953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