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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7/30 10:59:10
Name 즈브
Subject [일반] 레트로
1.
요즘에 레트로 컨텐츠가 참 좋다. 90~10년대의 음악이나 게임 같은 컨테츠를 즐겨 보게 되고 찾게 된다. 레트로 컨텐츠가 아마도 그 시절 좋았던 기억들을 회상시켜주는 트리거 같은 역활을 하는 것 같다. 토요일 4교시 마치고 친구집에서 먹던 컵라면, 일요일 아침 시장통에 오락실, 하교길의 분식점, 낮잠자고 일어났을 때 들리던 오토바이 아이들 노는 소리 같은게 떠올라 울컥할 때가 있다.

2.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좋았던 기억들만 있었던건 아니였다. 오락실에 가면 삥뜯던 형들도 있었고 힘자랑 하던 친구들도 있었고 고입 대입 스트레스로 늘 피고한던 시절이기도 했다. 아마도 사람의 두뇌는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들을 좋았던 감정으로 바꾸어 그래도 지나고 나면 괜찮아 지니 지금을 버텨라 라는 일종의 생존 본능적 작용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3.
그 시절 그래도 동경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시골 촌 구석에 좀 특출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 덕에 프로그래밍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공부는 나 보다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프로그래밍은 또래 친구들 중에 하는 애들이 없었으니 조금만 해도 특출나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때마침 정보화 시대라는 새 시대?에 들어선 시점이라 정보교육이랑 명목 아래 프로그래밍이 장려 되던 시기였고 나는 그렇게 전산학원을 다녔다.

4.
그 또래 애들이 다들 그렇듯이 전산학원에서는 공부 보다는 게임을 더 했고,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시절이라 PC통신이나 인터넷을 엄마 눈치 보지 않고 실컷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어지저찌 실기 한번만 떨어지고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을 따게 된다. 그 때가 중학생이였을 때 였다. 코드 달달 외워 딴 자격증에 중2병이 발동해서 머라도 된듯 우쭐거리고 있을 때 정보올림피아드 대회를 알게 되었고 공부는 안하고 자신감만 충만한 상태에서 대회에 나갔다가 한 문제도 못 풀고 왔다. 참가인원 미달로  시대회 예선을 거치지 않고 도대회로 바로 나갔던 터라 시대표라 입선 상장은 하나 받아왔었다.

5.
정보올림피아드는 다른 올림피아드와 달리 경시대회와 공모대회로 나누어서 치루어졌었는데 경시는 떨어졌어도 공모는 달달 외운 코드를 어찌 응용하면 될것 같아 다시 도전 해보기로 했다. 행성의 위치 같은걸 비슷하게 계산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볼까 했는데 천문지식도 프로그래밍지식도 떨어져서 완성도 못해보고 그렇게 공모전은 끝나 버렸다. 그래도 미련이 조금 남아 있었던지 그 때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들을 봤는데 지금 봐도 중고등학생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매우 잘 만든 프로그램들이였다. 그런 프로그램을 만든 형들을 자연스럽게 동경하게 되었다. 공모전 강좌 사이트도 만들고 대학이나 고등학교도 특례로 입학하고 모든게 부러웠다.

4.
시간은 흘러 지금 내 나이쯤 되면 꽤나 영향력 있는 프로그래머가 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 봤다. 어릴적 나는 지금 내 나이쯤 되면 그 형들의 이름이 박혀 있는 소스코드 같은걸 받아 쓰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들 그냥 그렇게 살고 있더라. 물론 개인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였다. 변호사가 되거나 스타트업을 하고 있거나 하는...반면 내 가 우와 했던 프로그램 만들었던 형은 좀 찌질하게 살고 있기도 했고...내가 생각했던 영향력있는 프로그래머는 없었다. 이러니 그렇게 부러워 하고 동경했던것들이 너무 허무 했다.

5.  
레트로가 좋아지는 이유는 더 이상 미래가 달라지기가 어려워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동경할 대상이 점점 없어지고 순수한 열정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서 없어지고 대단한 것들이 어떨 땐 바로 내 옆에 있어서 무뎌져서 새롭지 않아서 그렇게 레트로가 와닿게 되는것 같기도 하다. 동경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니 허무가 깊게 찾아 온다. 돌이켜 보면 중고등학생들이 하기엔 대단하지만 지금 내 또래 전공자들이 하기엔 그리 어렵지 않은 것들인데 내가 너무 과한 기대를 했나 싶다. 중고등학교 시절이라 입시만 보고 달리던 시절이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줄 사람이 없었기에 막여한 동경이 더 커졌을 때니까

6.
한동안 허무에  허덕거리고 있다. 목표한 삶에 거의 근접하게 살고 있는데도 허무가 찾아 온다. 이루면 찾아오는 것은 작은 만족감과 긴 허무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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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Demand
21/07/30 14:58
수정 아이콘
그것이 허무일지라도 끝이 있기에 다른 목적을 따라 가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스타트업'을 하시는 분은 '우와'하게 되는 프로그램을 개발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깃에 올릴수는 없겠지만요.
개발괴발
21/07/30 15:27
수정 아이콘
보통 프로그래머들에게 있어 진짜배기 대단한 결과물은 남에게 잘 내보이지 않는 법이라 =_=
(- 사업을 위한 [제품]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긴 합니다만)

프로그래머 근황이라는게 그냥 검색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오히려 검색해서 뭔가 대단한 걸 만드신 거 같은 분들은 대체로 사업적/마케팅적 마인드가 뛰어나신 분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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