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06/28 15:55:43
Name 제리드
Subject [일반] 학생가의 저주 (수정됨)
오랜만에 대학 동창 두명과 연락을 했다.
3년만이었나, 아니 한명은 그보다 오래되었던 것 같다.
가장 최근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대학교 때 단짝이었던 한 명은 가정을 이루고 아빠가 되었고, 안경낀 모범생 이미지였던 한 명은 의외로 댄서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냥 직장인 아저씨가 되었다.
미생 같은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임시완이 아닌 주변에 앉아있는 이름없는 엑스트라인- 나중에 내 후배들이 저런 틀에 박힌 부류는 되지 말아야지라고 느낄지도 모르는 특색없는 무리 중 한명 같은.
서로 다들 잘 살고 있구나 성장 했구나 칭찬하고 대견해했다.
학생가(學生街)에 갇혀있을 때는 그냥 생각없이 사는 녀석들인 줄 알았는데, 머리가 커진건지 세상이 그렇게 만든건지 몰라도 나름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사실 아직 나는 자신이 없지만.

내가 다녔던 대학교의 주변의 학생가는 캠퍼스라기 보다는 비교적 옛 모습이 남아있는 골목이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올 것만 같은 정겨운 골목길 사이사이로 허름한 자취방들과 술집, 밥집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대학 정문으로부터 전철역까지 수백개의 술집이 들어서있지만 서점이라곤 단 하나, 지하의 골동품점 같은 헌책방이 다인 곳이기도 했다.
그 학생가에 갇혀 꼬박 7년을 보냈다.
그 7년 동안 뭘 하고 뭘 이뤘을까,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분명 학생가의 저주이다.
푸근하고 달콤한 저주.
그 학생가에는 생각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나른하고 끈적이는 그런 힘이 있었다.

허나 학생가의 모든 사람이 저주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자기만의 확실한 목표가 있고 대학을 도구나 발판으로만 활용하는 사람도 있다.
주의할 것은 학생가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달려가지 않고 심지어 걷지 않아도 아무도 꾸짖어주지도 일으켜주지도 않는 학생가에서는 가끔 제자리에 발이 묶인 채 허송세월하며 매몰된 사람이 보였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나 스스로는 아무런 열정이 없었기에, 주변 사람들이 보여주는 사소한 열정에도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며 그렇게 학교를 다녔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문득 시간은 흘러있다.
학교에 다닐 때의 나 자신은 실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카스 광고에 나오는 젊은이들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던가 "젊으니까 도전해야지"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았고, 눈 앞에 닥친 과제를 해결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러다 어느새 눈 떠보니 학생가를 떠날 시간이 되었었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를 이뤄서 떠나게 된 것은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서 밀려날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도 가끔 꿈을 꾼다.
꿀 때마다의 디테일은 조금씩 다른데, 큰 줄기는 비슷하다.
서른 살이 넘어서도 학교엘 다니고 있는데, 일이 바빠 좀 처럼 수업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교수님한테 사정을 해 볼까, 백지를 내도 C+라도 주시겠지? 같은 현실적인 고민을 하다가, 이번 학기에는 졸업을 해야 되는데, 졸업을 해야 되는데...라고 되뇌이다 꿈에서 깬다.
꿈에서 깬 직후는 현실과 꿈이 섞여 비몽사몽이라 내가 학교를 졸업을 안했었나 하다가 정신이 점차 현실로 돌아오면서 나는 예전에 졸업을 했고 졸업장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휴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남아있는 학생가 저주의 파편일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더 많은 경험을 하지 못했던 것과 더 알차게 보내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그 때는 싫어했던, 다른 사람들과도 좀 더 잘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든다.
왜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훈수 두는 입장에서 대국이 더 잘보이는 것 처럼, 본인의 눈 앞에 닥친 상황에 대해서는 판단력이 떨어지는 법인 것 같다.
그래도,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순간이 다 재미있진 않았지만 추억보정인지 몰라도 지나고 나서 총평을 내려보면 그래도 재미있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끝나고 나서야 미련이 남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내맘대로만듦
21/06/28 17:44
수정 아이콘
저는 그 시절에 빨리 취직해서 돈을 벌아야겠다는 강박에 쫓기면서, 대학을 다니는둥마는둥.. 다른 공부하다가, 일자리가 결정되자 바로 자퇴해버렸습니다. 딱히 대단한걸 이룬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해야해! 라는 생각에 쫓겨살긴했었죠.

그래서 재밌는 대학생활이라고 할만한게 없었네요.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대학생활 재밌게 보내신분들이 참 부러워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돈 몇년 늦게번다고 달라질거 없었을텐데 그땐 뭐에 그렇게 쫓겼는지.

이러나 저러나 인생은 후회의 연속인가봅니다
제리드
21/06/28 18:43
수정 아이콘
저도 비슷했던것 같습니다.
저는 학교를 끝마치긴 했지만, 다닐때는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끝나고보니 아쉽습니다.
노하와이
21/06/28 18:29
수정 아이콘
앗..아아
집으로돌아가야해
21/06/28 18:45
수정 아이콘
그 푸근하고 달콤한 저주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자들은 끝끝내 대학원에 진학하고 마는데...
만렙꿀벌
21/06/28 21:51
수정 아이콘
대학시절 카오스와 롤 정말 재밌게 했지만 다른 것에 도전하지 못한게 후회되기도 합니다...크크크
B급채팅방
21/06/28 22:33
수정 아이콘
근데 임슬옹 아니고 임시완입니다 크크
제리드
21/06/29 07:27
수정 아이콘
헉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2299 [일반] 어떻게든 중국의 경제를 저지할 수 있을까? (로렌스 H. 서머스) [57] 아난15397 21/06/28 15397 0
92298 [일반] 미국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금권주의 [60] 아난16777 21/06/28 16777 3
92297 [일반] 학생가의 저주 [7] 제리드12489 21/06/28 12489 10
92296 [일반] 웹소설 추천입니다. [27] wlsak14370 21/06/28 14370 2
92295 [일반] 글로벌 여론 조사는 미국이 러시아나 중국보다 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나라로 여겨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43] 아난15582 21/06/28 15582 2
92294 [일반] 중국 국민들의 공산당 지지도 여론조사연구 [92] 아난16949 21/06/28 16949 3
92293 [일반] [외교] 프랑스의 인도태평양 전략 [6] aurelius11418 21/06/28 11418 8
92292 [일반] 내 나이가 어때서 [28] 김홍기12856 21/06/28 12856 5
92291 [일반] 이스타항공 인수한 낯선 기업 ‘성정’ 우려 나오는 까닭 [11] 及時雨14622 21/06/28 14622 0
92290 [일반] [외신] 인상깊은 중국공산당 100주년 특집기사 [26] aurelius15575 21/06/28 15575 16
92289 [정치] [외교]현직 백악관 관료가 저술한 미국의 중국견제전략 [166] aurelius18691 21/06/28 18691 0
92288 [일반] 실종된 분당 김휘성군이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78] This-Plus32120 21/06/28 32120 2
92287 [일반] 현대인이 범하기 쉬운 대체역사물 실수 몇가지 [78] 아리쑤리랑30306 21/06/28 30306 106
92286 [일반] (스포)좀비 랜드 사가 리벤지 결말 역대급이군요. [10] 그때가언제라도15813 21/06/27 15813 0
92285 [정치] 윤석열은 왜 징계를 받았을까 [15] echo off16640 21/06/27 16640 0
92284 [정치] 벌써 코로나 델타변이 250건…한국도 "비상" [37] Rumpelschu16080 21/06/27 16080 0
92283 [일반] 쓰레기 산에서 건진 한 줌의 경험 [38] 나주꿀14628 21/06/27 14628 75
92282 [정치] 남영희 민주당 지역위원장, 박성민 靑비서관 논란에 “얼마나 무식한지” [83] 미뉴잇16442 21/06/27 16442 0
92281 [일반] 2023년부터 윈도우11 노트북에는 웹캡 탑재 필수 [30] SAS Tony Parker 15777 21/06/27 15777 0
92280 [일반] [14] 피지알에 진심인 사람 [14] 피잘모모12452 21/06/27 12452 10
92279 [일반] 미국 청년의 절반정도만 자본주의에 대해 긍정적 [127] 보리하늘17933 21/06/27 17933 6
92278 [정치] 고속도로 민영화 하자는 이준석 [250] 노리25356 21/06/27 25356 0
92277 [정치] 20대 남자는 진짜 우리 사회와 괴리되어 있을까 [129] VictoryFood16782 21/06/27 16782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