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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6/08 10:32:17
Name 김연아
Subject [축구] 내 생애 절대불변 최고의 스포츠 경기, 2002 월드컵 한국 vs 폴란드 (수정됨)
나는 황새를 좋아했다. 94년 볼리비아 전을 보면서 나 역시 그에게 무지막지하게 욕을 박았던 전력이 있고, 1998 월드컵 예선을 최용수가 휩쓸고 다닐 때, 황새가 굳이 에이스가 될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곧 대표팀에 복귀한 황선홍의 존재감과 지배력을 보면서 그에게 빠져들었고, 지난 날 그에게 욕을 박았던 게 미안해졌다. 물론 추후에 황새 팬들끼리 얘기를 나누면서도, 그 경기는 욕 먹을 만하긴 했다고 웃으며 넘기지만,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욕 많이 먹은 사람으로 첫손으로 꼽히는게 94 황선홍이니 역시 미안했다. 그리고 그는 부상으로 98월드컵에서 아웃 되며 명예 회복할 기회를 날려버렸다. 나는 그걸로 한국의 월드컵이 사실상 아웃 되었다고 생각했고, 언론에서 황선홍의 전력 이탈에 큰 우려를 표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리 여기지 않았고, 98월드컵은 큰 아픔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난 유상철을 좋아했다. 한창 축구를 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유상철이 개쩐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유상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홈런왕 유상철은 단순한 밈 수준이 아니었다. 94 황선홍만큼의 욕을 먹지는 않았지만, 유상철은 사람들이 원하던 성과를 내지 못하는 한국 축구 대표팀의 무력함을 상징하는 존재였고, 98월드컵의 실패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피지컬, 체력, 투혼은 있지만 투박한 발재간으로, 분전은 하지만 이기지는 못하는 한국 축구 그 자체로 여겨졌다. 그래서 98월드컵 벨기에전에서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고, 동점골을 넣었음에도, 그리고 복귀한 k리그에서 공격수로 포변하여 압도적인 득점력을 보여주며 득점왕에 등극했어도, 그는 여전히 홈런왕이었고, 한일 월드컵 직전에 홈런왕 유상철이라는 게임마저 등장했다.

찐팬들을 만났을 때는 괜찮았는데, 보통 사람들과 축구 얘기를 하게 되면 참 힘들었다. 황선홍, 유상철을 좋아한다고 하면 축알못 얘기를 들었다. 축알못 되는 건 상관없었는데, 황선홍과 유상철이 욕먹는 걸 듣는 것도 괴로웠고, 그걸 변호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게 힘들었다. 이건 단순히 1, 2년을 간 게 아니었다. 나중에 컨페드컵 등을 통해 황선홍와 유상철이 연일 대활약을 하고 있었는데도 그 선입견은 절대 바뀌질 않았다.

한국과 폴란드전 이후로 황선홍과 유상철의 욕은 커녕 자잘한 비판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리를 환희로 몰아넣었던, 한 달 간의 달콤한 여정은, 한국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었던 두 축구 선수의 발끝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너무 많은 것을 증명했다. 사실 이미 많은 것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외면 당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당시의 시간을 보냈을까.

지금이야 해외축구를 보기에 너무 좋은 환경이다. 나라도 살기 좋아져서 챔스나 엘클라시코를 보러 해외로 떠나기도 한다. 나도 2002 월드컵 때 직관도 했었고, 해외로 나가 챔스며 메시며 호날두도 봤다. 축구만 있는게 아니라 재밌는 다른 많은 스포츠도 있다. 역시나 쉽게 시청이 가능하고, 해외에서 직관하는 사람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역대급으로 비난받았던 선수 두 명이, 수 년 동안 무슨 한국 축구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선수 두 명이,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열변을 토하며 옹호했던 선수 두 명이, 기적의 대서사시를 활짝 열어젖히는 그 순간을, 가장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한국 국민이라는 포지션에서 보는 것은 다신 겪을 수 없는 일일 거다.

그래서 반지하 집에서 작은 브라운관 티비로 봤던 그 경기가 여전히 가장 기쁘고 재밌고 소름 돋았던 경기다.
그 경기로 무슨 희망을 얻거나 기적을 보거나 딱히 그러지 않았다.
그냥 그 둘이 잘 하는게 너무 좋고 재밌었고, 월드컵 첫 승을 했던 거 자체로 너무 기뻤고, 그거 발판으로 4강까지 가서 너무 기뻤다.

지금은 해축 보는 것도 줄어들고 있고, 대표팀 경기는 더더욱 보지 않고 있다. 친구들 만나거나 해도 대화를 잘 나누지 않는다. 그래도 요즘 대표팀들 축구 못한다면서, 유상철 같은 선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인터넷이나 대화에서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손흥민, 박지성, 차범근 같은 기라성 같은 공격수들이 배출되었는데도, 한국 역대 베스트 11에 황선홍을 심심치 않게 꼽는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이 그런 의견이 있을 수도 있지라며 수긍을 한다. 유상철? 유상철은 역대 베스트11 거의 고정이다.

그래서 나에겐 2002년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 한국 대 폴란드가 내 생애 최고의 스포츠 경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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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21/06/08 10:42
수정 아이콘
저는 이탈리아전이요~
21/06/08 16:37
수정 아이콘
저도 이탈리아전이요.. 이건 정말 가슴뛰는 거였죠.. 지는 줄 알았어요
나주꿀
21/06/08 10:49
수정 아이콘
포르투갈전 박지성의 가슴트래핑후 왼발 마무리슛은 못 잊을거 같습니다. 그게벌써 19년전이라니...
북극곰탱이
21/06/08 11:27
수정 아이콘
터프가이하면 다들 남일이형만 생각하는데 상철이형도 한터프 했죠. 저는 폴란드전보다 이탈리아전의 상철이형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박투박 -> 스토퍼 -> 센터백으로 120분 풀타임 소화하면서 계속 포지션 변경하면서도 아무 문제가 없던...

유상철 같은 선수가 있어야 손흥민, 박지성, 기성용, 안정환 같은 선수들이 맘껏 플레이 할 수 있습니다. 터프가이 멀티플레이어 상철이형 저도 참 좋아했는데 제가 죽을 때 까지 제 마음속 국대 베스트 11일겁니다.
raindraw
21/06/08 11:32
수정 아이콘
욕먹던 당시 기준으로 황선홍선수와 유상철선수는 다른 선수들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선수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월드컵 때 저도 욕했었지만 쥐꼬리 만큼이나 축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이후에 황선홍 선수 뛰는 걸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
그래서 더 좋아하는 선수가 되어버렸습니다만...
Rorschach
21/06/08 12:03
수정 아이콘
폴란드전을 보러 광화문으로 가던 버스안에서 같이 가던 선배에게 오늘 꼭 황선홍이 골 넣고 이겼으면 좋겠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최고 까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폴란드전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경기로 뽑습니다.
태정태세비욘세
21/06/08 12:05
수정 아이콘
고3때 올림픽공원에서 봤죠
보아랑 윤도현밴드 왔었는데...
축제 그자체 였음..
상철이형 고마워요.
김태연아
21/06/08 12:05
수정 아이콘
이 경기를 전술훈련한다고 못 본게 한입니다.
시나브로
21/06/08 12:17
수정 아이콘
필자가 스포츠 애호가이신 거 알기도 하고 제목 보고 '어떻게 그 정도일까' 했는데 본문 보니 이해가 잘됩니다.
Normal one
21/06/08 15:02
수정 아이콘
이 경기를 직관한건 손에 꼽히는 행운이였습니다. (그것도 핸드폰 사고 응모했는데 당첨 크크크) 경기 끝나고 부산역으로 택시타고 오는데 길거리에 양쪽 도보에 난리난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달리는 기분도 쥑였구여
내맘대로만듦
21/06/08 15:41
수정 아이콘
홈런왕 유상철.....게임을 못만들거나 재미없기라도 하든가..
하다보면 묘하게 유상철이 호감되면서도 그래도 홈런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하는 기묘한게임
스웨트
21/06/08 19:53
수정 아이콘
저도 홈런왕 유상철이 먼저 생각나더라구요ㅠ
ㅠㅠㅠ
21/06/08 17:51
수정 아이콘
고삼의 슬픔 ㅠㅠ
21/06/08 20:14
수정 아이콘
나우누리 매지동자님 생각나네요

맞나? 매지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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