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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4/11 17:34:19
Name 마로니에
Subject 사랑했던 너에게


이사를 하고 한동안 바빠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은 이제서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물건들 속 어디선가 너가 내게 언젠가 써준 오래된 편지가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기억나?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도 지금처럼 봄의 문턱이었어.
둘 다 각자의 지난 사랑으로 아파하던 시기였기에 서로에게 더 공감해줄 수 있었고
신기하게 성격도 잘 통했던 우리는 처음 만났던 날부터 긴 시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지.
매섭게 추웠던 날들도, 그만큼 힘들었던 아픔의 기억들도 너를 만나 희미해져갔고
봄이 오고 꽃이 피던 이 시기 우리는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어.

우리가 사귀기로 하고 너를 처음 만나러 갔던 날이 나는 아직도 기억이 나.
구름 없이 화창했던 어느 날,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너를 보며 심장이 두근거렸었는데.

돈이 없던 수험생 시절이라 마음만큼 많이 못해주었던 건 아직도 미안해.
그럼에도 꽃 한송이와 편지만으로도 감동받아 울먹거리던 너를 꼭 껴안고 행복해했던 나였어.
서울을 잘 몰랐던 너에게 이곳저곳을 데리고다니며 재잘거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즐거웠던 시간이었는지..

너가 먼저 시험에 붙고 내려가면서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고
만나는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우리는 이쁘게 잘 만났던거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해야했던 내 상황과 물리적인 거리, 흘러갔던 시간만큼
조금씩 너는 외로움을 느껴갔을테고 나는 섬세하게 너를 바라봐주지 못했어.
그리고 결혼할 때가 되어 내게 확답을 원했던 너와,
모든게 불확실하고 어렸던, 마침 힘들었던 집안 상황으로 인해 확답을 주지 못했던 나.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라는 벽 앞에서 우리 둘 다 헤메고 있었던거 같아.

눈물 많고 여린 너가 나에게 먼저 이별을 이야기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 지 모두를 헤아릴 수 없지만 조금은 이해가 가.


한번이라도 잡아볼까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었다.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항상 함께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마음은 계속해서 잡으라고 하는데 아직 아무것도 아닌 내가 정말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너는 더 늦어지면 안되는데 정해진 것 하나 없는 나 하나 믿고 따라오라고 하는 게 정말 맞는걸까.
지금이라도 너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에게 낫지 않을까.
라는 이어지는 질문들에게 쉽사리 정말 쉽사리, 답할 수가 없었어.
사랑하니까 떠나보낼 수 밖에 없다는 모순된 말이 어렴풋이 이해가 갔고
너와 헤어진 그 날 이후 한동안 난 물 속에 잠겨있었어.
손을 뻗어 나가고 싶었지만 다시금 가라앉았던 나날들.

시험에 붙고 조금이라도 당당해졌을 때 연락을 해보자고 마음을 먹고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었지만... 너의 프사 속 환한 너의 옆엔 이미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 걸려왔던 너의 전화. 전화를 받자마자 눈물부터 흘리는 너를 보며
너도 참 많이 힘든 날들을 보냈겠구나 싶더라. 참 미안했다며 이야기하는 너에게
애써 웃으며 나도 참 미안했고 고마웠다고 말하며
우리는 참 타이밍이 맞지 않았구나 생각했어.
많은 갈림길 속에서 하나는 지금도 너와 매일같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갈래가 있지 않았을까.

언젠가 함께 봤던 라라랜드의 엔딩에서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스톤은 서로를 한동안 쳐다봐.
불안한 나날들을 함께 버텨낸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로는 어쩌면 부족한,
그냥 서로가 행복했으면 하는 순수한 진심.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응원.
영화를 처음 볼 때는 단지 노래가 좋다라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이 더 기억에 남는다.
만나는 분에 대해 물으니 좋은 사람이고 결혼이야기도 조금씩 나온다고 했어.
그러면서도 계속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너에게 혹시나 나의 존재가 너가 다시 찾은 행복에 걸림돌이 될까 걱정되어,
나도 여자친구가 생겼다며 얼버무리고 진심으로 너가 행복하길 바랬고 항상 원해왔던 결혼을 하길 바랬어.

몇 달 후 걸려온 두번째 전화는 받지 않았어.
배려심 많았던 너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먼저 전해주려던 게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해.
봄이오면 생각이 나던 너도 언젠가는 희미해지지않을까. 그래도 나는 너가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는 내 청춘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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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와이
21/04/11 17:40
수정 아이콘
흑흑.. 전 좋아하는 사람한테 못생긴 찐따 취급 받았더랬죠.. 못생긴 것도 맞고 집단 따돌림 당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요. 좋아하는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보일 때마다 시선이 자동으로 따라갔는데 그만 시선 강간으로 보였나 봅니다.
가갸거겨
21/04/11 19:13
수정 아이콘
그 순간에는 나만의 이야기 같았는데, 이렇게 타인의 글을 접할 때마다 먹고 자는 것처럼 인생의 보편적인 경험이구나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장고끝에악수
21/04/12 09:3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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