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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4/09 02:32:35
Name 우리고장해남
File #1 20190523_132354.jpg (1.69 MB), Download : 55
Subject [13] 나의 산티아고 (스페인 순례길, 프랑스 길) (수정됨)


-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
- 여행기간 2019.05.17 ~ 06.14 (총 29일)
- 총 거리 893.8km


조그마한 노트북 바탕화면의 사진이 날 그 시간으로 안내해주었다.

순례길을 알게 된건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우연히 읽었던 버킷리스트 책이었다. 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15년이 지나서 걸을 줄 누가 알았으랴.

걸으면서 너무 힘들어서 쉬고 싶었던 순간들, 힘들게 올라가서 해발 1000미터에서 내려다 본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들, 

우여곡절이 많았던 6월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도착한 컴포스텔라 대성당, 드넓은 광장에 혼자 앉아서 서로 축하해주는 무리들을 지켜보았다.
나는 광장에 보이는 수많은 순례자들처럼 즐겁거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처럼 슬프지 않았다.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이었다.

"내가 무엇을 깨닫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해도 너무 허무했다.

이런 느낌을 받은 가운데에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설령 지금은 모를지라도, 이 길은 두고두고 생각나니깐 눈으로 더 담아두라며"

그 당시 나는 빨리 대성당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아무 감정이 없었으니 더 걸으면 알게되겠지?"라는 생각과 "그래도 해남출신인데 순례길 땅끝은 가봐야지?"라는 생각이 더해져 기존 계획인 775km를 완료 후 118.8km를 더 걷게되었다. 

예전 로마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다던 피스테라, 성모 마리아 발현지라던 묵시아까지 도착하여 0,000km를 비석을 보았다.

드디어 끝이라는 생각과 여러 만감이 교차했다. 아무 목적없이 걸었던 그 길 끝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내 삶과 마음이 변한 것도 없었다.

29일간 낯선나라의 길을 걸으면서 마음의 고민없이 잘 먹고 잘자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순례길이 알려주었다.

비싼 옷이 무엇이 필요하랴. 정작 이 길에는 낡은 스틱과 내가 짊어질 무게 만큼의 배낭과 건강한 다리만 있다면 충분하다는 것을.

나의 산티아고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까페에서 손님에게 주는 쿠폰에서 이제 도장 1개를 찍어준 것처럼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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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08:16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봤습니다.
아무리 재밌는 영화도 기대를
많이하면 그냥 그런거랑
비슷한거같네요
우리고장해남
21/04/09 09:57
수정 아이콘
(수정됨)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기대를 최대한 줄이고 간 여행이었어요. 순례길이 아무리 예쁘다해도 유럽여행의 한 장소보단 아름답지는 않으니까요.
컴포스텔라 대성당 꼭대기가 도시 저 멀리서 보이는 순간부터마음이 담담해지더라구요.
막상 대성당 광장에 도착하니 이미 유명한 관광지처럼 길가 주변에는 수많은 기념품 가게에 당황스럽고, 순례자 완주 증서를 받기 위해서 은행창구처럼 길게 늘어선 줄도 당황스럽고,
그래서 결국 증서는 끝내 안받고 기념품도 안사고 그냥 광장에 누워서 멍때리며 순례자들을 지켜봤네요.
내가 그려왔던 순례길의 마지막과 막상 마주친 모습이 너무 달랐던 것이겠죠.
순례길 끝 묵시아 0.000km 비석에 도착해서 묵시아 동네 언덕에 올라가서 크게 소리쳤어요. 대성당에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분출됐습니다.
30대 접어들어 가장 기쁜 순간이었고 한편으론 낯선 동네에 덩그러니 혼자있는 내 모습이 느껴지면서 사무치게 외로웠습니다. 이젠 다 끝났다고 속이 다 후련하다고.
스페인산티아고
21/04/09 16:56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하여 순례객들이 거의 전무한 수준이라 대성당 앞도 아무도 없고 완전 썰렁합니다. 예전처럼 시끌시끌할때가 그립네요.
빨리 코로나가 끝나서 다시 순례객들도 오고 모든게 정상화 되었으면 좋겠습니다ㅠ
우리고장해남
21/04/09 23:17
수정 아이콘
스페인에 거주하시나요? 까친연 까페 가끔 들어가보는데 이 시기에도 순례길 걸으시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대부분 알베르게가 문을 닫았다던데 빨리 코로나가 끝나서 순례길 다시 걸어보고 싶네요.
20060828
21/04/09 09:43
수정 아이콘
여행에선 늘 집의 소중함을 느끼더라구요. 저는 여행 첫날부터 집에 가고싶어하는데, 또 여행 준비하고 가는건 좋아합니다.
우리고장해남
21/04/09 10:01
수정 아이콘
전 여행을 다니면서 그나라 음식을 최대한 접하는게 목표이고 보통 여행을 1달이상 하면 2주 이후부터는 한식이 땡기더라구요.
순례길은 이전 여행과 다르게 하루 종일 걷는 일정이라서 걷는 다음날부터 한식이 땡겨서 당황스럽더군요.
'집에 가고 싶다.. 라면스프라도 챙겨올 걸... '라는 생각이 들면서요.
정말 순례길은 시골 깡촌이라서 해외에서 그나마 자주 접하는 신라면도 순례길 한달 내내 큰 도시 3군데를 제외하면 그 흔한 패스트푸드점 조차 마주치기 힘들었어요.
한국 사람들이 라면스프,고추장을 챙겨오는 이유가 있었더군요. 역시 짬밥은 무시할 수 없어요.
21/04/09 10:32
수정 아이콘
전 몇년전 해안길로 다녀왔습니다. 한국사람 한명도 못봤네요
피스테라 못간게 아쉬워지는 글이네요. 또르띠야만 몇일 먹던 기억이 새록새록..
우리고장해남
21/04/09 10:55
수정 아이콘
(수정됨) 해안길 얘기도 들었는데 거긴 정말 순례자들이 없다고 들었어요. 정말 고생하셨네요.
프랑스 길이 알베르게도 많고 시설이 좋다고 여러번 순례길을 다녀왔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던 얘기가 생각나네요.
피스테라에서 묵시아 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포르투에 왔는데 포르투 도시 곳곳 바닥에 노란색 조개표식이 보여서 반갑더군요. 새럴님도 포르투를 거쳐 가셨겠네요. 정말 예쁜 동네죠.
그리고 피스테라 정말 좋아요. 다음에 순례길에 오르신다면 꼭 한번 가보세요. 마을에 해수욕장도 있어서 포르투 일정만 아니였으면 이 마을에서 일주일 정도 지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마을에서 0.00km 비석이 있는 등대까지 걸어가는 그 길도 예쁘고, 비석 주변 바위에 모두들 앉아서 대서양 일몰을 바라보는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21/04/09 12:13
수정 아이콘
아 해안길은 포르투로 가는 길이네요. 이룬에서 시작하는 북쪽길 걸었는데 북쪽길도 해안따라 걸어서 해안길이라 생각했네요. ^^;
우리고장해남
21/04/09 17:54
수정 아이콘
프랑스 북쪽길을 걸으셨군요. 거기 얘기 들어보니깐 지형은 힘든데 경치가 그렇게 좋다고, 휴양지 많이 지나쳐 간다던데 그대신 한국사람들 보기 힘들다고 하던데, 사실인가보네요.
나중에 순례길에 다시 가게되면 북쪽길 걸어보려고 해요.
21/04/09 19:03
수정 아이콘
이쁜경치는 이뻤고 도로 하루종일 걸을땐 힘들고 뭐 그랬죠 크 해안가라 비도 자주왔고ᆢ그렇게 고생하다 산티아고 근처에서 관광객들하고 섞이면서 혼란스럽다가 도착하고 멍했던 기억나네요 크크
프랑스길 걷고와서 다시 북쪽길 걷는 사람 다섯명 정도 본것같네요. 사그라다 파밀리아랑 콤포스텔라 성당 완공 되면 다시 가보고픈ᆢ
이런저런 기억 떠올리는동안 웃음이 나네요. 글 잘읽었습니다. 부엔 까미노
우리고장해남
21/04/09 23:20
수정 아이콘
(수정됨) 프랑스길도 예쁜 길은 예뻤고 대도시 지날때 추레한 모습으로 걸으니 이건 뭐.. 명동에 슬리퍼에 추리닝 입고 걷는 느낌이랄까요. 평범한 시골길은 어렸을 때 해남 시골길을 걷는 느낌같기도 했고 엄청나게 넓은 밀밭을 보면서 다음에는 9월 가을에 꼭 추수하는 기간에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그라다는 저도 완공하고 나서 꼭 가보고 싶네요. 컴포스텔라 성당은 그당시 공사중이라서 미사는 따로 보진 못했어요. 다음에 또 보면 되겠지라는 생각이였는데 이렇게 코로나가 터져버렸으니 또 언제 그 길을 걸어볼지 참 아쉽네요. 여튼 말그대로 부엔 까미노 입니다.
21/04/09 13:0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우리고장해남
21/04/09 23:2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릴리아
21/04/10 01:28
수정 아이콘
예전에 스페인에 순례길을 가려고 떠났다가 배낭여행으로 일정 바꿔서 산티아고에 도달한적이 있었는데 ..저는 뭐라도 느껴보고 싶다.. 나중에 꼭 걸어보자 하고 마음먹게 되었네요.
부럽네요. 잘 읽었습니다
우리고장해남
21/04/10 01:30
수정 아이콘
언젠가 걷게 될 날이 올거에요. 이건 마치 돈주고 행군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좋았던 순간들이 있어서 또 가고싶나 봐요.
릴리아
21/04/10 01:40
수정 아이콘
그렇죠 출발 이틀전까진 걸을 생각으로 이것저것 준비했던기억이 아직도 설레네요. 폰에 노래 한곡 한곡 저장하면서 위에 사진같은 풍경을 그렸었는데요. 오랜만에 조금 다시 갈수있을까 하고 설레네요. 감사합니다
우리고장해남
21/04/10 02:10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전 실습이 끝나고 마침 시간이 비어서 순례길에 가려고 준비를 다해놨는데 전여친의 연락으로 산티아고를 포기하고 전여친과 다시 만났다가.. 역시 다시 헤어지고..
다음해에 휴가 시즌에 고민없이 바로 떠나게 됐어요. 새로 간거라곤 등산바지,등산모자,양말 정도였네요. 마치 캠핑가는 느낌처럼 재미있긴 했습니다.
뭐 하나라도 안가져가면 구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순례길 5일차에 아디다스 티셔츠 누가 훔쳐가서 티셔츠 3개로 1달을 버틴게 아직도 생각나네요.
코로나만 풀리면 다시 가고 싶네요.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는 아직도 기억납니다. 수학여행 온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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