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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1/11 01:28:57
Name Ms.Hudson
Subject 흑인역사문화박물관 in Washington, DC
워싱턴 DC에는 수많은 국립 박물관이 있습니다. 자연사박물관이나 항공우주박물관, 내셔널갤러리 등은 종일 봐야 겨우 볼 정도의 규모라서, 디씨를 잠깐 방문하는 분들은 이런 인기 있는 곳 몇 군데 들르기 바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재작년 여름에 디씨에 2주간 있게 되어서 매일 한군데씩 파고드는 사치를 할 수 있었는데요. 그중 제일 감명 깊었던 곳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바로 흑인역사문화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NMAAHC)입니다. 2016년 오픈한 따끈따끈한 신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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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일반적인 박물관같이 방이 나누어져 있는 갤러리식이 아니라, 하나의 큰 흐름을 따라 이동하며 역사 순서대로 관람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입장하면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으로 내려가서, 노예가 미국 땅에 도착하는 15세기부터 시작합니다. 전시된 유물 자체는 자세히 들여다 볼만하다기보다,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역할이 강합니다. 하지만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예를 들면, 자유를 외치며 독립전쟁을 일으켰지만, 노예는 자유를 얻을 수 없었던 일--를 지적하는 데에는 인색하지 않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노예는 해방되었지만, 인종차별은 계속됩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면 Jim Crow era 인종차별법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지고, 60년대 민권운동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인종분리 열차 같은 것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Emmett Till Memorial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전시도 있습니다. 마지막 층으로 올라가면 1968년 이후 인정받기 시작한 흑인 사회와 문화에 대한 찬사로 이어집니다. 어두운 지하의 노예제에서 시작했지만,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 나가면서 역사의 변환점을 만들어 냈고, 권리를 보장받은 뒤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각계에 진출하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박물관 개관 시점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 마무리됩니다.

아래는 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1. 바로 옆에 위치한 미국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과는 전시의 논조가 매우 대조됩니다. 역사박물관은 각종 기술적 발전, 민주정,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전쟁같이 위대한 미국의 업적을 보여주는 것 위주인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빨간 모자를 쓴 분들이 매우 많이 보이는 곳이고, 그분들은 흑인역사박물관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2. 카페테리아에서 콘브레드, 풀드포크, 프라이드 치킨같은 남부 흑인 음식을 파는데, 정말 맛있습니다.
2-1. 식사 중에 옆자리에서 하는 대화를 살짝 듣게 되었는데요. 직장 동료인 것 같은 백인 남성과 흑인 남성이었습니다.
"흑인이 억눌려 살아온 시간이 길었는데, 많은 사회적인 잘못들을 고친 뒤 지금은, 그리고 이곳은 승리의 축제 같다."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승리라고 말하는 건 좀 과장인 것 같다."

3. 박물관을 나와 버스를 탔는데 뒷자리 흑인 커플이 하는 대화를 살짝 들었습니다.
"보이는게 힙합이나 NBA밖에 없지. 그들이 잘산다고 다 괜찮다는 양. 보통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이 없잖아."

4. 저는 보는 내내 먹먹했습니다. '이제 노예에서 해방되었지 않냐' 하기에는 각 주에서 입법을 통해 합법적으로 인종차별을 한 것이 정당화될 수 없고, '68년 이후 모든 권리가 회복된 것이 아니냐' 하기에는 공공/사회시스템 안에 뿌리박힌 편견이나 저소득/저학력층으로 뭉뚱그려져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재산이나 인적자본 축적의 기회를 강탈당한 사람들에게 '이제부터는 능력껏 열심히 하세요' 하는 건 무책임하게도 느껴집니다. 흑인 운동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이겠죠.

5. '아시아인 박물관'이 생기는 건 언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수 중의 소수인 데다 정계 진출도 적어서 주목을 잘 못 받기도 하는데, 샌프란시스코 앤젤 섬이나 2차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 감금 등 놀라운 인권 유린 사건이 많죠.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대도시와 철도 건설에 일조한 중국계 노동자도 조명되어야 하구요. 하와이 농장에서 일한 한국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시아계 사회 지도층이 많아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면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행길이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겠지만, 워싱턴 디씨를 방문하실 분께 이 박물관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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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치카
21/01/11 01:4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호치민 방문했을 때 갔던 베트남 전쟁박물관이 떠올랐네요.....언젠가 저곳도 꼭 가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주꿀
21/01/11 01:45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제가 워싱턴 DC를 방문했을때 한창 공사중이어서 가질 못했습니다. 지인 중에 방송국 특파원 분이 계셔서 워싱턴 안내를 해주셨는데
'저기 보이는 저 건물이 흑인 박물관인데, 오바마 대통령이 저걸 빨리 지으라고 그렇게 재촉을 했다더라' 말씀을 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다른 이야기도 많이 해 주셨는데, 민감한 사항에 정치글로 갈까봐 언급을 못하겠네요, 짧지만 뻘하게 웃긴 이야기였는데)
(워싱턴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은 스미스 소니언 항공 박물관입니다, 문과출신이지만 달착륙 관련 기록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21/01/11 07:18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대로 워싱턴 DC에서는 주요 관광지가 워낙 많아서 방문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애틀란타에서 국립 민권 인권 박물관 (National Center for Civil and Human Rights) 방문했는데
나름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던 저도 모르는게 정말 많더군요.
관람객 중 비흑인 비율이 제법 높다는 점은 제법 고무적이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한 상태에서 박물관을 나오며 딱 'DC 갔을 때 짧게라도 흑인역사문화박물관 들를걸'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PC가 거의 절대악 취급 받곤 하는데
애초에 PC라는 개념이 왜 생겼는지 그 배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이
마틴 루터 킹 이름 정도만 들어본 사람들이 용감하게 '흑인이 벼슬이냐'라는 식의
논지를 펼치는걸 보면 많이 씁쓸합니다.
비포선셋
21/01/11 12:40
수정 아이콘
흑인의 서구 사회에서 정치사회적 배경이 곧 한국에서 PC가 정당화되어야 할 이유는 아니죠.
그렇게 바라보는 것 역시 하나의 억압이자 폭력입니다.
21/01/11 14:35
수정 아이콘
한국에서 흑인 관련 PC 논쟁은 99% 서구 사회에 대한 얘기 아닌가요?
그리고 그걸 떠나서 애초에 어떤 문제에 대해서 논할 때 그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억압이자 폭력]]이라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감이 안 옵니다.
설탕가루인형
21/01/11 12:45
수정 아이콘
DC의 흑역사 박물관으로 오독하고 헐레벌떡 들어왔는데.....(시무룩)
본문 내용은 참 인상적입니다. 앞으로 인종과 관련된 인권 인식은 점점 향상되겠지만 아직 갈 길이 멀기도 하네요.
쩌글링
21/01/11 15:57
수정 아이콘
아이 데리고는 DC 관광도 재미있겠네요.
계피말고시나몬
21/01/12 23:43
수정 아이콘
(수정됨) 개인적으로 흑인들이 자본 축적의 기회를 빼앗겼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백인들도 대공황 이후 죄다 박살났고, 흑인이 더 심각했다고 하기엔 북미로 건너간 동양인들의 경우가 흑인들이 온전한 피해자라는 점을 긍정하기 힘들게 하거든요.

동양인들이 흑인에 비해 교육을 더 중시하고 조직이 잘 갖춰졌다는 것도 의문인 것이, 인종차별과 관련된 시스템을 보면 평등이 아니라 흑인 우선으로 보이는 케이스가 대단히 많습니다. 사실 이 시스템의 중심이 되는 단체들이 대부분 흑인 인권 단체니만큼 흑인 위주로 돌아가고, 그런 현실이 '백인은 인종차별 고소를 하면 안 되지!' 같은 농담거리를 만들기도 했고요.

그렇게 고도의 정치적 수혜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물론 PC 적인 백인들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흑인들이 유독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건 내부 요인이 아니라면 이상한 일이죠.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파워를 갖추는 게 정치적인 파워를 갖추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니까요(EX - 중근세 시절의 유태인)

저는 흑인들의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homie 문화 같은 것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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