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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1/03 19:03:20
Name 아난
Subject 아도르노 - 죽음과 육체의 부활
기독교 신자가 명백히 아닌 철학자의 깊은 생각도 그 생각이 노골적인 전투적 무신론을 담고 있지 않다면 가끔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미칩니다. 아래 같은 아도르노의 생각이 가끔 아도르노를 제목에 '신학'이 들어가는 논문이나 저작의 주인공이 되게 합니다. 첫 번째 글의 '죽음이 철학이 헛되이 확정적으로 규정했던, 그런 절대적인 것이라면'에서 '철학'은 일차적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을 가리키는데, 하이데거는 기독교의 구원과 내세 교리 덕분에 기독교 신자들이 죽음 앞에서 진정하게 불안을 경험할 수 없다는 유명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전투적 무신론의 고상한 판본인 듯한 주장을 한 하이데거조차도 죽기 얼마 전에 한 인터뷰에서는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아리송한 말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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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odor Wiesengrund Adorno, Negative Dialektik (1966), S. 364.
테오도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1966), 국역본, 479 쪽, 번역 수정함.

그렇기는 하나 죽음이 순전히 최종적이라는 생각은 끝까지 생각해갈 수 없다. 죽음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도들은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쓸모가 없다. 도대체 누가 여기서 지금 죽어있다는 술어의 주어이겠는가? 니체가 명쾌하게 영원을 원한다고 말한 쾌락만이 일시성에 반발하지는 않는다. 죽음이 철학이 헛되이 확정적으로 규정했던, 그런 절대적인 것이라면, 모든 것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생각은 허공을 향한 생각이며, 아무것도 어떻게든 진실되게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체의 시간적 핵심과 더불어 지속한다는 것은 진리의 한 계기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지속도 없다면, 진리도 없을 것이다. 절대적 죽음은 진리의 마지막 흔적까지 삼킬 것이다. 절대적 죽음의 관념은 불멸의 관념 못지 않게 생각을 비웃는다.

Gleichwohl ist der Gedanke, der Tod sei das schlechthin Letzte, unausdenkbar. Versuche der Sprache, den Tod auszudrücken, sind vergebens bis in die Logik hinein; wer wäre das Subjekt, von dem da prädiziert wird, es sei jetzt, hier, tot. Nicht nur die Lust, die, nach Nietzsches erleuchtetem Wort, Ewigkeit will, sträubt sich gegen Vergängnis. Wäre der Tod jenes Absolute, das die Philosophie positiv vergebens beschwor, so ist alles überhaupt nichts, auch jeder Gedanke ins Leere gedacht, keiner läßt mit Wahrheit irgend sich denken. Denn es ist ein Moment von Wahrheit, daß sie samt ihrem Zeitkern dauere; ohne alle Dauer wäre keine, noch deren letzte Spur verschlänge der absolute Tod. Seine Idee spottet des Denkens kaum weniger als die von Unsterblichkeit.


2
Theodor Wiesengrund Adorno, Minima Moralia. Reflexionen aus dem beschädigten Leben (1951), S. 275-276.
테오도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 (1951), 국역본, 275-276 쪽, 번역 수정함.

위대한 종교들은, 유대교처럼, 죽은 자들의 구원을 형상금지에 따라 침묵으로 배려하거나/침묵하면서 염두에 두거나 육체의 부활을 가르쳤다. 그것들은 그것들의 무게중심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될 수 없음에 두었다. 육체적인 지각에 어떤 식이든 근거를 갖고 있지 않으며 육체적 충족을 요구하지 않는 ‘의도’나 ‘정신적인 것’은 없다. 이것은 부활 관념을 자신들에 못 미치는 것으로 여기고 실제로 구원을 원하지 않는 심령술사들에게는 너무나 거친 것이다. 그들의 형이상학 - 헉슬리조차 이것과 형이상학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 은 다음의 원리 위에 서 있다. “영혼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육체는 소파에 박혀 있다.” 영성이 활기를 띨수록 더욱더 기계적이 된다. 데카르트조차 그렇게 분명한 선을 긋지는 못했다. 분업과 물화가 극단까지 추동된다. 육체와 영혼이 항구화된 생체 해부 속에서 서로 떨어져 나간다. 영혼은 더 밝은 곳으로 가 방해받았던 바로 그 지점에서 그것의 열렬한 활동을 즉시 속행하기 위해 먼지를 털어낸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독립선언 속에서 영혼은 그로부터 자신을 허위적으로 해방시켰던 것의 싸구려 모방이 된다. 가장 경직된 철학조차 주장하는 상호작용 대신 별 같은 육체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실체화된 정신이 그것의 대립물을 치욕스럽게 용인하는 것이다. 순수정신의 개념은 실로 육체에 비유해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육체의 비유는 순수정신의 개념을 폐기한다. 정신들의 물화에서 정신들은 이미 부정된다.  

Die großen Religionen haben entweder, wie die jüdische, die Rettung der Toten nach dem Bilderverbot mit Schweigen bedacht, oder die Auferstehung des Fleisches gelehrt. Sie haben ihren Ernst an der Untrennbarkeit des Geistigen und Leiblichen. Keine Intention, nichts »Geistiges«, das nicht in leibhafter Wahrnehmung irgend gründete und wiederum nach leibhafter Erfüllung verlangte. Den Okkulten, die sich für den Gedanken der Auferstehung zu gut sind und die eigentlich Rettung gar nicht wollen, ist das zu grob. Ihre Metaphysik, die selbst Huxley von Metaphysik nicht mehr unterscheiden kann, ruht auf dem Axiom: »Die Seele schwinget sich wohl in die Höh' juchhe, / der Leib, der bleibet auf dem Kanapee.« Je munterer die Spiritualität, desto mechanistischer: nicht einmal Descartes hat so sauber geschieden. Arbeitsteilung und Verdinglichung werden auf die Spitze getrieben: Leib und Seele in gleichsam perennierender Vivisektion auseinandergeschnitten. Reinlich soll die Seele aus dem Staub sich machen, um in lichteren Regionen ihre eifrige Tätigkeit stracks an der gleichen Stelle fortzusetzen, an der sie unterbrochen ward. In solcher Unabhängigkeitserklärung aber wird die Seele zur billigen Imitation dessen, wovon sie falsch sich emanzipierte. Anstelle der Wechselwirkung, wie sie noch die starreste Philosophie behauptete, richtet der Astralleib sich ein, die schmähliche Konzession des hypostasierten Geistes an seinen Widerpart. Nur im Gleichnis des Leibes ist der Begriff des reinen Geistes überhaupt zu fassen, und es hebt ihn zugleich auf. Mit der Verdinglichung der Geister sind diese schon negi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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