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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0/02 22:28:36
Name
Subject 희안과 제제 (수정됨)
 희안은 도통 보기 어려웠던 희한한 얼굴로 제제를 바라보다가 제재할만한 사안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그건 제법 의미 있는 모양새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평생 무표정만을 고수하던 희안에게 이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희안에게든, 제제에게든 저녁 어스름의 시간은 지난해보였다.

 "정의요?"

 희안은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정의요. 절대적 정의."

 희안은 제제가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저는 지쳤거든요. 그래서 당신이 떠드는 그 앞뒤 안맞는 말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들어줄 수가 없어요. 아해가 떠드는 소리라지만, 시끄러운 건 시끄러운 거니까요."

 희안은 이쯤했으면 했다. 결코 의미 없는 모양새는 아니지만, 누군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찾기 어려운 일쯤으로 여겨졌다. 그보다는 당장 오늘 저녁메뉴가 더 급했다. 요새 도통 입맛이 없었기에 끼니를 자주 거르다보니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부침을 느끼던 참이었다.

 "거짓부렁이시네요. 맡은 바 일처리도 제대로 못하시면서 무슨 시끄러움을 논한 답니까. 앞뒤가 안맞는 건 또 뭔데요. 그러니까 말을 해보시라고요. 나는 정의를 원해요. 그렇게 마지못해 동의하는 것 말고! 그렇게 무능하려거든 차라리 그냥 입닫고 여기에 사과 서명이라도 하던가!"

 제제의 열변에 침이 튄다. 문득 바이러스가 걱정이 됐다. 아무 의미 없게도.
 희안은 슬쩍 고개를 빼며 제제로부터 물러섰다. 절대 적대적으로 느끼지 않게끔 조심스레. 혹시나 교조적일 까봐서.

 "마스크를 써요. 현관 옆에 붙여뒀는데, 혹시 보지 못하셨나요."
 "마스크는 무슨.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당장 제재에 동의하신다면서요. 그럼 이제 성명도 발표하고, 얼개도 잘 짜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뭔가 정리가 돼야 할 것 아닙니까. 왜 아무 행동이 없죠? 알면서도 안하시는 건가요. 몰라도 문제고, 알면서 안하시는 건 더더욱 문제 아닌가요?"

 제제가 한발자국 더 다가섰다.
 희안은 다시 물러섰다.

 "말씀하시는 건 제 관할이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죠. 제재에 대한 동조의 의견정도, 딱 거기까지가 그나마의 제 소관이었어요. 그래도 제가 이 상황이 답답할 당신보다 아는 건 많을 거에요. 답답할 만큼요. 그렇다고 사과 서명도 못해요. 사과에는 책임이 따르니까요. 뭘 어떻게 개선한다고 약속도 못할 겁니다.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제제가 한발자국 더 다가섰다.
 희안은 그만큼 물러섰다.

 "아니, 씨발.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나와! 이거 처리한 놈. 나와서 설명해. 내가 어이가 없어가지고, 기가 차네, 진짜. 빨리 나와서 설명해!"

 불현듯 욕설과 함께 저녁 어스름의 시간은 지났다. 제제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 아직까지 저런 히틀러 같은 사람도 있네. 난 경우가 있는 사람이니까 다행으로 아시죠."

 '데우스- 엑스- 마키나!'

 속으로 쾌재를 외치며 희안은 어쨌든 좋았다. 저 치 덕분에 오히려 이 시간이 어떻게 무마될 여지가 보인다. 잠시 감사의 시선을 담아 욕설이 들려오는 건넛방의 문을 닫는다. 저 쪽을 담당하는 친구에 일말의 미안함을 남기고서.

 시간이 흘렀다.
 밖으로 나서는 희안의 눈에 건물을 나서며 마스크를 차는 제제의 모습이 보인다.
 동시에 무표정해진다. 그냥 그래보인다.

 "희안이라네요. 아픈 부위를 눌러주면 좀 덜해지는 것. 멀어지는 것. 그래도 정작 본질적인 치료는 되지 않겠죠."
 "희한하게도. 조금 덜 아플 뿐인 거죠."
 "이상하게도."

 "마냥 옳을 수 있어서 좋겠어요. 부럽네요. 나도 그랬는데, 그럴 수 있었는데."

 희안은 중얼거리다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화가 난다.

 "씨발."

 불현듯 누군가 다가왔다.

 "선생님. 욕설사용으로 벌점 4점입니다."

 경찰이랜다. 아니, 어디 순경 나부랭이가!

 "x발."

 그래봤자 기다린다.
 버스정류장에 서서 집으로 돌아갈,
 하염없이 정처없이 붕괴되어,
 버스.
 아무 의미 없게도.

 저녁은 초밥이 좋겠다.

 여름이었다.
 아니, 가을.

 아둔을 위하여.
 테사다를 위하여.
 그리고,
 프로비우스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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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 23:27
수정 아이콘
건게(겠죠?)에서 희안(...)이랑 제제(...)를 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재밌는 글을 읽게 되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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