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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9/17 14:01:13
Name TheLasid
Subject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올리버 색스

"나는 지난 10년가량 또래들의 죽음을 점점 더 많이 의식해왔다. 내 세대가 퇴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죽음 하나하나가 내게는 갑작스러운 분리처럼, 내 일부가 뜯겨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다 사라지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는 없을 것이다. 하기야 어떤 사람이라도 그와 같은 사람은 둘이 없는 법이다. 죽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 대체될 수 없다. 그들이 남긴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마다 독특한 개인으로 존재하고, 자기만의 길을 찾고,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자기만의 죽음을 죽는 것이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유전적, 신경학적-- 운명이기 때문이다.
  두렵지 않은 척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쯤은 돌려주었다. 나는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다. 세상과의 교제를 즐겼다."

<고맙습니다>는 뛰어난 의사이자 작가였던 올리버 색스가 죽음을 앞두고 집필한 짧은 책입니다. 색스는 마지막까지 영민한 지성과 강건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썼던 당시 색스처럼 제 어머니도 더는 치료가 어려운 말기 암 환자십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죽음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마지막 나날이 색스의 마지막 나날과 같기를 바랐습니다. 의연하고 평온하고 온전하기를 바랐습니다. 신장 기능이 정지되면서 어머니가 전신 쇠약 상태에 빠지셨을 때, 뇌경색에 걸리시면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시고 말씀을 잘하지 못하게 되셨을 때, 저는 슬펐습니다. 어머니 앞에는 제가 바랐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마지막이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퇴원하실 때, 그리고 곧바로 요양 병원에 입원하실 때, 저는 더더욱 슬펐습니다. 그 마지막 나날조차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어머니를 마음대로 볼 수조차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실시되면서, 가족 면회마저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약 3주 만에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원래는 면회가 안 되는데, 주치의 선생님께서 특별히 배려해 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이제 몸은 더욱 야위셨고, 정신은 더더욱 또렷하지 않으시고, 말씀도 잘하지 못하시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셨습니다.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에 사랑한다는 말로 답해주고, 병실에 계신 간병인 선생님을 가리키며 고마운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셨습니다. 예전처럼 명민하진 못하시지만, 여전히 애정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몸과 정신이 쇠할지언정, 마음은 온전한 분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색스의 마지막 나날과는 퍽 다르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나날도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위안을 드리고자 찾아갔지만, 더 큰 위안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저일 것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색스의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러하듯,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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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14:09
수정 아이콘
5년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지막 면회가 생각나는 글입니다. 그 당시에 삼성의료원에서 메르스때문에 가족 2명 30분 면회를 하게해줬습니다. 결국 그렇게 짧게 면회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것이 아버지의 마지막이었네요.
어머니 가시는 먼길, 평안이 함께하시길 바람니다.
이십사연벙
20/09/17 15:28
수정 아이콘
요즘 노년층의 관심사가 웰다잉 이라고 하더군요. 좋은죽음도 좋은 삶만큼이나 어려운것같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늘 지옥불에 들어가는것보다 싫은게 알츠하이머에 걸리는거라고 하시더군요.
가족들에게도 부담이고 본인도 참으로 안좋은모습을 보여줘야하니 그런것같습니다.
블랙박스
20/09/17 16:27
수정 아이콘
글쓴분 상황을 저의 상황으로 가정하여 대입하니까 상상만으로도 너무 슬프네요. 글을 읽으면서 어머님과 글쓴분 모두 훌륭하신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디 글쓴이분 가족분들께 앞으로 늘 행복한 일들만 생기길 기원합니다.
건강이제일
20/09/17 17:06
수정 아이콘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 앞에서 감사를 얘기할 수 있음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아직 제 깜냥에선 그저 먹먹해지는게 다네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힘들지 않으면 좋으련만 힘든 일은 늘 찾아오고, 모든게 마음의 문제라지만 아직은 버거운 나날 들이지만 그래도 감사해보렵니다. 님과 님 어머님의 평온한 나날들을 응원합니다.
Aurora Borealis
20/09/17 18:05
수정 아이콘
어머님과 건강한 나날들을 좀더 길게 좀더 많이 행복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간만에 마음을 울리는 그러나 담백한 일상의 글이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밀물썰물
20/09/18 18:27
수정 아이콘
저도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시고 마지막 얼마동안 요양병원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젊어서 아주 무서웠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포함하여 식구들 모두가 아주 무서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분위기가 전혀 없었는데, 치매에 걸리시고는 그 무서운 독기가 싹 빠지고 저한데 따뜻한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네가 찾아 와 주니 고맙다 같은 말은 제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말인데 그말을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시고 처음 들었습니다. 그러니 원래 속은 그런 것이 들어 있었는데 강인함으로 그것을 다 감추시느라 우리를 더 무섭게 대했었나 봅니다.

어머니 마지막 잘 보내시고, 어머니 지금 얼마나 고통 스러운지 모르겠는데, 더 오래 살면 글 쓰신 분이 좋으시겠지만 고통스러우시다면 어머니 편한 시간 만큼만 사시는 것이 어머니께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간의 어머니와의 정 잘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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