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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6/05 22:52:34
Name Farce
Subject 변방인들과 토사구팽의 역사 (수정됨)
아주 뻔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보겠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실만한 이야기 입니다.

01
[역사에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와! 참 놀랍지 않으십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에는 80억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번 거기에다가 또 그 이전에 지구상의 표면 위에서 울고 웃으면서 살아갔던 사람들을 합쳐봅시다.
그 중에서 '누가' 주인공이라는 타이틀을 함부로 칭할 수 있을까요?

미국인들일까요? 대영제국? 로마인들? 이집트인?
다양한 시공의 폭풍... 아 아니 시공간 속에서 후보들이 있습니다만,
어쩌면 우리는 이 건방진 질문을 정반대편에서 다시 쳐다봐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00
[주인공이 아닌 사람들의 역사는 어떠했을까요?]
역사에 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혀지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을까요?

어떤 작품이 그렇듯이, 모두가 주인공일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단역을 맡아야만 하지요.
그리고 오늘 제가 드릴 이야기는 이런 '단역'들의 이야기입니다.

도시인의 후손들에게 바치는, 도시 바깥의 사람들,
02
국경 끄트머리의 사람들, [야만적인 변방인]들의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는 기억해줄 수 있지만, 굳이 외울 필요는 없는, 그런 지나가버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자 일단 매우 어울리는 음악부터 하나 틀어놓고 가실까요!



[1. 영국의 보더 리버 (Border Reivers)]

지금의 영국... 그러니까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은 이름부터가 연합왕국 (United Kingdom)이듯이,
사실 처음부터 하나로 시작한 나라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께서 아실 것처럼 '잉글랜드'가 주류가 되어서 통합한 것이었지요.

06

그리고 이 '잉글랜드'와 최후의 순간까지 혈투를 벌인 나라가 지금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왕국 중에서 '스코틀랜드'입니다.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보셨죠? 얼굴에 파란칠한 '브레이브 하트' 아저씨도 한번쯤은 보셨을거고요.

10
[프리더어어어어어어어어엄!]

물론 저렇게 '자유로운 야만인' 이미지를 만든 것은, '브레이브 하트' 영화 자체가 고증보다는 신화적인 해석을 택해서 그런겁니다. 크크.
실제로는 갑옷 다 입고 장비 다 갖춰서 잉글랜드와 싸웠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하려는 '보더 리버'들도 마찬가지이고요~

03
[더글라스, 크라이튼, 올리버, 포스터, 그레이, 영...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성씨들이군요!?]

반토막이 난 한반도의 무장된 국경선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국경이 어땠을진...
뭐 굳이 제가 설명을 아직 시작 안 했어도, 대충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 않으십니까!? 크크크!

다양한 기사 가문과 지역민 가문이 요충지마다 요새화된 마을을 곳곳에서 수비하고 있었으며,
산발적으로 국경분쟁이 발생했고, 가끔씩은 메인 이벤트로 두 나라 간의 공식전쟁이 있었습니다.

본래부터 척박한 고지대였던 국경지대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황폐화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조금씩 이루어지던 농사는 거의 맥이 끊겨버리고 말아버립니다.
그나마 한쪽의 왕이라도 농사꾼들을 지켜줄 생각이 있었다면 역사의 방향은 달랐겠지만,
사실 상대방이 쳐들어왔을 때 털어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던 뒷사정은,

국경지대를 끌고 다니고 치워버리기 쉬운 목축업에 종사하게 만들어줬습니다.
하지만 이건 엄청난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11
[야그들아! 전부 다 챙겨간다! 못 들고 가는 건 다 불 질러버려! 저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
  
농사꾼들이 전쟁을 할 때는 지켜야하는 몇가지 규칙이 생기는 법입니다.
밭을 전부 태워버리고, 농사꾼을 전부 죽여버리면 도대체 소는 누가 키우냐고요 누가 키워!

05
[하지만 지역과 가문의 경제가 가축에 기반을 둔다면 정말 서로를 인정사정 없이 봐줄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국경지대에서 제일 가는 소부자라고요? 걱정 마십시오! 하룻밤 만에 전부 털어드리겠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것은 400년에 걸쳐서 펼쳐질 거대한 소도둑질과 무자비한 약탈과 방화였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들의 이름은 '보더 리버'였습니다. '보더'는 국경이라는 영어단어이고요.
당연히 섬나라인 영국 역사에서는 '국경'이라고 불릴 것은 바로 이 스코틀랜드 국경지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리버는 뭘까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지요?

08
09
[뀨우 :3 ?]
우리 모두가 그 시절 좋아했던 귀여운 벌레의 이름이지요. 그리고 혹시 이 리버의 뜻을 기억하시는 분?
맞습니다. Reaver (Reiver인 이유는 옛날 철자를 역사적 용어라 그냥 두기 때문) 그러니까 약탈자, 파괴자입니다.
(정확히는 둘다죠! 약탈도 하면서 파괴도 열심히 해야 얻는 이름입니다 하하!)

보더 리버는 서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수백년짜리 원한관계를 각자 국경을 넘어서 가지고 있었고,
04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쪽에서 전쟁 때 마다 잘 고용해서 잘 써먹었습니다.]
이들은 침략군을 위한 길잡이였으며, 현지 가이드였고, 좋은 기마병이었으며, 우리편으로 잘 싸우는 약탈자이었습니다.

하지만,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거의 뭐 조선시대만큼 길게 계속되던 보더 리버들의 역사는 어처구니 없게 끝을 맺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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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이제부터 우리가 한 가족이라니!?]
그렇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이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기로 했답니다, 와아 경사났네 경사났어!

이제 국경의 약탈자들에게는 애석하게도 토사구팽 밖에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전쟁하는 두 나라 사이의 관계덕분에 이것저것 챙겨주고 키워줬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어졌거든요.

뭐 일단 스코틀랜드 왕실에서는 당장 알아서 죽어버리라고 말한 것은 아니고, 좋은 말로 할때 멀리로 좀 떠나라고 했습니다.
"니가 가라 얼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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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의 얼스터-스코트 정착지들 by Philip Robinson]

옛 스코틀랜드 왕실 겸 현 연합왕국 왕실에서는 북아일랜드 (당시 지역명으로는 '얼스터')에 이들을 옮겨 심어서,
아일랜드인들의 독립운동을 방해하자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때 프랑스가 후원한 큰 아일랜드인 반란이 진압되어서,
땅을 다시 분배하는 걸로 원주민들을 크게 혼내줄려고 했었거든요.
국내의 문제를 없애고, 식민지에 골치를 준다!? 캬 영국맛 꿀맛!

그래서 많은 보더 리버들은 어차피 산업화 되어가는 조국에서 산골짜기에 남아 소좀 키운다고 영광과 명예도 기대하기 힘들겠다,
털래털래 북아일랜드로 이주해서, 지금도 북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독립을 하지 못하는 것에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아일랜드인들의 독립국가를 세우겠다고? 내가 왜 협조해야하는데!?)

하지만 북아일랜드가 이런 '얼스터스코트인'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또 아닙니다. 수가 꽤나 많긴 하지만요.
사실 이들도 새로운 고향에서 잘 해보고 싶었지만, 아일랜드는 유서깊은(?) 잉글랜드의 식민지였고,
이제야 스코틀랜드인들을 연합왕국의 2등 신민으로 괜찮게 대우를 해준다고는 했지만,
1등 신민들의 식민지의 2등 신민이라니... 아주 맘에 들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들어보니 좀 많이 꼽죠?

그래서 '보더 리버'... 아 아니 이제 '얼스터 스코트인'들은 아일랜드의 식민통치가 좀 흔들린다 싶으면 (꽤나 자주 흔들렸습니다)
자유를 찾아서 더 멀리 떠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가는 새로운 나라는 다름아니라 '미국'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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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부 지도 같은데, 저거 초록색은 무슨 산맥처럼 생겼는데요?] 맞습니다. 미국의 애팔래치아 산맥이지요.
다른 평지에서는 다른 이민자들이 농사나 지으라고 하고, 산골의 강인한 '보더 리버'의 후손들은 산으로 들어가 소를 키웠습니다.

이들이 그 악명높은 '힐빌리 (Hillbilly)'들의 조상님이 되는 것이지요. 아 힐빌리가 뭐냐면요. 뭐 칭찬은 아니고 지역편견인데요.
애팔래치아에 사는 미국인들의 한 종류로, 두메산골에 자기들끼리 처박혀서 살며, 근친으로 정신과 육체가 오락가락하고,
낡아빠진 옷을 입고 문명에 뒤쳐지게 살며, 괴상하고 지독한 사투리를 쓰고, 이방인이 오면 저리가라고 하던가 그냥 콱 죽여버린다는..
뭐 그런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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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인 이미지로는 대충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힐빌리 이미지로 친근하게(?) 술장사를 해 전설이 된 팝콘 서튼 (Popcorn Sutton)]

뭐 이제는 영국도, 아일랜드도, 미국도,
보더 리버나 얼스터-스코트, 또는 힐빌리를 표준문화로 보지 않는 자기만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표준화된 문화를 가꾸고 있지요.
아아, 불쌍하게 토사구팽 당한 변방인들이여, 이들에게 도대체 역사가 무슨 의미일까요?

[2. 미국의 부시웨커 (Bushwhackers/Jayhaw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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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카우보이 어서...]

자 이번에는 보더 리버들을 받아주었던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 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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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하면 역시 '카우보이'죠! 그런데 왜 미국은 카우보이가 총을 쏘나요?]

무법자와 보안관이 총싸움하던 서부개척시대를 생각하자면, 사실 카우보이가 총을 쏘는 것은 신기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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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서부에 가득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백인 미국인들이 아니라 라틴계 멕시코인들이었습니다.]

"바께로(Vaquero)"라는 스페인어 명칭을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 개신교가 아닌 천주교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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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건조한 고원 '메세타 센뜨랄 (La Meseta Central)']의 목축문화를 계승한 소몰이꾼들이었지요.

물론 백인 이민자들 역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동부해안에서 벗어나, 건조한 내륙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바께로들이 만든 신대륙의 목축 문화를 받아들여, 카우보이의 전통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만, 이들은 성경의 다윗이 그랬듯이,
양떼를 지킬려면 짱돌 마스터가 되어야하는 변방지대에서 법의 보호없이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지,
카우보이라는 존재가 무법자라는 뜻은 또 아니었지요.

하지만 이런 '평범한 서부의 무법지대'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으로 내던지게 됩니다. 서부의 탓이 아니라 동부의 탓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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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와 북부 사이의 경제적이고 문화적이며 정치적인 격차는 벌어져갔고, 결국 미국내전,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맙니다.]

그리고 1부의 주인공들이었던, 보더 리버들이 그랬듯이, 이제 소속과 충성심이 불분명한 무법자들에게는 황금기가 열렸지요~


[영화 '석양의 무법자'의 한 장면, 회색옷(남군) 차림을 한 군대가 보여서, 복장을 갈아입었는데, 파란옷(북군)의 먼지를 턴다!?]

북군 소속의 제이호커(Jayhawkers)와 남군 소속의 부시웨커(Bushwhackers)들의 이야기는 정말 보더 리버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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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에서 대부분의 제대로 된 '전쟁'은 동쪽에서 일어났습니다. 거기에 거점과 도시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서부가 평화로웠다는 뜻은 아니겠죠? 다양한 종류의 불한당, 약탈자, 카우보이, 총잡이, 도둑놈들이

23
[내가 북군 소속이다, 내가 남군 소속이다, 너희들을 단죄하러왔다! 라고 몰려다니며, 은행강도, 암살,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이들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갑자기 남북, 양쪽의 정부가 무장시킨 것도 아니었고요.

26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전초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시기가 미국의 역사에서 ['피의 캔자스(Bleeding Kansas)']라는 시기입니다.

27
매우 복잡한 시기입니다만, [1줄 요약을 하자면 "외부인들은 꺼져!"]라고 하면서
노예제옹호자, 노예해방주의자가 전미국에서 모여, 양쪽으로 갈라져 캔자스주에서 싸운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캔자스주의 토박이들도 있었습니다만, 이제 막 개척이 끝난 캔자스의 '백인 원주민' 이야 한줌에 불과했고,
결국 전국에서 이런저런 연줄에서 고용하고, 의용심으로 모으고 한 '외부인 중의 최고 외부인을 가르자!'라는 배틀로얄이었지요.

그리고 이런 연줄과 뒷배는, 결국 제대로된 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무뢰한들과 마적들과 강도단에게 군인 계급장을 주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다 아시겠지만, 이런 집단이야 당연히 군인 계급장이 있어도,
기회가 되면 아무나 다 털었다는 것도 짐작가실 겁니다 크크... 연줄이 너무 커서 한쪽이 전쟁에서 망할때까지 묶인 경우도 있었지만요.

북군편을 든 제이호커의 이름은 거의 망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만, 아직까지도 부시웨커는 불한당을 뜻하는 아이콘으로 남아있습니다.
왜냐고요? 이긴 편은 금방 정규직으로 승격하고, 성공적으로 은퇴해서 편안한 노후생활을 보내거나, 그냥 투덜거리며 손을 씻었지만,

24
[진쪽은 전쟁이 끝나고서도 계속해서 옛날 본업을 '양키 중앙정부 짭새들'에게 화끈하게 보여줬거든요.]

하지만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서부개척시대가 끝나가고 있었고, 그 시대의 영웅들은 강제로 은퇴를 당해야만 했지요.
남북전쟁이 끝나고, 재건시대 (Reconstruction Era, 1863-1877, 미국 남부에 잠시 군정청이 설치되었다가 철수한 시기) 마저 끝나자,
도금시대 (Gilded Age, 1870년대 - 1900년, 도금이라니까 말이 이상한데, '겉은 화려해지고 속은 썩어갔다'...는 뜻입니다.)가
열렸습니다. 나중에 미국도 공산화가 되네 마네 하는 그런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무자비한 자본가들이 맘껏 날뛰는 시대였지요.

30
[그리고 이 배불뚝이 자본가들이 뭘 싫어했게요? 당연히 시대가 끝난지도 모르고 날뛰는 '서부의 무법자'들이었습니다!]

예시를 들자면, 최근(?)에 나온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 2"가 당시 그 시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9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등장하는 이 밉상 2인조가 '핑커톤 탐정 사무소' 출신인데요. 그곳은 미국 근대사에서 '공권력의 용역깡패'였습니다.]
당연히 부시웨커들은 자신들을 비호해주는 남부맹방도 사라졌으니, 아무리 '북부 점령군'에게 적대적인 남부인들의 지지를 받았다지만,
끝내 하나씩 하나씩 공권력에게 추적당하고, 비참하게 살해당합니다. "미국" 공권력이랑 얽히면 결과가 좋지 않은 법이지요.
'현상금 사냥'의 마지막 시대는 바로 이들의 목을 걸고 그렇게 화려하게 끝났습니다.

역설적인 것은, 그런 최후 덕분인지, 오히려 시간을 지나면서,
이 시대의 부시웨커들은 기성체제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는 영웅으로 기억되기 시작했습니다.
아까 '석양의 무법자' 영화를 예시로 들었듯이, 초기 서부극과 달리, 후기 서부극은 이런 역사를 (좀 많이 미화하지만) 더 다루곤 하죠.
우리가 카우보이라고 부르는 "법률 X까"라고 하는 멋진 총잡이 아조씨들은,
사실 평화로운 목동이 아니라 이 무뢰배들의 후손들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양심도 없습니까, 제임스 레이너?

28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프로레슬링에서도 태그팀 이름으로 쓴적도 있지요 하하!]

자, 이것이 바로, 속칭 '서구 문명인'들의 변방사입니다.
서양사는 무슨 왕들과 대통령의 역사 같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왕들은 혼자서 잘난 역사를 잘 써내려가겠지만, 그들이 잊으려고 하고, 계승하거나, 기억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 수 많은 변방인들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양의 역사도 마찬가지 일것입니다.

몽골의 대제국이 대단하고 부러워보이고, 청나라가 조선의 왕을 땅에 머리박게 만든 것이 참 우악스럽지만,
나라도 민족도 동화되어서 사라져버린 그들의 지금 상황까지 부럽고 내가 대신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잖아요?
왕들의 역사만이, 지배자의 역사만이 역사라고 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지구의 수 많은 등장인물의 수십억분의 일만 챙기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역사에 주인공이란 없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기억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누군가가 저 또한 기억해주지 않을까요?
무엇인가 중요하지 않다, 무엇인가는 잊혀져도 된다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버전을 남에게 강제하고 싶은 것일까요?
변방으로 오십시오. 아무도 환영하지 않은 사람들, 아무도 바라지 않은 사람들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지금 펼쳐지고 있는 역사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아니... 대부분의 것들은 이곳에 와야합니다. 좋든 싫든지 간에요.

이들과 말냄새가 나는 안장에서, 화약냄새가 나는 역사의 사건 속에서, 상상의 대화를 나누어야
드디어 우리가 역사를 볼 수 있는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역사요? 어떤 한국인이요? 누굴 넣고 누굴 빼죠?

다음 이야기는 동유럽으로 가서, 호쾌한 카자크인들의 토사구팽에 대해서 다루어보는 것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발칸반도는 왜 아직도 종교에 따라서 민족을 가르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인종학살로 만들었을까요?
투르크인들이 지난 수백년 동안 발칸반도에서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무슨 종류의 변방인을 고용했기 때문일까요?

31

"[기독교도 돼지치기만도 못한 불쌍한 삶을 사는 놈아, 우리는 야만적이라 니들처럼 달력이 없어서 편지 끝에 날짜는 못 적어주겠다.]
하늘을 보니까 달이 떠있고, 요일은 니가 있는 그곳하고 똑같겠지, 항복편지니 뭐니 애써서 보내서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말고,
느그 어머니한테나 잘 지내시냐고 편지나 쓰지 그러냐? 우리 똥싸개 투르크 술탄에게, 자포르지예 카자크들이 애정을 담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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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총난
20/06/05 23:18
수정 아이콘
와 필력이 어마무시하시네요!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20/06/06 15:31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는 제가 PGR21에서 정말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고 해도 재미가 없으면 읽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다음 글은 더 재밌어질 수 있도록 궁리를 해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06/05 23:23
수정 아이콘
보더리버의 말로가 스티븐킹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 같이 되었네요 근친혼이 횡행하는 폐쇄적인 마을이라니. 역시 세상에 나쁜짓은 다 영국놈들한테서 나오는것 같습니다.
20/06/06 15:30
수정 아이콘
(수정됨) 미국인들은 영국인의 후손이다~ 라는 말은 정말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흐흐흐... 영국이라는 나라는, 일본도 그랬듯이 갇혀있는 섬나라라는 특성 덕분인지 내부 식민지를 정말 수백년 동안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개척하고 또 동화하고, 제압해나갔습니다. 역시 제국주의도 해본 사람이여야 잘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남북전쟁 이후로 북부 자본가들이 중심이 된 문화에서 미국의 문화가 흐르지만, 남부 시골의 그 고딕하고 (Southern Gothic이라고 부른답니다. 늪지대에서 미신적으로 사는 '미국인'들의 괴기한 이야기. 게임에서는 좀비 게임 바이오하자드7이 정말 잘 써먹었지요~) 탁한 그 느낌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적인 미국과는 반대되는 미국의 '광기'를 보여주지요. 저는 그래서 미국 남부의 이야기들이 더 좋습니다. 특히 "앵무새 죽이기"는 정말 미국남부적인 소설입니다. "하등한 인종의 더러운 피가 흘러서 안돼! 남은 핏줄이 저주 받을거야"라고 외치는 이미(?) 대대손손 못사는 백인들의 광기를 아이의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작품이지요. 차라리 남북전쟁에서 남부맹방의 독립시도가 성공했다면 모를까, 지금도 미국이 하나인 시점에서는 그런 소설을 읽어보면서 지금의 미국을 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미국 남부에는 사람들이 사니까요.
빙짬뽕
20/06/05 23:58
수정 아이콘
오랫만에 재밌게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20/06/06 15:47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보셨다는 댓글을 달아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는것보다도 주제를 어렴풋이 골라놓고서 고민할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한국 역사도 아닌 이런 머나먼 이야기를 올려서 읽어주시는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 너무나도 회의적이었기에, 그냥 요즘 본업도 바쁘겠다, 게임이나 하러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다 괜찮습니다. 제 판단이 결국 옳았어요. 누군가에게 재미있을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더 재미있을 만한 이야기를 골라서 돌아오겠습니다.
20/06/06 00:32
수정 아이콘
(수정됨) 매번 잘 읽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본문에서는 도입부에서 간략히 다루고 넘어가셨지만, 저는 요즘 '내러티브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의 산물일 뿐, 우리의 의견과 독립해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사건은 얼마든지 다른 내러티브로 (사실 관계를 거짓말치는 경우 빼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이니 지금 내 의견에 대해서 크게 집착할 필요 없다' 라는 쪽으로 인생관이 변해가는 쪽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더니 무슨 산속 암자의 스님 마냥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게 되고, 웬만해서는 싸울 일이 없어서 좋더군요.
20/06/06 15:51
수정 아이콘
매번 좋은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말씀하신 내용은 제 글들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주제이면서, 제 인생철학(?)이기도 한데요, OrBef 선생님께서 또 그걸 수용해주신다니 또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저야 워낙 인생의 굴곡이 많아서 (고작 20대입니다 크크크...), 좀 이른 나이에 깨우치게 되더라고요. "아 사람은 정말 자기 믿고 싶은대로 믿고, 또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게 인생이구나"라고요. 그렇기에 타인과 소통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종류의 이야기와 상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런 개인적인 신념이 있습니다. "이건 이렇고요~"라고 말했더니, "그건 내가 삼라만상을 이해하는 방법이 아니라서 이해했다고 못 말하겠네~"라는 대답을 워낙 많이 들어봐서요. 결국은 1인칭 시점들이 어떻게 다른 1인칭 시점들과 살까, 저는 항상 그걸 고민하고 있습니다. 득도의 경지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다음 글로 또 찾아뵈겠습니다.
Je ne sais quoi
20/06/06 00:43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20/06/06 15:42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은 열심히 살다가 좌절할 수도 있지만, 좌절하려고 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악의넘치는 약관으로 쓰여진 계약이라면 차라리 중간에 때려치는게 더 좋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역사를 승자의 역사로만 규정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독박을 쓰고 잊혀지고 있는 것일까요? 삶은 그냥 살아지는 것이고, 시간은 그냥 흘러지는 것인데, 왜 승자를 숭상해야할까요? 저 또한 무언가 기록이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저 스스로에 대한 기록자로서 PGR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글은 더 재미있는 주제로 찾아뵈겠습니다.
20/06/06 00:43
수정 아이콘
너무 재밌네요.
20/06/06 15:40
수정 아이콘
다음 글은 동유럽 이야기를 하면서 유고슬라비아 내전도 한번 다뤄보고 싶습니다. 한동안 쓸 수 없던 주제의 이야기이지요. 왜냐면 살아계신 당사자가 계신대도, 저는 이걸 '너무나도 재밌다고' 생각해서 쓰고 싶어하니까요.

이제 2020년이 되었고, 1차대전이 더 이상 선악이 없는 그냥 유럽 식민제국들의 전쟁으로 객관적으로 보이듯이, 신성한 현대사는 쓴웃음과 함께 읽어볼 수 있는 근대사로 천천히 하나둘씩 편입되고 말아버립니다. 유고내전 역시 유럽역사에서 수백년의 빌드업 끝에 탄생한 정말 지독하게 웃긴 블랙 코미디었지요. 그런 시대를 다루는 글도 재미있게 읽어줄 수 있는 글로 쓸 수 있기를, 저는 더 정진해서 오겠습니다, 강해져서 돌아올게요!
므라노
20/06/06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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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역사란게 너무 중앙권력 부분만 다뤄서 아쉬울 때가 참 많아요.
변방에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 스러져가고, 그 후손조차 일부는 흔적이 남겠지만 대부분 그러한 역사를 잊어버리고 주류 문화에 동화되어 오히려 조상의 문화를 낯설게 느끼지요.
그러면서도 다시 전대와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는게 참 아이러니 합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안타깝지만 그것과는 관계 없이 시대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피를 마시는 새가 다시 읽고싶군요.
20/06/0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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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역사가 가끔은 승리자의 역사니,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니 하는 비판을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도대체 모두 왕을 시켜줄 것도 아니면서 왜 왕의 이야기만을 배워야하나요~? 저는 이 글을 절망의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 조상님이 뭐 좀 그랬다고 지금 있는 세대보고 뭐 살아달라 죽어달라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역사가 아무리 수천년짜리여도, 결국 우리는 1인칭 시점에서 살아가는 집합체들이니까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장 강력한 지도자조차도 시대의 수레바퀴에게 멈추라고 명령할 수 없지요. 사람은 결국 딱 그 정도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을 비틀면 멋진 판타지 소설이 나오는거고요 (아아 눈마새 피마새 봐야하는데 아직도 못 읽었네요.)

좋은 덧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아마추어샌님
20/06/06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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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0/06/0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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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가 있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역사는 정말로 재미가 있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그랬다고 하지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요. 인생들이 겹치고 합쳐지고 나뉘는 역사란 얼마나 코메디가 따로 없을까요. 하지만 그런 짖궂은 웃음 속에서도, 우리는 건강하게 웃는 법을 배워야겠지요. 감사합니다.
아마추어샌님
20/06/0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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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다른 분들처럼 길게 댓글 달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저의 경우 뭔가 그렇게 하려면 그 사안에 심사가 뒤틀려야 보통 길게 댓글을 달게 되더라고요.
한국 이야기는 아니고 태평양 건너 이야기다 보니 재미있는 이야기로만 다가오네요.

문득 찰리 채플린 대단한 사람인데 대단하다는 걸 또 느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시간지나 글을 좀 보니 제가 왕이나 대통령이 아니다 보니 또 생각이나 느낌이 달라지네요.
새강이
20/06/06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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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20/06/0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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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의 주인공은 러시아의 카자크들이 혁명의 선봉에서, 공산화의 적이 되는 토사구팽의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동유럽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주실 분들은 얼마 없으실 것 같아서, 영국쪽으로 틀어봤더니 마침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넵! 반드시 다음편도 실망시키지 않게 열심히 자료를 조사해오겠습니다. 이런 응원 정말 감사합니다.
20/06/0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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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고 흥미진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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