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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6/04 14:38:50
Name aurelius
Subject [유럽] 프랑스인이란 무엇인가? 끝나지 않는 역사논쟁 (수정됨)

"우리 조상인 갈리아족은...(Nos ancetres les Gaulois...)"

19세기 제3공화국 프랑스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삽입된 문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20세기 후반까지 줄곧 이어진 "거룩한 문장"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신문과 책들이 인용하는 문구입니다.  

제3공화국은 공화주의를 제창했고, 국민적 단결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전국에 공립학교를 설립하고, "표준화"된 교육을 실시합니다. 공화국의 사상가들은 프랑스의 역사는 갈리아인들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과거 혁명 당시, 혁명의 급진파들은 프랑스의 귀족과 왕들은 비프랑스인, 이방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는 그들은 갈리아를 정복한 프랑크족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프랑스인들은 "갈리아족"이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저항한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는 그러한 프랑스의 우상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기리는 거대한 조각상도 제작되었죠. 

반대로 제5공화국의 국부인 샤를드골은 "내가 보기에 프랑스의 역사는 클로비스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클로비스는 게르만 왕국 중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최초의 왕입니다. 프랑크족의 왕이자, 가톨릭의 수호자. 그 덕분에 프랑크왕국은 그 이후 줄곧 "교회의 맏딸(La fille ainee de l'eglise)"이라고 불렸습니다. 드골이 클로비스를 프랑스의 국부로 지목한 것은 그 자신이 왕당파 가정에서 자란 보수주의자였고, 신앙심 깊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클로비스의 개종은 프랑스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아주 큰 상징성을 가진 역사적 사건이며, 프랑스 전통의 원천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 프랑스는 갈리아족의 후예인가, 아니면 프랑크족의 후예인가? 

사실 전혀 의미없는 논쟁이긴 합니다. 프랑크왕국 자체가 갈리아인, 로마인, 게르만인의 혼종이었으며, 16세기 이래 이탈리아인들이 대거 들어와서 화가, 음악가, 시인 등을 배출하고 심지어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적 정체성이 강조되던 19세기 당시 아이러니하게도 전유럽에서 이민자가 몰려들어왔습니다.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폴란드인, 러시아인....엄청나게 많은 수의 외국인이 프랑스에 들어와 노동자로 일하였으며, 대도시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를 반영해서인지, 1851년 프랑스는 "속지주의(droit de sol)"를 명문화하여 프랑스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은 자동적으로 프랑스 국민이 된다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강력한 속지주의를 추구하던 프랑스가 오히려 갈리아 민족주의에 집착하여 아프리카, 아시아 출신의 이민자들에게도 "우리의 조상 갈리아족은..."이라는 문구를 외우게 했다는 점입니다. 아주 최근이라고 볼 수 있는 2016년에조차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도 "프랑스 국민이 되는 순간 그의 조상은 갈리아족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큰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프랑스에는 두 세계관이 계속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 두 세계관은 서로 격렬히 대립하면서도 서로 닮아있습니다. 

전통파들은 프랑크 왕국의 위엄과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보편주의를 역설하고, 공화파는 갈리아인의 자유와 프랑스 혁명의 전통을 역설합니다. 이 구분과 대립은 1789년 혁명 이래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로베스피에르나 생쥐스트 같이 아주 먼 과거의 인물을 다룰 때조차 마치 동시대인을 다루는 것처럼 논쟁이 격렬합니다. 이 세상 둘도 없는 악마가 되었다가, 또는 혁명의 수호자가 되기도 합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며, 이들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논쟁이 뜨거워진다고 합니다. 

이미 과거 역사가 되어버린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박정희나 이승만에 대해 언급하는 것처럼 "민감한 주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혁명 당시 처형당한 루이16세를 기리는 장례미사가 오늘날에도 매년 거행되고 있습니다(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2007년 한 여론조사에서 왕정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17%에 달한 적이 있고, 국민전선 지지자 중에서는 무려 37%가 이를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프랑스의 "위엄(Grandeur)"과 "보편주의(Universalisme)"에 대해서는 같은 입장입니다. 전통파는 프랑스가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의 수호자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특별한 사명을 지닌 국가라는 생각을 하며, 공화파는 프랑스의 공화주의와 세속주의야말로 인류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관이며 이를 전 인류에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수파는 세속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으며, 진보파는 가톨릭 교회, 아니 종교 그 자체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자 모두 프랑스가 특별한 사명을 가진 나라이며 동시에 전파해야할 복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전통파나 공화파의 관점을 모두 부정하는 지식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민족과 국가 자체가 허구이며, 특별한 사명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 진보적 지식인들 또한 역사논쟁에 참여하였습니다. 2017년 프랑스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그 사례입니다. "세계 속의 프랑스(Histoire Mondiale de la France)"라는 제목의 책인데, 여기서 저자들은 전통적인 프랑스 역사 연표를 따르지 않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잘 모르는 연도와 사건들을 배치하여 프랑스라는 지리적 공간에 발생했던 다양한 사건들을 보여줍니다. 저자들이 핵심적이라고 생각하는 연도를 제목으로 하여, 해당 연도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수많은 민족과 사상들이 프랑스땅을 거쳤고, 여기에 어떤 특별한 사명이나 대서사시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프랑스인들이 일반적으로 무시하거나 멸시했던 사건이나 지역에 주목하면서 소수자나 식민지가 프랑스에 준 영향을 살핍니다.

그래서 그런지 해당 저서는 보수우파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국가적 대서사시(Roman National)가 없는 프랑스사, 비애국적인 프랑스사, 프랑스 전통을 무시하고 자학사관에 빠진 좌파들의 음모, 프랑스를 소멸(dissolve)시키는 역사관 등...(특히 프랑스 극우 논객 에릭 제무르(Eric Zemmour)가 가장 격렬히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보수우파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는 대성공이었고, 학문적/문학적 업적으로 인해 상도 받았습니다. 

한편 "세계 속의 프랑스"의 성공에 반발해 보수 쪽에서도 새로운 프랑스사를 내놓았습니다 "프랑스의 역사: 국가적 대서사시(Histoire de France: Un Vrai Roman National)"라는 제목의 책인데, 과거 프랑스의 과오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프랑스 역사에는 분명한 서사(narrative)가 있다고 주장하는 책입니다. "국민국가의 건설", "공공선을 위한 여정", "기독교적 뿌리에 기반한 세속주의", "보편주의를 추구하는 정의관", "다양한 민족을 흡수하는 국가"가 바로 그런 서사입니다. 저자는 분명한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는 과거 루이14세 평전과 예수에 대한 평전으로 성공을 거둔 역사작가로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이 누군인지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관점에 맞는 통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세속주의와 기독교, 다민족/다인종과 단일 프랑스, 특수한 프랑스이면서도 보편적인 프랑스 등 말이죠. 이 저서 또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프랑스인이란 무엇이고, 프랑스 역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오늘날에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흥미로운 논쟁이라고 봅니다. "민족(Nation)"이라는 관념에 대해 가장 진지한 논의를 시작한 것도 프랑스이며,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단어를 보편적 표준이라는 의미로 격상시킨 것도 프랑스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민족이냐, 문명이냐, 특수하냐, 보편적이냐... 

오늘날 프랑스인들의 4명 중 1명은 외국인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고 합니다. 19세기 이후의 이민자로만 보아도,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세계대전 이후에는 모로코와 알제리 그리고 사하라 이남의 국가출신들... 이와 같은 사실을 고려하면 "우리의 조상 갈리아족은" 이라는 완전히 폐기해야 하는 문장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날 프랑스 국민이라고 함은 무엇을 의미하고, 프랑스 국가는 어떤 전통과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가? 그들이 어떤 해답을 찾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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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 14:48
수정 아이콘
와우 이런 사정이 있었군요. +_+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06/04 15:35
수정 아이콘
사실 프랑스도 큰 나라인지라 본토 기준으로 조상중에 골족만 있다고 하면 여러 소리 나올 겁니다. 하물며 식민지시절의 유입에 대해서라면.. 절레절레.. 무엇을 근거로프랑스라는 민족적 개념을 확립시킬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네요.
기쁨평안
20/06/04 15:39
수정 아이콘
놀랍게도 프랑스에서도 자신들의 민족적 뿌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비록 시간이 흐르고 지리적인 격차가 벌어졌음에도 그 근원되는 어느 한 "민족"이 있음이 유전적으로 각인되어 흐르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조상이라 믿는 민족의 이름은 "갈리아"이다. 그런데 이 발음은 상고어원적으로 추측해보건대 '가리', '거리'' 혹은 '고구리' 의 발음과 유사하며 이것은 자신들의 조상을 '고구려' 혹은 '고려' 라고 부르는 어느 한 민족의 특성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카스가 미라이
20/06/04 16:06
수정 아이콘
(상상도 못한 정체)
동경외노자
20/06/04 21:15
수정 아이콘
와..... 방심했는데 훅들어오시네요;;;
얘가체프커피매니아
20/06/04 22:01
수정 아이콘
(상상도 못한 정체)(2)
율리우스 카이사르
20/06/05 01:46
수정 아이콘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모든 가짜뉴스와 음모론, 선거부정등에 쓰이는 매직워드!!
세상의빛
20/06/04 23:15
수정 아이콘
얼마 전 유게에 올라온 문화재 관련 만화를 본 뒤라 그런지... 낯짝 두꺼운 도둑들로 우선 인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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