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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5/30 00:52:11
Name 자몽쥬스
Subject [일반] 보호자 일기

#1.
밤 열시 사십 분.
전문의가 되고 나서 수술한 환자 상태 확인 차 몇 번 이 시간에 병원에 나와본 적은 있지만 병원에서 자는 것은 처음이다.
간호사들은 이브닝-나이트 인계를 시작해서인지 모두 스테이션에 있고, 복도를 힘차게 걷던 환자들도 모두 자러 들어간 시간. 이 시간의 병동은 꽤 조용하다.
그렇지만 내가 오늘 잘 곳은 썩 조용하지 않다.
불 꺼진 작은 병실을 채우는 여러 가지 소리들.
라디오에서 나지막히 흘러 나오는 오래된 노래 소리, 벽에 연결된 산소병이 뽀글거리는 소리, 천장의 히터 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삐그덕대는 소리,
그리고 옆에 곤히 잠든 아빠의 코고는 소리.
눈이 꽤 뻑뻑해지고 있지만 불을 켤 수도, 제대로 잠들 수도 없는 이유는, 한때 환자였고 현재 의사인 내가 오늘은 보호자로서 병원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2.
나는 아빠의 약한 모습에 익숙하지 않다.
아빠는 내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테니스 철인3종 다이빙 골프 등등 종목이 바뀔지언정 운동을 중단하신 적이 없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여러 가지 잔병들이 있지만 대체로 평생을 큰 수술 없이 아주 건강하게 살아오신 분이기도 하고.
아빠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염을 할 때 딱 한번 짧게 흐느낀 것이 전부일 뿐 슬픈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올라온 아빠는 아직 호흡이 잘 되지 않는지 코에 산소줄을 끼고도 밭은 숨을 자꾸 내쉰다.
-숨쉬는 게 잘 안돼.
활력징후를 나타내는 모니터를 확인한다. 산소포화도는 정상이다.
-아빠, 원래 마취 깬 직후에는 좀 그럴 수 있어. 근이완제가 아직 완전히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아서 그래. 금방 좋아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심호흡하고.
불안한 눈동자가 느리게 돌아간다. 깊은 바다 속으로 잠수하기 전 크게 숨을 쉬는 고래처럼 배가 천천히 부풀었다 꺼진다.
-어지러운데.
-진통제 때문에 그럴 거야. 일단 눈 감고 있어. 너무 어지러우면 약 다른 걸로 바꿔달라고 해 보자.
30여년만에 처음 보는 아빠의 약한 모습 앞에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3.
깜빡 졸다가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후닥닥 일어난 시간이  밤 열두 시. 체온을 재러 온 간호사가 열이 나고 있으니 일어나 복도를 걸으라고 했다. 나는 아빠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아 주고, 몸에 주렁주렁 달린 소변줄과 배액관을 걸리적거리지 않게 정리한 뒤 아빠의 손을 잡고 병실 문을 나섰다. 병동 복도를 보통 걸음으로 크게 한 바퀴 도는 데는 아마 7-8분 남짓 걸릴 테지만, 10km정도는 우습게 뛰던 아빠는 열 걸음도 겨우 걷고 잠시 멈추기를 반복하여 병동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시간은 열두 시 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겨우 100미터 남짓 걸었을 뿐인데 등을 흠뻑 적신 아빠의 축축하고 뜨거운 손을 잡고 병실로 들어왔을 때, 창 밖을 비추는 노란 가로등 아래 선 헐벗은 나무들 사이로 십여 년 전 어느 겨울처럼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가게 되는 바람에 자취할 원룸을 계약하러 갔던 아주 추운 1월. 기록적인 폭설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날, 눈 쌓여 꽁꽁 언 내리막길을 아빠의 크고 두툼한 손을 잡고 아빠가 딛는 자리만 골라 디디며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늘 그랬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피해갈 수 있도록, 늘 먼저 걸어주던 분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 당연했고 그날의 그 길 역시 발 아래 깔린, 푹신하고 숱한 당연함 중 하나였다.
결국 열이 내리지 않아 아빠는 해열제 주사를 맞고 나서야 깊은 잠에 빠졌다. 몸에 달린 주머니들에 고인 체액의 색을 확인하고, 이마에 손을 올려 본다. 아까보다는 열이 내린 것 같으니 이제 좀 편하게 주무시려나. 곤히 잠든 아빠의 손을 살짝 잡아본다. 십여 년 전 그날의 손과 같은 손이지만, 또 같지 않은 손이다. 영웅이었고, 영웅이지만 영원은 아닐 그 손을 잡은 채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4.
어스름하게 밝아 오는 창밖을 본 것 같았는데 언제 잠들었을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고개를 드니 수염이 까슬하게 올라온, 수척한 얼굴의 아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딸 맛있는 거 사주고 싶다.
아, 눌렸다. 눈물 버튼.

#5.
아빠의 입원 짐은 아주 간소했지만 의외의 물건이 하나 있었다. 몇년 전에 사드렸던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 겸용 라디오였다. 번거롭게 이런 걸 왜 챙겨왔냐고 타박했지만 사실 가져온 짐 중 가장 잘 쓴 게 바로 그 라디오였다. 우리는 병원에 머무는 시간 내내, 심지어 자는 시간에도 라디오를 들었다. 주파수는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93.9, CBS 음악FM으로 고정. 하루 종일 오래된 가요와 올드 팝을 틀어주는 아빠의 최애 채널이다. 저녁을 먹고 7시가 좀 넘은 시간, 목소리가 끝내주게 멋있는 배미향의 저녁 스케치를 틀어두면 아주 옛날 아빠 차를 탈 때마다 듣던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눈을 감고 노래를 듣던 아빠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하면 조용히 일어나 불을 끈다.
어두운 병실 안을 채운 것은 아빠의 숨소리와 ELO의 midnight blue. 배액관에 고인 체액은 깨끗하다. 아빠의 잠든 얼굴은 어제보다 개운하고, 나는 어디론가 날아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밤이다.


—————————————————————

아빠가 얼마 전 수술을 하셨어요.
크다면 크고 별거 아니라면 또 별거 아닐 수술이었지만, 잘 끝났고 지금은 아주 건강하게 일상생활 중이십니다.
보호자로 지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밤에 열난다고 나와서 걸으라고 5분에 한 번씩 병실 찾아가서 다그쳤는데 내가 너무했나, 뭐 그런 것들 말이죠. (그치만 술후 조기보행 및 lung care는 회복에 큰 도움이 됩니다!!)
아빠도 본인의 건강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시니 저희 부녀에게 이 일은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대 코로나 시대, 모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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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이리
20/05/30 00:54
수정 아이콘
쾌유하셔서 다행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本田 仁美
20/05/30 00:55
수정 아이콘
부모님이 아프시면 참 마음이 힘들죠. 건강하신 동안 많이 표현하고 따뜻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20/05/30 01:21
수정 아이콘
잘 회복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글쓰신분도 아버님도 항상 건강하세요 :)
스터너
20/05/30 02:22
수정 아이콘
저도 오랜기간 아버지 간병중인데 이글 보고 눈물 터지네요.
아버님 회복하신거 축하드리고 저희 가족도 힘내겠습니다.
JazzPianist
20/05/30 07:40
수정 아이콘
쾌유하셔서 다행입니다~
Hammuzzi
20/05/30 08:01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20/05/30 08:14
수정 아이콘
아, 눌렸다. 눈물 버튼.
자몽쥬스님도 부모님도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자몽쥬스
20/05/30 08:17
수정 아이콘
이리님도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자몽쥬스
20/05/30 08:22
수정 아이콘
맞아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사실 조직검사 나오는 날까지 꽤 자주 밤잠을 설치게 되더라구요. ㅜㅜ
자몽쥬스
20/05/30 08:2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자몽쥬스
20/05/30 08:22
수정 아이콘
아버님의 쾌유를 빕니다!
자몽쥬스
20/05/30 08:23
수정 아이콘
네 정말요ㅜㅜ JazzPianist님께서도 늘 건강하세요!
자몽쥬스
20/05/30 08:23
수정 아이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몽쥬스
20/05/30 08:23
수정 아이콘
넵 유랑님도 늘 건강하세요!!
20/05/30 08:29
수정 아이콘
항상 따뜻함이 묻어있는 글 감사드립니다. 아버님도 글쓴 분도 항상 건강하시길 바래요
非黃錢
20/05/30 10:32
수정 아이콘
괜찮아지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건강하시길....
20/05/30 12:57
수정 아이콘
가족이 아프면 시야가 달라지죠.
저를 제외한 가족들이 크고 작은 수술을 매년 하고 있는터라 남일같지 않네요.
슬픈건 보호자도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무뎌지면서 의무적으로 하게 되더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Euthanasia
20/05/30 13:29
수정 아이콘
93.9 제가 입원했을 때도 자주 듣던 채널이네요.
자몽쥬스
20/05/31 06:1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Lavigne님도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자몽쥬스
20/05/31 06:13
수정 아이콘
非黃錢님도 늘 건강하시길 바래요!
자몽쥬스
20/05/31 06:16
수정 아이콘
맞아요 반복되면 확실히 무뎌지게 되죠. 그래도 보호자가 끝까지 버텨 줘야 환자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뎌지는 건 보호자를 더 오래 버틸 수 있게 도와 주는 방어기제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지치지 않으시길, 가족분들도 모두 쾌유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자몽쥬스
20/05/31 06:17
수정 아이콘
광고가 적은 편이고 대신 노래를 많이 틀어주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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