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당사자인 할머니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2015년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문제해결이 될 수 없다." 2018년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015년 한국과 일본 정부가 체결한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이같은 입장을 밝혔다.

진정한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합의를 파기하면 될 일. 그런데 강 장관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2015년 합의가 양국 간 공식합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를 감안해 정부는 동 합의와 관련해 일본 정부에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겠다."

합의 파기도 아닌 효력 유지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은 2018년 1월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이 화해치유재단 출연급으로 내놓은 10억엔은 일본이 수령을 거부하고, 한국은 집행을 거부하면서 뜬 돈이 됐다. 위안부 문제는 그후 양국 사이의 합의 불가 영역으로 남았다. 한국 측이 문제를 제기하면 일본은 위안부 합의로 해결된 일이라고 하고, 한국은 합의만으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반박하는 평행선만 긋고 있다.

당시 강 장관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했다. 피해자 의견 수렴을 강조하며 그들의 동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피해자'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위안부 할머니일까, 정의연일까.

이와 관련, 오태규 정부 위안부 합의 검토TF 위원장은 2017년 12월 27일 브리핑에서 "피해자 개념에 대해서는 각자 다를 것"이라며 "일반적으로 볼 때 피해자와 피해자 단체들을 같이 많이 말씀한다"고 했다. TF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두 면담했느냐는 질문엔 "할머니들을 전부 면담하겠다는 말은 안했다"면서 피해자 단체들과의 면담이 대부분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일본측이 내놓은 위로금을 수령한 위안부 피해자는 47명 중 36명, 생존 할머니 32명 중엔 24명이 위로금을 받았다. 피해자 단체들은 이같은 문제 해결 방식에 반발했다. 나눔의 집에 머물던 할머니들을 앞세워 매국적인 합의라고 공격했다.

나 역시 위안부 합의가 좋은 합의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과인지 유감표명인지 명확하지 않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과 '앞으로는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는 대못질 문구는 과연 이 합의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안부 합의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와 위안부 할머니들의 위로금 수령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모든 할머니들의 생각이 같을 수도 없다. 누군가는 지긋지긋한 과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핏줄이 조금이라도 편안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을 수 있다.

당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들이 한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어떻게든 문제를 매듭지어야 하지 않을까. 혹시 피해자 단체는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면 자신들의 밥줄이 끊기니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닐까.' 그리고 2년 새 위안부 할머니 5분이 돌아가셨다.

2020년 5월 이용수 할머니의 내부 고발과 같은 심경 고백으로 정의연의 행태가 드러났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세워 집회를 하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할머니들을 제대로 먹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젊은 시절 일본군 위안부로 고통받은 할머니들이 고령이 돼선 시민단체의 얼굴마담으로 또다시 위안부와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내부 고발 후 회계와 관련해 부당하고 부정한 행태가 드러났다. 옹호론자들은 아마추어의 실수라고 하지만, 기업이었다면 횡령·배임으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수준이었다. '몰랐다'는 핑계에 불과하다.

정의연의 비위가 드러날 때마다 강 장관에게 "도대체 누구와, 어떤 단체와 논의를 했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정부가 현재 정의연 사태와 관련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2년 전 정부 입장 발표가 이들과 접촉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당도 '꿀먹은 벙어리' 상태다. 외부에서 '윤미향을 손절하면 돼'라고 하지만 당 입장에선 또 쉬운 일이 아니다. 21대 국회 개원 전에 공천 실패를 또다시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미향은 비례대표 1번이다. '무조건 당선시키겠다'는 당의 의지를 담은 후보란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민주당에 필요한 것은 검찰 수사 결과만 기다리는 피동적 자세보다는 '결자해지'의 의지이다.

여당이 시간을 끌수록 고통을 당하는 건 위안부 할머니이다. 벌써 이용수 할머니를 겨냥해 '뒤에 누가 있다'는 식의 음해가 쏟아지고 있다. '배신자' 낙인도 마구 찍어댄다. 30년을 함께 해왔는데 아마추어로서 미숙한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등에 칼을 꽂는다는 식이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말 따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위안부 할머니가 고령이라며 고발을 믿을 수 없다는 평가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정한 모습으로 과거의 일을 하나하나 증언하는 할머니를 '거짓' 프레임으로 공격하는 것은 결국 일본이 좋아할 '위안부는 거짓말' 주장에 휘말릴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정치권엔 '보수는 부패해서 망하고, 진보는 분열해서 망한다'는 금언이 있다. 최근엔 이 말이 '보수든 진보든 부패해서 망한다'로 바뀌었다고 한다. 썩은 부위는 도려내야 한다. 상식이다.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세상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