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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5/16 21:25:59
Name 티타늄
Subject 청소년 운동의 한계 (수정됨)
요즘 사회단체에 대한 언급이 자게에 늘어서 급 기억나는 경험을 공유해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청소년이 완전히 주체가 된 청소년 단체가 매우 적습니다.

박근혜 탄핵 시즌에 광화문 시위를 통해 청소년 활동가들, 그리고 그 단체들을 접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중 한 단체는 기자단 활동의 취재 명목으로 갔다가 호기심에 가입도 해보았구요.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어른들 도움 없이 주체적으로 뭔가 기획하고 실행에 나선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이점 때문에 뉴스에서 청소년들도 탄핵 시위에 나섰다고 방송도 많이 했구요.

하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고 '청소년 사회운동'은 '성인 사회운동'과는 같은 수준의 온전한 자립에 오르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입니다.

1. 활동비 문제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의 특성상 청소년이 직접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에는 한계가 많습니다. 대학생도 알바 구하기 힘든데 편의점, 음식점 이런곳들은 20살 밑에는 안써줍니다. 가족이 아니라면요. 그림을 아주 잘 그리거나 하는 친구들은 1대1로 의뢰를 받아서 돈을 버는 경우는 소수 보았으나, 대체로 자기 온전한 수익이 없어서 후원없이는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얻기 어렵습니다.

2. 나이의 다양한 스펙트럼
청소년 단체의 나이 스펙트럼은 너무 다양합니다. 갓 초등학교 졸업한 학생부터 고3까지 있죠. 대학 20살 새내기랑 26살 헌내기도 정신적 성숙에서 차이가 나는데, 그 밑에 10대는 한살 한살 차이가 정신적 성숙도에 엄청난 갭이 있습니다. 같은 청소년 이라는 집단으로 묶었지만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3. 1인 카리스마에 대한 지나친 의존
저는 미성숙함에서 성숙함으로 가는 길목중 하나에 "이분법 사고방식 졸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인에 비해서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이분법 사고방식에서 졸업하지 못한 비율이 높습니다. 사실 당연한 일입니다. 모두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거구요. 그러나 이런 이분법 사고방식이 도덕적 우월감 + 나보다 나이 많은 멋진 누나/오빠 를 만나면 "우상화"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이런 종류의 "우상화된 리더"가 명확하게 존재하는 청소년 단체가 많은데, 이는 곧 맹목적 믿음으로 인한 소통의 부재, 명확한 시스템의 부재 리더 집단 후임의 부재 문제를 낳습니다.

4. 초대 카리스마형 리더의 청소년 이탈
이것이 저는 가장 본질적인 청소년 운동이 갖는 문제점이라고 보고있습니다. 3번 문제의 연장선인데, 사실 성인 단체중에도 1인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단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1인이 갖는 비전의 방향이 옳다면 단기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아요. 그런데, 청소년 단체는 다릅니다. 대체로 1인카리스마로 단체를 유지하는 단체장들은 적어도 고등학생이고, 보통 고2, 고3등 성인이 되기 직전의 나이가 많습니다. 이들은 몇년만 지나면 이제 더이상 청소년이 아니게됩니다. 그래서 단체를 후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대체로 1대보다 월등하게 실력이 떨어집니다.

보통 두번째 하는 사람이 처음과 비교되며 부족하다고 평가되는건 성인 단체도 일반적이긴 하나, 제 생각에는 청소년 단체는
1. 후임이 물려받기까지 초대가 할 수 있는 기간이 1-2년 밖에 안됨,
2. 경험이 부족하여 조직에서 시스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 (가장 지지받는 초대 리더가 시스템 구축을 안해놓는 경우)
3. 1대보다 수동적일 가능성이 높은 2대 리더 (대체로 1대 리더의 추종자이기 때문에)
와 같은 문제점 때문에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초대 리더가 성인 되고도 몇년간 더 조직에 있으면 되는 것 아니야? 라는 의문이요. 그렇게 되면 문제가 깔끔히 해결되죠.

바로 이 생각때문에 청소년 운동에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대체로 청소년 운동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단체들은 "청소년의 주체적인 운동"을 강조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는 지금 청소년 운동에서 가장 크게 쳐주는 단체인 "아xxx"가 성인의 후원을 너무 많이 받다보니, 청소년 운동인지, 성인이 청소년을 데리고 하는 프로그램인지 모르겠다! 하는 비판을 받아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래도 성인단체에서 후원금을 주기적으로 받게되면, 성인들이 원하는 청소년의 모습을 요구하게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돈주는 사람 눈치를 보게되니까요.

그런데, 이런 주체적인 운동을 강조했던 초대 리더가 성인이 되고도 단체에 남아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 자체로 명분을 잃게됩니다. 따라서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러다보니 위에 언급하던 이유로 단체가 망가지고, 결국 초대는 "고문" 이라는 직함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 후에는 뻔하게도, 2대 리더가 끌어가는 단체는, 초대 고문의 꼭두각시 단체가 되거나, 혹은 부족한 능력 때문에 급속히 동력을 잃고 무너지게되죠.



제가 소속했던 단체나, 관심깊게 지켜보던 단체가 몇년만에 이런 방식으로 없어지거나 크게 갈등을 겪는걸 보니 씁쓸하더라고요. 청소년 특유의 자의식 과잉이나 영웅심리도 물론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마음에서 시작한 단체들인데 말이죠.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괜찮은 방식은 처음 단체 회원들이 끝까지 좋은 뜻을 갖고, 청소년단체 -> 대학생 단체 -> 사회인 단체 순으로 서서히 나이를 따라 움직이는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청소년 단체로의 정체성은 잃어버리게 되겠지만요.

개인적인 경험에서 바탕한 글이고, 저는 청소년 사회운동 단체의 높은자리를 맡아본적이 없어서 실제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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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dblood
20/05/16 21:51
수정 아이콘
나이... 나이가 가장 큰 문제죠. 조직의 리더십 교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당장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술수에 가장 뛰어날 거대 원내정당들도 누가 대표 되냐로 갈라져 싸우고 박살나는 게 예사인데, 1세대 리더조차 미숙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단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결국 존속 가능한 길은 말씀하신 대로 초기 단체 구성원들이 대학생, 사회인 되어서까지 지속적으로 조직을 유지하며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 활동해나가는 것뿐인데, 초심 자체가 '청소년 인권'인 단체(아수나로 같은)은 이게 안 되죠. 다이나믹 코리아는 학교도 다이나믹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5년만 지나도 현장 디테일이 엄청나게 바뀌니까요. 0교시, 야자, 두발자유화, 일제고사 같은 게 십년 전에만 해도 굉장히 논쟁적인 이슈였지만 지금은 누가 신경이나 쓰나요? 시대가 바뀌면 시대적 요구=청소년 인권 중 새롭게 대두되는 부류도 바뀌는데, 청소년이 아니게 되어버린 청소년단체는 이걸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 같아요. 청소년 사회운동의 유통기한 자체가 그 짧은 몇 년뿐이고, 어떤 결과물을 낸다기보단 과정을 기억으로 남기는 게 종국적 목표일 수밖에 없는 거죠. 학생인권이 엄청나게 탄압받던 시절이라면 '우리가 교사로 다시 돌아와 바꿔보자' 뭐 이런 거창한 장기적 목표라도 둘 수 있겠습니다만, 2020년에 그만한 결기를 가지기엔 동력이 좀 약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티타늄
20/05/16 21:57
수정 아이콘
성인과 구분되는 청소년의 정체성인 '어린 나이'가 결국 활동의 발목을 잡는다는 점에서 참 아이러니하게 생각됩니다. 좋은 덧글 감사합니다.
CapitalismHO
20/05/17 00:40
수정 아이콘
대학생 조직도 사실 비슷한 경우를 많이 격죠. 보통 1년 2년차 조직이 가장 활발하고 창립맴버가 빠지면서 3년차에 위기가 옵니다. 거기서 버티면 장기 생존하는거고 못버티면 4년차 5년차쯤에는 결국 흐지부지 없어져 버리는 결말이...
범퍼카
20/05/17 08:0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큰머리흰곰
20/05/17 21:5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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