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12/28 23:21:39
Name 정국
Subject [11]당신의 조각들
벌써 두 개째다.

“엄마, 양념장에 머리카락이 너무 많다.”
“신경 쓴다고 썼는데 그리 많더나?”
나는 장갑을 벗고 양념장에서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분리해낸다.
행여나 머리카락이 더 빠질세라 머릿수건을 한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백 포기가량 되는 배추들은 삼등분 되어 절여진 채 소쿠리에 한가득 담겨있다.
김장 날이었다.

몇 시간 동안의 고된 노동을 달래줄 건 역시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가족 구성원 중 김장에 참여하지 않은 누군가의 성격은 도대체 아빠를 닮은 것인가 엄마를 닮은 것인가, 하는 짤막한 논쟁이 이어지고 우리는 각자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그래도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이 딱 하나 있다. 어릴 때 아빠 오토바이 앞자리에 탔는데 아빠가 나쁜 공기, 찬 공기 마시지 말라고 입을 조심스럽게 가려주더라.”
언니가 말했다.



나는 생각해본다. 내게 당신이 남겨놓고 간 추억의 조각들을.

나는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창틀에 매달린 어린 내 뒤통수를 떠올리곤 한다.
그때보다 더 어렸던 어느 날, 창밖에는 눈이 설레게 내리고 눈만큼이나 나를 떨리게 만드는 당신이 눈을 헤집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구두에 묻은 눈을 툭툭 털고, 종이봉투를 주욱 찢어 펼쳐낸다. 빵이다.
그 빵이 무슨 맛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서로 갈라서네 마네 고성이 오가고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두들겨 맞는 소리가 들리는 그 나날들 속에서 아빠가 가져온 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박혀있을 만큼 생경한 것이었다.

그날부터였을까. 겨울이 오면, 성탄절이 다가오면 창틀에 매달렸다. 오지도 않는 눈을 기다리며.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어두운 밤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만 눈에 한가득 담겼던 날들이 계속되었다.
불편하게 몸을 구부려야 창밖을 볼 수 있을 만큼 키가 자라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겨울이 오면 창밖을 들여다봤다.
성탄이 가까울 무렵의 어느 겨울이라는, 정확한 시기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진 기억을 붙든 채 오지도 않을 사람을 기다렸다.

당신이 남긴 추억의 조각들이 내겐 너무 단단해서, 그걸 깨트리는 덴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난 운동 갈 때마다 아빠 맨날 본다. 매일 피해 다니지.”
또 다른 언니가 말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들 모두 당신을 피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버림받았다면 지금은 우리가 당신을 버린 셈인가....



각자의 추억으로 치덕치덕 치댄 김장이 끝나고, 한참 뒤였던 올해 성탄절. 나는 버스를 타고 언니 집엘 갔다.

버스가 당신이 사는 곳을 지나쳐 간다.

이젠 남이 된 것처럼 무심하게 굴고 있지만 불현듯 떠올릴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 차창 너머로부터 나를 비추는 햇살과 함께, 물밀듯 밀려온다.


‘나는 북적거리는 언니 집으로 가는데... 당신의 성탄절은 어떤가요.’
당신이 느낄 고독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는 동안 평생 고독하고 아프길, 바랐던 순간들이 있었다.
우리만큼 고통스럽길, 바랐다.
그런 관심마저도 당신에겐 사치라며 그만두고만 숱한 시간들이 있었다.



원망이라는 양분을 먹고 자란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글을 쓰며 생각건대 나는 아직 당신이 남긴 조각들을 모두 깨트리지 못한 것 같다.
아직도 창밖의 눈을 기다리는 내가 정말 눈을 기다리는 것인지, 오지 않을 무언가를 기다리는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으므로....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9/12/28 23:59
수정 아이콘
가정사는 잘 모르면 언급하지 않는 게 예의라고 배웠으니, 그저 님과 님의 가족에게 행복한 미래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19/12/29 10:43
수정 아이콘
남일 같지 않네요. 저도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는데, 휴우..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108 역사교과서 손대나... 검정결과 발표, 총선 뒤로 돌연 연기 [23] 매번같은5817 24/03/08 5817 0
101107 개혁신당 이스포츠 토토 추진 공약 [26] 종말메이커4898 24/03/08 4898 0
101106 이코노미스트 glass ceiling index 부동의 꼴찌는? [53] 휵스5561 24/03/08 5561 2
101105 토리야마 아키라에게 후배들이 보내는 추도사 [22] 及時雨7188 24/03/08 7188 14
101103 드래곤볼, 닥터 슬럼프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 별세 [201] 及時雨10068 24/03/08 10068 9
101102 [정정] 박성재 법무장관 "이종섭, 공적 업무 감안해 출금 해제 논의" [125] 철판닭갈비8181 24/03/08 8181 0
101100 비트코인 - 집단적 공익과 개인적 이익이 충돌한다면? [13] lexial3410 24/03/08 3410 2
101099 의협차원에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라고 지시한 내부 폭로 글이 올라왔습니다 [52] 체크카드10052 24/03/08 10052 0
101098 [내일은 금요일]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떨어진다.(자작글) [5] 판을흔들어라1878 24/03/07 1878 3
101097 유튜브 알고리즘은 과연 나의 성향만 대변하는 것일까? [43] 깐부3450 24/03/07 3450 2
101096 의사 이야기 [34] 공기청정기6616 24/03/07 6616 4
101095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4) [8] 계층방정7323 24/03/07 7323 9
101094 대한민국 공공분야의 만악의 근원 - 민원 [167] VictoryFood10686 24/03/07 10686 0
101093 [중앙일보 사설] 기사제목 : 기어이 의사의 굴복을 원한다면.txt [381] 궤변13759 24/03/07 13759 0
101092 의대증원 대신 한국도 미국처럼 의료일원화 해야하지 않을까요? [12] 홍철5462 24/03/07 5462 0
101091 정우택 의원에 돈봉투 건넨 카페 사장 “안 돌려줘… 외압 있었다” 진실공방 [20] 사브리자나5187 24/03/07 5187 0
101090 성공팔이를 아십니까? [29] AW4632 24/03/07 4632 7
101089 사랑하고, 사랑해야할, 사랑받지 못하는 <가여운 것들> (약스포!) [3] aDayInTheLife1801 24/03/07 1801 3
101088 '해병대 수사외압 의혹' 피의자를 호주 대사로‥영전 또 영전 [56] lemma6828 24/03/06 6828 0
101087 종이 비행기 [3] 영혼1895 24/03/06 1895 6
101086 다양한 민생법안들 [10] 주말3588 24/03/06 3588 0
101085 (스포) 파묘: 괴력난신을 물리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 [33] 마스터충달4047 24/03/06 4047 12
101084 너무많은 의료파업관련 구설수 기사들 [21] 주말5563 24/03/06 5563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