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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12/09 23:22:52
Name 김보노
Subject 할아버지 생각나서 늘어놓는 할아버지 이야기

1.
군 복무시절 명절에 맞춰 휴가를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요즘 군 복무기간을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시더라구요. 22개월 했다고 하니 아버지는 3년을 했다며 웃으시더군요. 마침 할아버지가 옆에 계시니 호기심이 일어 여쭤봤습니다. 할아버지 땐 군생활 얼마나 했어요? 할아버지가 헛웃음을 치시더니 말씀하시더라구요

'전쟁중에 제대가 어딨냐. 집에 가라고 하면 가는거지'

어릴때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 찢어발기는 것들이 즐비한 아수라장을 할아버지가 겪었다는걸 깨달은건 그때였습니다.

2.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였습니다. 사촌형이 '니네 그거 알았어?'라며 얘길 꺼냈습니다.
때는 일제 강점기. 할아버지는 형을 대신에 일제에 징집이 되어 만주로 끌려갑니다. 그곳에서 벌목을 하는 노역을 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때를 노려 친구와 둘이서 탈영을 합니다. 땟목을 만들어 강을 탔고 자세한 과정은 모르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요. 만주에서 전라도까지의 긴 여정이었고, 할아버지가 아직 십대였던 때였습니다.
왜 저는 이 얘길 진즉 알지 못했을까요.

3.
그 후, 그리고 제가 태어나기 전의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밖에 알지 못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결혼을 하셨습니다. 180 정도의 장신이었던 할아버지는 꽤 능력있는 일꾼이었고 근처 채석장에서 돌을 나르며 벌이가 괜찮으셨다고 해요. 딸은 넷을 낳고나서 그리고 아들,저희 아버지를 얻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의 셋째 넷째 고모들은 어린 나이에 죽었다고 합니다. 원인은 잘 모르지만, 당시에는 드물지 않았던 일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후에 작은아버지 두분이 더 태어납니다.
이 당시 할아버지에 대해 잘 모르는 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어린시절 얘길 들으면서 단편적으로 나오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워맞춘것이라 그렇습니다.

4.
"내가 너 고등학교 들어가는 거 보고나 죽으려나 모르겠다."
아버지가 어릴적 할아버지가 종종 이런 말씀을하셨다고 해요. 그럴법한게 당시 마을에서 쉰이 넘으면 수염기르고 갓쓰고 다니는 마을 어르신이었다고 합니다. 환갑이면 장수라고 하던 시절이니까요.
아버지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큰고모가 결혼을 해서 첫손주를 보자 말씀이 바뀌셨다고 합니다.

"너 결혼하는거나 보고 죽으려나 모르겠다."

아버지는 전역을 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결혼합니다.

"손주나 보고 죽으려나 모르겠다"

제가 태어납니다. 장손이 태어나 할아버지가 정말 기뻐하시며 외손주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애정을 제게 쏟으셨다고해요.
(정작 저는 어릴때라 기억나지 않지만, 사촌 형 누나들이 그러더라구요. 서운할 정도였다구요.)
조그마한 손주를 무릎위에 올려두고 예뻐하시면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얘 국민학교 운동회 하는 건 보고 죽어야는데"

5.
할아버지는 제가 서른이 된 작년 12월 31일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8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암 말기 진단까지 받았지만 긴 시간 견뎌내셨죠.
정말로 견뎌냈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이후 할아버지는 거동도 제대로 못하고 말도 잃으셨거든요.
8년 동안 집 안에만 머물러 계섰어요. 매주 근처에 사는 자식이나 손주가 찾아왔지만, 한 주에 몇시간 뿐 그 외의 시간에는 적막한 방에 있거나 알아듣지도 못할 노래와 드라마가 나오는 TV를 보는거 뿐이셨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로 보낸 시간이 참 길었습니다. 쉰을 앞두고 당신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아버지에게 말했을 당시에, 지금까지 산 만큼 앞으로 더 삶이 이어질 걸 알았다면 할아버지는 어떻게 사셨을까요?



곧 할아버지 1주기라 할아버지에 대한 파편을 그럴듯하게 모을 생각도 없이 그냥 늘어놓았습니다. 때늦고 참 뻔한 후회지만, 할아버지의 얘길 많이 들어보지 못한게 종종 아쉽습니다. 할아버지가 그저 할아버지가 아니라 저와 다른 세상을 살았던 청년이기도 했다는걸 요즘에서야 느끼거든요.





+
올 해 초, 어머니와 한창 추워진 날씨 얘길 하던 중이었습니다.
"어머니, 아들이 패딩하나 사줄까?"
"됐어. 엄마도 돈 있어"
"왠 돈?"
"응, 할아버지가 줬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가 며칠 전,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병원으로 가시던 날 할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큰 방에 가시더니 한참 뒤에 만원짜리 묶음을 몇개 가지고 나오셨데요. 그걸 할머니에게 주시더니 큰며느리 주라고 하셨다더군요. 장례식이 끝나고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전해주셨다고 해요.
"그런데 지폐묶음 보면 종이 끈으로 묶잖아, 그게 우체국이더라구. 그런데 할아버지가 몸도 불편하신데 언제 우체국을 가셨겠어. 엄마가 알기로 마지막으로 가신게 5년도 더 되었거든? 그 사이에 위독하셔서 병원 입원하신 적도 몇 번이나 있었는데 계속 간직하고 계시다가 마지막으로 집 떠나기 전에 주시다니 마음을 먹으셨던 건지 아니면 알고 계셨던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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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19/12/10 00:03
수정 아이콘
전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가진 분들이 너무 부러워요.
친할어버지 외할아버지 두분다 부모님이 어릴적에 돌아가셨거든요.
두분 다 탄광에서 일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어렸을적 할머니 손에 자랐고 지금 유일하게 살아계신 외할머니께 많은 사랑 받고있지만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주는 사랑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게 항상 마음속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지니팅커벨여행
19/12/10 09:00
수정 아이콘
저도 할아버지라는 존재를 잘 모릅니다.
아버지 태어나시기 전에 사라지셨거든요.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같이 산 기간의 몇십배를 더 살고 계시지만 아직도 할아버지가 그리우신 모양입니다.
레드로키
19/12/10 11:18
수정 아이콘
취업하고 일 배우느라 정신없던 시절, 할아버지댁만 가면 할아버지는 본인 아버님 욕, 노무현 욕, 군부독재에 뺏긴 일산땅 얘기를 마치 녹음이라도 된거처럼 반복하시곤 하셨죠. 그 얘기가 너무 질려서 할어버지댁 갈일이 있을때마다 피하곤 했습니다. 할아버지 장례식 후에 패딩을 하나 받았는데, 저를 준다고 패딩을 사셔서 저보다 10cm는 큰 사촌형을 불러서 입혀보셨다고 하더라구요. 삼일장 끝나고 집와서 패딩을 입어보는데 롱패딩도 아닌데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더군요.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애물단지를 하나 주고 가셨구나 싶어서 너털 웃음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장롱에 박혀있는데 계속 찾아뵈었으면 입고 다닐만 한걸 받았겠죠?
고분자
19/12/10 12:09
수정 아이콘
좋은 추억 간직하고계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넌나의썬샤인
19/12/10 21:06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보노님의 글을 보니 저도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각이 나네요. 제가 대학생때 두분 다 돌아가셨는데 더 친해질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한게 못내 아쉽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이해하게 되서 그런가봐요. 저도 제 기억엔 치매에 걸리셔서 늘 잘 잊으시고 까르르 웃으시던 할머니가, 젊은 시절엔 일본어도 잘하셨단 얘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묘하고 궁금했었어요. 이렇게 글로나마 할아버지와의 기억을 남겨두고 살다가 잊어버릴때쯤 다시 읽는 것도 좋겠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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