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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5/04 04:25:58
Name RookieKid
Subject [일반] [8]그녀도 눈이 부실까 (수정됨)
https://pgr21.com/?b=8&n=49998
>> 4년 전에 쓴 글과 살짝 이어집니다.



취업을 뽀갰습니다.
집에서 좀 멀긴 하지만 요즘 취업이 그렇게 힘들다는데..
취업준비 4개월만에 대기업은 아니어도 나름 건강한 회사에 합격했습니다.

5월 1일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왁자지껄 생일잔치는 없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조촐한 생일 아침상으로 축하를 받았습니다.
가까이 사는 고모, 고모부도 오셨습니다.

고모부는 우리 친할머니와 사이가 좋으십니다.
할머니 방에 들어가시니 곧 사위 왔다며 일어나 반기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건너편 제 방까지 들립니다.
대화도 들립니다.

할머니 "오늘 무슨 날이가? 아침부터 이렇게 오고."
고모부 "RookieKid 보러 왔어요."
할머니 "RookieKid? 오늘 RookieKid 생일이가?"
고모부 "네, 취업해서 축하도 해주려고 왔어요."
할머니 "취업했어? 회사갔어?"
고모부 "아니 내일부터 가지."
할머니 "근데 왜 RookieKid가 없어? 어디 나갔어?"
고모부 "??? 아니에요. 방에 있어요."

10초 후

할머니 "오늘 무슨 날이가?"
고모부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 오늘 노동절."
할머니 "아침부터 왔길래.."
고모부 "RookieKid 생일이라 RookieKid 보러 왔다니까는."
할머니 "오늘 RookieKid 생일이가?"
고모부 "??네.."
할머니 "근데 왜 RookieKid가 없어? 어디 나갔어?"
고모부 "???? 저기 방에 있다니까는? 취직해서 내일부터 출근한다구요."
할머니 "취업했어? 회사갔어?"
고모부 "????"

10초 후
할머니 "근데 오늘 무슨 날이가? 느이 둘이 아침부터 이렇게 오고."

네.
저희 할머니도 알츠하이머를 앓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 병원이나 정확한 진단을 받은 건 아니지만
몇년 전부터 가스불 켜는 법을 잊거나 분명히 말해둔 내용도 '깜빡'하시더니
이제는 정상적인 대화가 오고 가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아직 사람을 못 알아보시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할머니한테서 잊혀질까.. 무섭습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27년을 같이 산 할머니.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나와 형을 다 길러낸 할머니.
옛날 이야기 해주면 머릿속에 흑백사진을 촥 펼쳐주었던 할머니.
90살이 넘어도 입맛이 없다면서 라면과 피자를 찾던 할머니.
식사도 잘하시고 항상 건강해 100살은 거뜬히 살거라고 생각했던 할머니.

어느날 가스불 켜는 법을 몰라 라면을 못 끓여먹었다며 내게 오신 할머니.
어느새 기저귀가 필요해지신 할머니.
흔들리는 앞니가 불편해 한 손으로 잡고 TV를 보시는 할머니.
요즘에는 잘하던 식사조차 하루 한 끼도 안 드셔서 온 가족을 걱정에 빠뜨리는 할머니.

오늘 제가 출근한 이후에 어머니가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할머니가 계속 저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 생일날 할머니가 고모부에게 하셨던 5번의 똑같은 말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취업했어? 회사갔어? 취업이 힘들어서 계속 집에만 있던데 잘 되었다."

이 글이 픽션이었다면 좋겠습니다.


== 끝 ==

할머니 치매가 심해진 게 꿈에 나와서 새벽에 일어나 주저리주저리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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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4 07:05
수정 아이콘
알츠하이머란 참 슬픈 병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을 앗아가거든요. 단순한 기억 뿐만아니라 주변인과의 관계까지 파괴해 버립니다.
이미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저의 할머니께서도 치매를 앓으셨습니다. 몇년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죠. 그치만 전 할머니 장례식때 그리 슬프지만은 않았습니다...... 알츠하이머로 인한 할머니의 고통보다 할머니를 모시며 받았던 우리 가족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졌으니까요. 인간이란 참으로 영악하죠. 어릴땐 그렇게 할머니를 따라 다녔었는데.

마지막에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시기 전까진 계속 집에서 할머니를 모셨었습니다. 고등학생이던 저는 그때, 말로만 듣던 고부갈등이 우리집에도 존재했단걸 알게되었죠.
할머니께선 1시간, 2시간마다 밥을 달라하시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굶겨죽이려 한다'셨습니다. 장식장 바닥, 기울기를 맞추기위해 끼워놓은 화투장을 보시고는 '왜 화투장이 거기 있느냐'며 '남의 집구석 말아먹을 년'이라고도 하셨죠. 제가 집에 없을 때, 어머니 앞에 칼을 들고 나타난 적도 있으셨다고.

그제야 어머니한테서 과거의 얘길 들을 수 있었죠. 제가 어려서, 사춘기여서 차마 해 줄 수 없었던 고부간의 갈등. 그것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점점 할머니를 모시는게 힘겨워지면서 제가 생각하던 유복하고 단란하던 우리집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동네에 효자로 유명하던 아버지가 할머니께 화내는걸 처음 봤습니다. 누나가 할머니 흉보는걸 듣고 전 거기에 동조했죠.

알츠하이머란 병은, 그냥 할머니의 기억만을 가져간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할머니께 가졌던 좋은 감정과 기억까지도 뜯어갔습니다.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뒤로, 집에 소동은 줄었지만 그 감정이 나아지진 않았죠. 병원엘 가서 할머니께 안부를 드릴때에도 차마 '오래오래 사세요'란 말이 입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습니다. 네. 전 나쁜놈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지 십수년이 지났습니다. 이젠 그때의 할머니처럼 아버지의 머리가 하얗게 세어갑니다. 그걸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치매를 앓으시면 난 어떻게 하지?'
꼭 할머니가 그랬을 때 처럼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원망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미워하고 욕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제 인간성의 바닥을 볼 것 같아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요즘 저는 아버지께 안부를 여쭐 때, 세배를 드릴 때, 이렇게 말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메모네이드
19/05/04 09:15
수정 아이콘
;_; 이런 아침부터 안타까운 글을 봤네요.
정말 이 글이 픽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취업 축하드려요. 할머님도 많이 기뻐하실 거예요.
겜숭댕댕이
19/05/04 14:26
수정 아이콘
너무 마음이 아픈글입니다. 부디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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