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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1/13 12:48:29
Name 마치강물처럼
Subject 아 참 또 등 돌리고 누웠네
'아 참 또 등 돌리고 누웠네. 이럴 때 마다 당신이 참 낯설게 느껴져'
'......'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었어? 힘들었구나. 등 쓰다듬어 줘?'
말없이 윗옷을 걷어 올리며 등을 내미는 나를 보며 아내는 싱긋 웃는다.
'엄마 손은 약손도 아니고 왜 힘들고 피곤하면 맨날 나보고 등 쓰다듬어 달라고 그래?'
후... 그렇구나 난 아내에게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지.
이유도 묻지 않고 그동안 마흔 넘은 남자의 아이 같은 응석을 받아 준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스물아홉에 청상이 된 우리 할매는 무던히도 힘든 삶을 살아오셨다.
일찍 죽은 남편, 남겨진 삼 남매, 초라한 기찻길 옆 판잣집 한 채
꽃다운 나이에 남겨진 애 셋을 키우느라 곱던 손은 굽어지고 터지고...
막내딸은 17살이 되던 해에 결핵으로 세상을 버렸다.
약이라도 한 번 먹여보고자 찾아갔던 큰 집에선 문전박대 당하고, 박꽃같이 희던 막내딸은 남편을 흘려보냈던 강물에 같이 떠나보냈다.
큰아들은 한 번도 가르친 적 없었던 음악에 소질이 있어, 음대에 갔지만 찌들어가는 살림에 가당키나 하냐며 군대를 제대하고선 학교를
중퇴했다.
삶의 무게가 힘들었던 아들이 남들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결혼한다고 예쁜 처녀를 데리고 왔을 때, 할매는 결혼하면 여행 다녀 오라고
그 처녀의 손에 7만5천원을 꼭 쥐여주었다.
얼굴보다 마음이 더 예뻤던 그 처녀는 결혼을 하고 며느리가 되고, 그 돈 7만5천원은 아들과 함께 차린 구멍가게에 첫 물건으로 진열장에
채워졌다.




남편이 죽은 후 남들 앞에서 한 번도 울지 않았던 할매는 세 번을 더 울었다.
착하고 예쁜 며느리가 결혼한 지 3년 만에 손자를 낳았을 때, 그 손자가 9살이 되던 해에 남의 셋방살이에서 벗어나 2층 양옥집을 샀을 때
마지막으로 둘째 딸이 마흔다섯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버렸을 때...




할매는 어릴 때부터 심약했던 손자가 눈물을 흘릴 때 마다 꼭 끌어안고 달래주었다.
그럴 때면 손자는 더 응석을 부리듯 할매에게서 등 돌리고 누워 꺽꺽 울어댔고, 할매는 그런 손자의 등에 손을 쓰윽 넣고선 한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그 굽고 거칠거칠한 손으로 등을 쓰다듬어 주면 손자는 어느샌가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곤 했다.




할매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 딱 한 달을 누워계셨다.
점차 말수가 사라지고, 사람을 못 알아보셨다.
하루는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할매방에 들어가 할매 옆에 누워있다 잠이 들었다.
잠결에 무언가 따스하고 편안한 느낌에 눈을 떠보니 할매가 내 등을 쓰다듬어 주고 계셨고, 눈을 뜬 나를 보고 힘겨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애미 좀 들오라 해라'
내가 엄마를 부르러 갔을 때, 엄마는 이미 마지막을 예감 하셨던 듯 울고 계셨다.
남편과 두 딸을 먼저 보내고, 35년을 옆에서 친딸보다 더 딸같이 당신 곁에 있던 며느리의 손을 잡고 할매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셨다.




말없이 내 등을 쓰다듬어 주는 아내의 손길을 느끼며, 할매의 그 굽고 거칠거칠한 손이, 한없이 내 등을 쓰다듬어 주던 그 손이 너무 그립다.
'할매요. 거기서 남편이랑 딸들이랑 행복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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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13 12:57
수정 아이콘
나라가 좀 잠잠해지면 이런 글들을 많이, 또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예전의 피지알이 되겠지요...좋은 글 감사합니다.
종이사진
17/01/13 13:07
수정 아이콘
뭐라 말할 수 없는 먹먹함이 느껴집니다.

잘 읽었어요.
17/01/13 13:18
수정 아이콘
제 아이들도 할매 손에 크고 있는데 감정이입되었는지 먹먹하네요.
해피팡팡
17/01/13 13:25
수정 아이콘
저도 할머니손에 크고 자라서 참 감정이입이 되네요.. 파킨슨병으로 고생하셔서 사람을 못알아보셨는데 응급실에서도 유독 저만 알아보시더라구요. 글 잘 읽었습니다.
포도씨
17/01/13 13:29
수정 아이콘
아....점심먹고와서 월급도둑질하고 있는데 눈물나게 만드시네요. 일하는 척 하다 웃음터졌을 때에는 그래도 이런 저런 변명이 가능한데 눈물이 날때는 무슨 변명을 해야하나요? ㅠㅜ
17/01/13 13:3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저녁에 전화한번 드려야겠네요
heatherangel
17/01/13 13:4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고맙습니다.
17/01/13 13:56
수정 아이콘
박꽃을 실제로 본적이 없어서 느낌이 어떨까 싶어요.
잘읽었습니다.
아유아유
17/01/13 14:26
수정 아이콘
예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나네요. ㅠㅠ
그리움 그 뒤
17/01/13 14:32
수정 아이콘
증조 할머니와 할머니가 보고 싶네요.
어릴적 앓은 병때문에 한쪽 발을 저는 증조할머니.. 그럼에도 매일 증손자를 등에 업고 다니는걸 좋아하시던 증조할머니
본인의 막내딸보다 두살 어린 손자를 더 아껴주시던 할머니
보고 싶어요...
치열하게
17/01/13 14:32
수정 아이콘
마지막까지 아껴주시던 손자 걱정을 하셨겠지만 하늘에서 손주며느리 보시면서 마음 놓으셨을거 같네요.
호느님
17/01/13 14:48
수정 아이콘
가슴 먹먹해지는 글이네요..
17/01/13 14:5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17/01/13 16:29
수정 아이콘
피지알은 역시 멋진곳이군요
Quantum21
17/01/13 17:12
수정 아이콘
돌아가실때가 가까워 오실때, 아들 형제들조차 못알아 보셨는데, 큰손주라고 저만은 알아보셨죠.
Eternity
17/01/13 18:38
수정 아이콘
백석의 <여승>이라는 시가 떠오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진산월(陳山月)
17/01/13 22:12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뭐에 홀렸는지 '엄마'에게 전화도 못드렸는데 지금 해야겠네요. ㅠㅠ
루크레티아
17/01/13 23:10
수정 아이콘
진짜 교과서에 실려도 아깝지 않은 명문이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메피스토
17/01/14 17:59
수정 아이콘
비슷한 경험을 해서 보고 울뻔했네요..
저희 할머니는 뇌일혈 맞으시고 6개월 병원신세 후 퇴원하시고 한 두어 달 치매 앓으시면서 맨날 어디를 간다고 사람들 괴롭히시고 가족들도 잘 못 알아 보시다가 갑자기 며칠 잠만 주무시더니
마지막으로 정신이 있으셨을 때, 옷 갈아입혀 드리는데 귀에 대고 아주 작게 겨우 고마워 라고 하시고 주무시다 다다음날 가셨습니다.
아직도 팔에 안기셔서 힘없이 축 늘어지셔신 채로 입만 겨우 움직이시며 눈도 못뜨시고
고마워라고 하신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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