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10/21 13:24:39
Name 흑마법사
Subject 너와 내가 우리였을 때


벌써 1년 전 이야기네. 너와 내가 우리였을 때의 이야기가.

오늘은 퇴근길이 꽉 막혔어. 평소에 30분이면 오는 거리인데 오늘따라 조금 늦게 퇴근한 탓일까 1시간이 다 되서야 집에 도착해서 지친 몸을 침대에 맡길 수 있었어. 1년 전 이맘때 너는 막히는 퇴근길을 걱정하여 항상 내 퇴근시간에 맞춰서 전화해줬지. 그때는 오히려 퇴근길에 신호등이 고장나서 집에 가는 길이 더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집에 일찍 가서 쉬는 것보다 너와 통화하는 그 시간이면 저절로 하루의 피로가 풀렸거든.

하루가 길고 잠이 부족해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수고했고 고생했다는 너의 애교섞인 목소리를 들을 때면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너와 나는 우리였어. 퇴근 후 집에 오면 자기 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즐기던 시간은 어느새 너와의 카톡, 너와의 통화, 너와의 시간으로 채워졌음에 놀라고 감사함에 혼자 기뻐서 울기도 했지.


1년 전 이맘때 너와 나는 우리였어.


너의 전화로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아침공기를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어. 아르바이트에 학교에 나보다도 바쁠 너였지만 너보다 나를 더 챙기는 모습에 너를 사랑할 수 있었어. 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해줬으니까. 하루에도 어떻게 하면 너에게, 나 자신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만들고 너에게 좋은 말만, 좋은 것만 해주고 싶게 만들었으니까.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기 힘들면 나한테 시집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건 진심이었어. 나는 너와 함께 우리로서 많은걸 하고 싶었다. 우리의 시간을 기대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너와 나는 우리가 아니라 너와 내가 되있더라.

작은 변화에 민감하고 예민하고 신경쓰게 되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점점 너와 내가 되버리고 말았어. 나는 회사에, 너는 아르바이트와 학교 때문에 서로에게 점점 소홀해졌어. 내가 너에게 소홀해진게 더 맞는 말이겠지. 어느새 너와의 시간보다 나만의 시간이 늘었고, 너와의 시간보다 친구와의 시간이 늘었지. 회사에서 혹시나 네가 나의 카톡을 기다릴까봐 업무중에 몰래몰래 카톡과 통화를 하고, 점심시간에 밥을 먹기보다 너와 통화하느라 쫄쫄 굶으면서 일하던 나의 모습도 점차 줄었고, 퇴근길에 꼬박꼬박 전화해주면서 업무중에 연락할 때면 팀장에게 혼나지 않겠냐고 걱정해주면서도 그래도 나랑 계속 카톡하자던 너의 모습도 없었어. 처음에는 서로 바쁘니까 이해하자, 곧 만날테니까 조금만 버티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던 것도 잠깐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면서 멀어졌고 우리는 점점 우리가 아닌 너와 나의 모습에 익숙해져갔지.


언제부턴가 나의 하루 사이사이에 너는 점점 없어졌고, 나의 퇴근길에 들리던 목소리는 너의 목소리가 아닌 어느 가수의 노래소리가 되어버렸어. 그러다 갑자기 날아온 이별통보. 아니, 갑자기가 아니었겠지. 너는 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시간인 듯 차분하게 나에게 그만하자고 했어. 모든걸. 더이상 우리가 아닌 너와 나로 돌아가자고. 우리는 더이상 우리일 수 없게 되버린 것 같다던 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나도 결국 내가 어리석다고 혀를 끌끌 차고 자업자득이라고 비웃던 남자들과 다를게 없더라.


작년 이맘 때가 참 그리워. 1달 전, 너의 목소리가 너무 듣고싶어서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지. 몇분 후에 너에게 전화가 왔지만 전화를 건 이유는 너도 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번호를 목록과 너의 머리 속에서 지웠기 때문에, 정말 단순히 모르는 번호였기 때문에 전화를 건거였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전화했다는 나의 말에 넌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연락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어.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나는 너에게 말할 수 없고 너는 나의 말을 들을 수 없으니 가슴에 묻으려 한다.


꽤 오랜 시간이 무색하게도 나는 괜찮은게 아니었더라. 너와의 카톡은 지금도 대화목록 가장 아래에 마음의 먼지만 가득한채 쌓여있고, 너의 전화번호는 문신처럼 핸드폰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사실은 지우고 싶지 않은거겠지. 헤어지고 이사람 저사람 소개도 받아보고 나 좋다는 사람과 데이트도 하고 연락도 해봤는데 네가 즐겨썼던 이모티콘에, 너와 비슷한 말투와 행동을 보면 모든게 무너지더라. 너는 여기에 없는데 너는 아직도 여기에 있다. 너와 닮은 사람이 지나갈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지만 이내 네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제 지워보려고. 너와의 카톡도, 사진도, 전화번호도 지우고, 너의 얼굴도, 목소리도, 향기도, 모두 나에게서 지우려고 해. 네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하려고 노력해볼게. 너와 닮은 사람이 아닌 너를 사랑했을 때의 내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해볼게. 너는 나에게 올 수 없고, 나는 너에게 갈 수 없는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너와 나는 더이상 우리가 될 수 없다는 너의 말의 의미를 왜 1년이 다 되서야 알았을까. 알고싶지 않았던걸까. 나도 모르겠어. 그래도 마음 한켠은 너를 기다리겠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을거라는 사실도 너무도 잘 알아. 그래도 너와 내가 우리였던 시간을 잊지는 않을게. 남들이 보기엔 짧을 수 있는 고작 몇달의 시간이 나에겐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나의 우리가 되어줘서 너무도 고맙고 사랑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언어물리
16/10/21 17:58
수정 아이콘
저는 누구를 사귀어보지는 못했지만 짝사랑은 한 적이 있는데,
그마저도 만날 계기가 시간 지나 사라지니 슬프더군요.
그녀의 전화번호라든지 등등을 지우는데 감정이 참...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접기 힘들더군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036 아이돌 덕질 시작부터 월드투어 관람까지 - 1편 [4] 하카세2131 24/02/26 2131 5
101035 대통령실 "4월 총선 이후 여가부 폐지를 예정대로 추진" [133] 주말12130 24/02/26 12130 0
101034 갤럭시 S22 울트라에서 S23 FE로 넘어왔습니다. [10] 뜨거운눈물4588 24/02/26 4588 5
101032 마지막 설산 등반이 될거 같은 2월 25일 계룡산 [20] 영혼의공원4377 24/02/26 4377 10
101031 해방후 적정 의사 수 논쟁 [10] 경계인5314 24/02/26 5314 0
101030 메가박스.조용히 팝콘 가격 인상 [26] SAS Tony Parker 6612 24/02/26 6612 2
101029 이재명 "의대 정원 증원 적정 규모는 400~500명 선" [84] 홍철13122 24/02/25 13122 0
101028 진상의사 이야기 [1편] [63] 김승남5409 24/02/25 5409 33
101027 필수의료'라서' 후려쳐지는것 [53] 삼성시스템에어컨8458 24/02/25 8458 0
101025 그래서 필수의료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151] 11cm7877 24/02/25 7877 0
101024 소위 기득권 의사가 느끼는 소감 [102] Goodspeed10846 24/02/25 10846 0
101023 의료소송 폭증하고 있을까? [116] 맥스훼인8756 24/02/25 8756 42
101022 [팝송] 어셔 새 앨범 "COMING HOME" 김치찌개1458 24/02/25 1458 1
101021 아사히 “미-일 반도체 회사 합병시키려 윤 정부가 SK 압박” [53] 빼사스8961 24/02/25 8961 0
101020 의료유인수요는 진짜 존재하는가 (10년간 총의료비를 기준으로) [14] VictoryFood3646 24/02/24 3646 0
101019 의대 증원에 관한 생각입니다. [38] 푸끆이4888 24/02/24 4888 44
101018 팝 유얼 옹동! 비비지의 '매니악' 커버 댄스를 촬영했습니다. [12] 메존일각2412 24/02/24 2412 11
101017 우리는 왜 의사에게 공감하지 못하는가 [331] 멜로12944 24/02/24 12944 53
101016 <파묘> -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풀스포) [54] aDayInTheLife4434 24/02/24 4434 6
101015 단식 전문가가 본 이재명의 단식과 정치력 상승 [135] 대추나무8079 24/02/24 8079 0
101014 “이런 사정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딨냐” [136] lexicon9781 24/02/19 9781 51
101013 '파묘' 후기 스포 별로 없음 [9] Zelazny3777 24/02/24 3777 0
101012 김건희 여사 새로운 선물 몰카 공개 예고 [71] 체크카드12320 24/02/23 12320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