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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gr21.com/?b=8&n=66854 바르바로사 작전 (1) - 작전 수립 과정
https://pgr21.com/?b=8&n=66906 바르바로사 작전 (2) - 북부 집단군 (1)
https://pgr21.com/?b=8&n=66951 바르바로사 작전 (3) - 북부 집단군 (2)
Previously on Barbarossa...
시기상으로는 Previously가 아니긴 합니다만... 여튼 북부 집단군은 그런대로 순조로운 진격을 하고 있었는데, 라트비아를 지나 에스토니아에 접근하자 거의 끊겨버린 항공지원과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서 무려 한 달 반 가량을 에스토니아에 발이 묶인 채 극심한 소모전을 치러야 했습니다. 7월 9일에 러시아의 프스코프(Pskov, Псков)를 점령하면서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을 닦아놓았지만 그대로 진격하다가는 에스토니아 방면에서 밀고들어올 소련군에게 후방을 위협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스토니아의 소련군 일대를 문자 그대로 wipeout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고, 이 와중에 병력을 긁어모은 소련군의 반격이 크리티컬로 터지기까지 하면서 탈린 공방전을 8월에 들어가서야 시작하는 판이 되었고, 그나마도 소련군의 저항이 격렬했기에 탈린을 점령하고 레닌그라드로 진격했을 때는 이미 9월이 다 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전 글에서는 빼먹은 이야기지만) 히틀러는 시가전에서 입을 전차의 손실이 어마어마하리라고 예상해서 함부로 시가전에 돌입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고(뒷날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대혈투를 생각해 볼 때 히틀러의 이 조치는 충분히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시민들을 살려둘 필요는 없다 하여 레닌그라드를 아예 굶겨죽이는 작전이 입안, 실행됩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영웅적인 저항과 처절한 버티기로 레닌그라드가 독일군 손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죠.
작전개시 당일의 전투서열 - 독일군
남부 집단군 및 그와 대치하던 남서부 전선군의 바르바로사 작전개시 당일 전투 서열입니다. 아, 이게 적다 보니 이 바닥을 파 본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만한 이름들이 상당히 많고, 또 규모가 만만치 않아서, 구분선을 좀 넣었음을 알립니다.
독일군 남부 집단군(Heeresgruppe Süd) : 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참모장
게오르그 폰 조덴슈테른 대장(3성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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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갑집단군 : 사령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상급대장
제14차량화군단 : 사령관 구스타브 안톤 폰 비터스하임 보병대장
SS사단 비킹(Wiking) : 사령관
펠릭스 슈타이너 SS중장. 영화 〈몰락〉의 패러디 장면에서 슈타이너 어쩌구 할 때의 그 사람.
제9기갑사단
제16기갑사단 : 사령관
한스-발렌틴 후베 소장
제3차량화군단 : 사령관 에버하르트 폰 막켄젠 기병대장. 1차대전 당시 동부 전선에서 활약한 아우구스트 폰 막켄젠의 아들입니다.
예하 1개 기갑사단, 2개 보병사단
제29군단 : 예하 2개 보병사단
제48차량화군단 : 사령관 베르너 켐프 기갑대장
제11기갑사단 : 사령관 루드비히 크뤼벨 소장
이외 예하 2개 보병사단
직속 예비 1개 기갑사단, 2개 보병사단
직속 예비 SS경호친위대사단 아돌프 히틀러(일명 LSSAH) : 사령관
제프 디트리히 SS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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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야전군 :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
제17군단 : 사령관 베르너 키에니츠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제44군단 : 사령관 프리츠 코흐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직속 예비 제55군단, 1개 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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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야전군 : 사령관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보병대장
제4군단 : 사령관 빅토르 폰 슈베들러 보병대장
예하 5개 보병사단
제49산악군단 : 사령관 루드비히 퀴블러 산악대장
제1산악사단 : 사령관 후베르트 란츠
이외 예하 2개 보병사단
제52군단 : 예하 1개 경보병사단
직속 예비 2개 경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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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야전군 : 사령관 오이겐 폰 쇼베르트 상급대장
루마니아 파견군
1개 보병사단(독일군 소속)
루마니아 산악군단
예하 3개 산악여단, 1개 기병여단, 1개 보병사단(루마니아군 소속)
제11군단 : 사령관 요아힘 폰 코르츠플라이슈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독일군 소속), 2개 보병사단(루마니아군 소속), 1개 기병여단(루마니아군 소속)
제30군단 : 사령관 오이겐 오트 중장
예하 1개 보병사단(독일군 소속), 1개 보병사단(루마니아군 소속), 1개 기병여단(루마니아군 소속)
제54군단 : 사령관 에릭 한센 기병대장
제50보병사단 : 사령관
카를-아돌프 홀리트 중장
이외 예하 1개 보병사단
직속 예비 1개 보병사단, 1개 기병군단(루마니아군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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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군 직속 예비
제34특수군단
예하 1개 산악사단, 3개 보병사단
제51군단 : 사령관 한스 볼프강 라인하르트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직속 예비 1개 경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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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집단군에 배속된 전차사단 5개 + 차량화사단 2개 (cf. 북부 집단군 전차사단 3개 + 차량화사단 2개)
남부 집단군에 배속된 전차 726대 (북부 집단군 615대)
3호 전차 355대 (북부 집단군 238대)
4호 전차 100대 (북부 집단군 80대)
남부 집단군에 배속된 보병사단 30개 + 경보병사단 4개 (북부 집단군 보병사단 21개) - 루마니아 군은 제외된 병력.
담당하는 범위가 넓기도 해서 그렇겠습니다만 명백히 남부 집단군은 북부 집단군보다 병력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여기에 헝가리군은 명단에서 빠져 있는데... 작전 개시 당일에는 루마니아고 독일이고 헝가리가 바르바로사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 보았습니다만, 친독파가 장악하던 헝가리의 군부가 바르바로사 작전에 헝가리가 참여하는 것을 강력하게 밀어붙였죠. 그래서 작전 개시 전날에 헝가리 외교부는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했고, 6월 26일에 소련군 표식이 박힌 항공기가 헝가리령의 카사(Kassa, 現 슬로바키아의 코시체, Kosice)와 문카치(Munkács, 現 우크라이나의 무카체베, Мукачеве)를 폭격하자 즉각 소련을 상대로 선전 포고를 단행합니다. 그리고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 p. 80의 지도 3에 따르면 이 헝가리군이 진군한 것은 독일 제17야전군과 루마니아 제3군의 사이였다는군요.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루마니아군은 소련이라면 아주 이를 득득 갈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40년 7월에 소련이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넣어서 삥... 아니, 현 몰도바 일대인 베사라비야 및 현 우크라이나 서북부의 일부인 부코비나를 할양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이죠. 그러니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 루마니아가 아주 이를 갈며 진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군의 수준은 독일군이나 소련군에 비해서는 좀 떨어졌을지언정.
이야기가 약간 엇나가는 느낌은 있습니다만, 굵은 글씨로 처리한 인물들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어디에서 등장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써 독일군의 배치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 말이 필요없는 독일군 최고의 원로 중 한 명. 프랑스 전역에서 주공인 A집단군의 사령관을 맡음. 대서양 방면의 방어도 담당.
게오르그 폰 조덴슈테른 - 룬트슈테트의 참모장. 폰 만슈타인이 참모장에서 잘리고 후방의 제38사단으로 좌천되었을 때에 참모장을 맡은 인물. 《전격전의 전설》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이름난 신중파.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프랑스 전역에서 기갑집단군의 군단장을 맡은 인물. 본래 병과는 기병과. 발칸 반도에 독일군이 진격할 때 사령관을 맡은 바 있습니다. 이후 그의 기갑집단군은 클라이스트 기갑집단군(Panzergruppe Kleist)이라 하여 꽤나 유명해졌으며, 훗날 폰 만슈타인과 같은 날에 해임당합니다.
펠릭스 슈타이너 - 언급했듯이 영화 〈몰락〉을 통해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겁니다. 히틀러가 있는 베를린을 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는데, 설령 명령을 따랐다고 해도 자살돌격이 되었을 것이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죠. 바로 이 때문에 히틀러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었구요(영화 대사 - Das war ein Befehl! Der Angriff Steiner war Befehl! - 그것은 명령이었다! 슈타이너의 공격은 명령이었다고!). SS기갑군단장을 맡았음에도 용케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무혐의로 풀려난 것으로 보아 개인적으로는 파울 하우서처럼 전쟁범죄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었고, 이후에 SS를 변호하는 책을 내면서 역사가들에게 푸짐하게 욕을 먹기도 하죠. 애시당초 그 막장 집단인 SS의 사령관을 맡았다는 점에서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하위 부대의 전쟁범죄 행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혐의는 매우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한스-발렌틴 후베 - 독일군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인 발터 모델(Walter Model)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훗날 카미아네츠-포딜스키(독일식으로는 카메네츠-포돌스키)에서 포위되어 전멸 위기에 처한 군을 용케도 빼낸 것으로 유명합니다(이게 바로 그 유명한 후베 포켓). 헌데 전쟁기간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어이없이 사망.
제프 디트리히 - 나치 당 돌격대(SA)를 숙청한 사건인 일명 〈장검의 밤〉 사건의 핵심 인물. 이후 아르덴 대공세에서 공격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발터 폰 라이헤나우 - 군 내에서 가장 나치에 충성하고 가장 나치와 가까웠던 독일군의 원수. 심장마비로 급사하는데, 이 인물의 참모장으로 있던 사람이 제6군의 사령관으로 승격하고, 이 부대가 스탈린그라드에 끌려들어가면서... 아, 그 인물이 바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되겠습니다.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 발퀴레 작전 적극 가담자. 프랑스의 SS를 모조리 잡아들이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암살 실패가 확정된 후 상관인 귄터 폰 클루게가 허락하지 않자 별수없이 잡아들인 SS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고, 이후 자살을 기도하나 실패, 처형됩니다.
카를-아돌프 홀리트 -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을 구원하기 위한 겨울폭풍 작전의 홀리트 분견군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사령관 되겠습니다.
작전개시 당일의 전투서열 - 소련군
남부 집단군에 대응하는 소련군은 남서 전선군과 독립된 거대 군단이었던 제9군이었습니다. 이 제9군이 인근의 야전군과 합쳐지면서 남부 전선군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집단군이 만들어진 것인데, 이렇게 집단군으로 만들어진 것은 독소전 발발 직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6월 22일 당일에는 남부 집단군이라는 건 없었다는 말이죠.
독일군과는 달리 소련군의 자료는 일단 맨 말미에 적어둔 출처인 독일 사이트처럼 한 군데에 잘 몰아넣은 사이트가 없고, 일일이 러시아 어 위키피디아를 뒤져야 할 판이라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단 수는 또 엄청나게 많고 그나마도 러시아 어 위키백과에 모두 등재된 것도 아니라서, 사실상 독일군처럼 완벽하게 자료를 싸그리 정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물론 시간이 충분히 투자된다면야 가능한 이야기겠습니다만 - 한 1주일 정도를 여기에 매고 있으면 충분할까요?). 주요 전투와 야전군 단위의 사령관 및 참모장의 약력을 전장 지도까지 기가 막히게 엮어 놓은 사이트를 찾기는 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군단 이하의 단위는 일일이 찾아야 하더군요. 뭐 어쨌건, 이 남서 전선군과 제9군에도 중요한 장군이 몇몇 있었으니...
소련군 남서 전선군(Юго-Западный фронт) : 사령관 미하일 페트로비치 키르포노스 상장(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Кирпоно́с, 당시 나이 49세).
참모장 막심 알렉세예비치 푸르카예프(Максим Алексеевич Пуркаев) 중장
담당 구역 : 브오다바(Włodawa, 現 폴란드-벨라루스-우크라이나 3국이 만나는 폴란드측 국경) - 카미아네츠-포딜스키(Кам'янець-Подільський)
사령부 위치 : 키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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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군 : 사령관 막심 이바노비치 포타포프(Потапов,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소장, 사령부 위치 : 루츠크(Луцьк)
제15소총군단 : 사령관 이반 이바노비치 페듀닌스키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제27소총군단 : 사령관 P. D. 아르테멤코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9기계화군단 : 사령관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소프스키 소장
제20전차사단 : 사령관
미하일 카투코프 대령
이외 예하 1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제22기계화군단 : 사령관 세묜 미하일로비치 콘드루세프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직속 1개 기갑여단, 4개 포병연대, 2개 방공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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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군 : 사령관 이반 니콜라예비치 무지첸코(Музыченко, Иван Николаевич) 중장, 사령부 위치 : 리비우(Львів)
제6소총군단 : 사령관 I. I. 알렉세예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37소총군단 : 사령관 S. P. 지빈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5기병군단 : 사령관 F. V. 캄코프 소장
예하 2개 기병사단
제4기계화군단 : 사령관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블라소프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제8기계화군단 : 사령관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랴비셰프 소장 (6월 22일 저녁에 제26군에서 소속이 변경됨)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제15기계화군단 : 사령관 I. I. 카르페조 소장 (6월 22일 저녁에 제26군에서 소속이 변경됨)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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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군 : 사령관 표도르 야코블레비치 코스텐코(Костенко, Фёдор Яковлевич) 중장, 사령부 위치 : 보리슬라우(Борислав)
제8소총군단 : 사령관 M. G. 스네고프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1개 산악소총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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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군 : 사령관 파벨 그리고리예비치 포네델린(Понеделин, Павел Григорьевич) 소장, 사령부 위치 : 스타니수아포프(Stanisławów, 現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란키우스크, Іва́но-Франкі́вськ)
제13소총군단 : 사령관 N. K. 키릴로프 소장
예하 3개 산악소총사단
제17소총군단 : 사령관 I. V. 갈라닌 소장
예하 1개 소총사단, 2개 산악소총사단
제16기계화군단 : 사령관 A. D. 소콜로프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령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직속 1개 기갑여단, 4개 포병연대, 2개 방공대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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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부 직속 배치
제31소총군단 : 사령관 안톤 로파틴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36소총군단 : 사령관 P. V. 시소예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49소총군단 : 사령관 이반 알렉세예비치 코르닐로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55소총군단 : 사령관 콘스탄틴 코로테예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1공수군단 : 사령관 M. A. 우센코 소장
예하 3개 공수여단
제19기계화군단 : 사령관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페클렌코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령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제24기계화군단 : 사령관 A. V. 쿠르킨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령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그 외 사령부 직속 각종 여단 다수 및 항공대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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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 전선군 소속이 아닙니다!
독립군단 제9군(9-я армия) : 사령관 야코프 티모페예비치 체레비첸코(Я́ков Тимофе́евич Черевиче́нко) 중장
담당 구역 : 現 루마니아 - 몰도바 국경
사령부 위치 : 오데사(Одеса)
제14소총군단 : 사령관 다니일 그리고예비치 예고로프 소장 (감옥에서 옥사한 알렉산데르 예고로프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예하 2개 소총사단
제35소총군단 : 사령관 I. F. 다시체프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제48소총군단 : 사령관
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노프스키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1개 산악소총사단
제2기병군단 : 사령관 파벨 알렉세예비치 벨로프 소장
예하 2개 기병사단
제2기계화군단 : 사령관 Y. V. 노보셀스키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령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제18기계화군단 : 사령관 P. V. 볼로흐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령화소총사단, 1개 모터사이클연대
이외에 전쟁 발발 직후 남부 전선군이 새로 만들어질 때 제7소총군단(예하 3개 소총사단), 제9소총군단(예하 2개 소총사단, 1개 기병사단), 제3공수군단(예하 3개 공수여단), 제47소총사단이 추가됩니다.
키르포노스 상장의 나이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 국군이라면 기껏해야 중령 정도를 달 나이에 별을 무려 세 개나 달고 있을 정도로 소련군의 수뇌부는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절대적인 원인 중 하나는 당연히 대숙청이고 또 하나는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붉은 군대의 폭발적인 양적 증가... 이런 식으로 갓 원숙기에 접어든 장교를 상장, 중장, 소장으로 초고속 진급시키고도 모자라서 대령이 사단장을 맡는 등(당장 위의 미하일 카투코프의 경우가 그렇죠)의 황당하리만치 심각한 인력 부족 현상은 당시의 붉은 군대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숙청으로 투옥된 장교들을 대거 복권(ex.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시켰음에도 불구하구요.
어쨌든 보다시피 규모도 규모지만 그 유명한 - 제가 이 글에서 이 표현을 몇 번이나 쓰는지 모르겠군요 - 독소전에서 손에 꼽는 명장이라 할 만한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와 로디온 말리노프스키가 끼어 있고, 훗날 기갑부대 원수의 직위에까지 이르는 미하일 카투코프도 당시에 남서부 전선군에 있었으며, 독소전 기간 소련 최악의 반역자인 블라소프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남서 전선군의 사령관인 키르포노스 상장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는데, 그는 독일과 소련의 전쟁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스탈린에게 들키면 모가지가 날아갈 위험을 무릅쓰고 - 이는 제가 첫 번째 글에서 밝힌 주코프의 증언을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 국경의 NKVD 병력과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으며, 독일군이 집결하자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이 덕에 초반에 패퇴하기는 마찬가지였어도 그 과정은 북서 전선군이나 서부 전선군과는 크게 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규모에 좀 주목하실 필요가 있는데, 독립군단인 제9군을 제외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서 전선군의 전력은 소총사단 26개, 산악소총사단 6개, 기병사단 2개, 차량화소총사단 8개, 전차사단 16개에 직속으로 각종 여단과 항공지원까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병력을 모아놓고 있었습니다. 북서 전선군이 고작 4개의 전차사단과 2개의 차량화소총사단, 17개의 소총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갑절 이상의 엄청난 병력이 남서 전선군에, 좀 직설적으로 표현해서 몰빵하고 있었다는 거죠.
물론 이런 배경에는 스탈린의 의중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 112에 따르면, 스탈린은 독일의 주공이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음이 명백해진 상황에서도 무려 100여 개의 사단을 남서부 전선에 펼쳐놓으라고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스탈린의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렌드리스가 소련에게도 제공될 것이 미 의회에서 가결된 것은 1941년 8월의 일이었기 때문에 소련은 "다른 제3국에게서 도움을 받는다"라는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각종 공장과 생산 기지 및 엄청난 밀의 생산지인 우크라이나는 전시 경제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중요한 땅이었기 때문이죠. 재미있는 것은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히틀러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게 바르바로사 작전 과정에서 주공을 틀어버리는 결정적인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건 차후의 일이고...
하여간 그렇기 때문에 남부 집단군은 본의 아니게라면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적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남부 집단군 대 남서 전선군 - 첫 일 주일 : 브로디 전투
여기서는 《독소전쟁사》의 p. 84 - 86에 기술된 타임라인을 따라가 보기로 합시다.
가뜩이나 자연 방어선인 부크 강을 도하해야만 했던 시작도 별로 개운치 못했는데, 거기다가 남부 집단군은 전투 기간 내내 계속되는 소련군의 그런대로 잘 정비된 반격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우선 독일군의 진군을 맞아 포위된 제124소총사단(제5군, 제27소총군단 소속)을 구하기 위해 카르페조의 제15기계화군단 예하 2개 전차사단이 독일군의 우익을 공격했으나, 이에 맞서는 독일 제197보병사단이...라고 책에는 기술되어 있는데 어째 위키백과의 지도상으로는 제15기갑연대로 되어 있군요? 이 분견군이라고 해야 하나 전투단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간 이들이 제15기계화군단의 앞길을 막아서며 측면을 보호하고, 제11기갑사단은 그대로 동진.
다음날인 6월 24일에는 포타포프의 제5군이 보이니차(Voinitsa, Войница)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북쪽 측면에 대해 좀더 조직적으로 반격에 나섰습니다. 여기에는 제22기계화군단이 관여했는데, 5일간의 격전에서 무려 81%의 전차를 잃었고, 콘드루세프 소장이 최초의 교전에서 전사하는 비상사태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 일대의 격전이 대략 정리된 7월 15일경에 이 기계화사단에 남은 전차라고는 원 기갑병력의 고작 4%뿐이었다는군요. 그리고 독일군이 소련군을 우회해서 아예 스티르 강(Styr, Стир)으로 냅다 돌진해버리자 졸지에 강이라는 천연 장애물에 가로막혀 포위 섬멸당할 위기에 처한 제5군은 별수없이 후퇴해야 했습니다.
북부 집단군의 폰 만슈타인이 그랬듯이 폰 클라이스트도 빠르게 돌진해서 스티르 강의 도하 교두보를 접수했고, 작전 개시 4일 만에 강을 도하하며 키예프로 가는 길을 뚫어놓게 되었습니다. 현 폴란드 국경에서 브로디까지는 최단 거리가 100 km가 채 되지 않기 때문에 무려 300 km 가까이를 돌파한 폰 만슈타인의 그것보다는 덜하기는 합니다만, 기갑부대의 빠른 돌파 - 빠른 교두보 확보 - 뒤이은 보병들이 잔당을 소탕하면서 진격 및 다음 공격로를 확보한다는 이 공식이 얼마나 독일군에게 철저하게 퍼져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걸 눈 뜨고 보고 있을 키르포노스 상장이 아니기는 했는데... 하필이면 이 당시에 소련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당한 것은 차치하고서도 엄청난 차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앞서 이야기했지만 렌드리스가 통과된 게 1941년 8월이고, 그나마도 제대로 물자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1943년에 가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때는 순수 소련의 힘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량화사단은 그야말로 말만 차량화사단이었고, 이 때문에 예정대로였으면 제때 반격에 투입되었어야 할 보병사단을 아예 쓰지도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쉽게 말해서 전차사단만으로 반격해야 할 상황에 몰린 것이죠. 그리고 남쪽에서는 남서 전선군의 주력부대인 제15기계화군단과 제8기계화군단의 반격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6월 26일에 제6군 예하 라비셰프의 제8기계화군단은 독일군 제1기갑집단군 소속 제48차량화군단 예하 제57보병사단을 10 km나 뒤로 밀어버리는 놀라운 전과를 거뒀습니다만, 판단 미스였는지 어쨌는지 하여간 밀어붙인 적을 놔두고 독일군 주력군이 위치한 두브노(Dubno, Ду́бно)로 방향을 바꾸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양쪽의 적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자동으로 포위망에 걸려들어서 폭격은 기본이고 포병과 기갑부대의 공격까지 아주 합동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고, 7월 1일이 되어서야 간신히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 10 km 뒤로 밀어붙인 승리가 잘만 하면 독일군의 보급선을 끊어버리고 독일군의 창 끝이라 할 만했던 제11기갑사단을 고립시킬 수 있는 수였는데, 무리하게 두브노의 적을 노리려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엄청난 수의 병력을 집결시킨 독일군에게(1개 기갑사단 포함 무려 다섯 사단의 집중포화를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거죠. 이 때문에 (다른 곳도 손실이 크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만) 제8기계화군단의 병력 역시 7월 7일에 전선이 그런대로 안정되고 나서 보니 원 기갑병력의 5%만 남아 있었다는군요.
이외에 남익의 제15기계화군단과 북익의 제19기계화군단이 각각 반격을 시도했지만, 남익에서는 독일 공군과 습지대 때문에 별다른 전과가 없었고, 북익에서도 독일의 기갑사단에 밀려났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제9기계화군단을 맡았던 로코소프스키는 아예 반격 자체가 불가능함을 깨달았고, 일단 반격명령을 접수한 후 공격을 감행해서 큰 손실을 입자 아예 재차 내려진 반격명령을 거부하고 독일군의 다음 목표였던 로브노(Rovno, 現 우크라이나 리우네, Рівне)로 진격하는 독일 제13기갑사단의 선두 부대를 기습해서 큰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합니다.
얼마나 큰 피해인지는 정확히 나와 있지는 않은데, 확실한 것은 선두부대가 후위의 기습으로 인해 당분간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독일군을 막아낸 후에 로코소프스키는 주저없이 군을 뒤로 물립니다. 보통 때였으면 명령 불복종에 후퇴라는 이유로 사령관이 갈리고 로코소프스키는 또다시 NKVD에게 잡혀 루뱐카 감옥에서 고문받는 신세가 되었겠지만, 나름대로 적의 선봉을 막고 발을 늦춰버리는 큰 전과를 올린 덕에 로코소프스키는 계속해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죠. 그리고 이것으로 벌어들인 시간이 대략 1주일 가량이 되는데, 이게 훗날 키예프의 나비효과를 불러오는 한 원인이 됩니다.
그거는 그거고... 그렇다고 해서 제공권이 소련에게 넘어갔다던가, 기갑 부대의 운용이 혁신적으로 변모했다던가, 기습에 올바르게 대응했다던가 한 건 또 아니라서, 어쨌든 이 일대의 격전은 7월 1일이 되기 전에 독일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일련의 전투를 종합해서 브로디 전투라 일컫는데,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소련군의 경우 무려 3,500대의 전차가 집결했지만 살아남은 전차 자체가 수십도 아니고 고작 수 %에 불과했으니 어림잡아 3천 대의 전차가 박살이 났다는 거죠. 일례로 개전 당시 제8기계화군단의 병력은 전차 920대였는데, 이 중 800대 이상의 전차가 박살났으니... 다른 부대는 뭐 말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손실 또한 의외로 심해서, 가뜩이나 병력이 모자라는 - 남부 집단군에 배속된 전차가 726대라고 위에서 밝힌 바 있죠 - 상황에서 무려 200대 가까운 전차를 잃었습니다.
이 전투에 대해 《독소전쟁사》의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책에서(p. 86) 이렇게 논평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초기의 전투는 독일 기갑 부대도 결코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냈으며, 로코소프스키 같은 미래의 고급 지휘관들이 비싼 대가를 치르고 기계화전에 대한 알찬 전훈을 얻을 수 있게 해 줬다."
그러나 독일군이 무적이건 아니건 남서 전선군의 상황이 좋지 못한 것은 여전했고, 전쟁은 이제 시작될 따름이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루마니아의 '루'자도 언급하지 않았죠. 7월 1일까지의 일련의 독일군의 진격과 소련군의 반격을 보았으니, 이제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겠습니다... 다음 글에서요. 지금까지 쓴 것만 해도 지나칠 정도로 길어서... 아무튼 다음 글에서는 베사라비야 쪽의 이야기인 뮌헨 작전과 서우크라이나의 우만 전투, 그리고 다룰 수 있으면 오데사 포위전까지 다뤄 볼 예정입니다.
자료출처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https://de.wikipedia.org/wiki/Schematische_Kriegsgliederung_der_Wehrmacht_am_22._Juni_1941#Heeresgruppe_S.C3.BCd - 남부 집단군 전투서열
http://www.lexikon-der-wehrmacht.de/Gliederungen/KommandoHeer.htm - 전쟁 기간 동안의 독일 국방군 각 부대의 편제 및 당시 사령관 목록
https://de.wikipedia.org/wiki/Schematische_Kriegsgliederung_der_Roten_Armee_am_22._Juni_1941#S.C3.BCdwestfront - 남서 전선군 전투서열
https://pamyat-naroda.ru/ - 독소전에 대한 소련 측의 자료(사령관, 참모장, 약력, 야전군의 이동 경로, 편성일, 전황도 등등)를 기가 막히게 정리한 사이트. 러시아 어가 좀 문제이긴 한데 번역기 돌리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rody_(1941) - 브로디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