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력은 나쁘다. 폭력은 사람을 망친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4등>이 흥미로운 지점은 구태의연한 고발이 아니라 폭력이 인간에게 정착하는 과정이다. 영화는 폭력이 어떻게 인간에 스며들고, 이를 왜 끊을 수가 없게 만드는지를 통해 보여준다. 폭력은 몰지각하고 뻔뻔한 이들의 수단만이 아니다. 폭력의 사슬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둘만이 엮여있지 않다. 폭력을 심은 이가 있고, 이를 방조한 이가 있고, 이를 종용하는 이가 있다. 폭력의 피해자는 가해자 한 명에게 당한 희생자가 아니다. 폭력이라는 수단과 그 피해자는 세상 전체의 합작이다.
- <4등>의 "광수"는 이 영화가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을 적용하지 않는다걸 보여준다. 영화는 어릴 적 광수의 패기만만한 선수 시절과, 체벌을 견디지 못해 좌절되는 프롤로그를 그린다. 광수는 재능도 있고 자신감도 넘친다. 그렇다고 그가 훈련장에 가지 않고 도박이나 하는 모습은 관용해주기 어렵다. 영화는 체벌이 정당화될 수 있는 함정들을 설치해놓는다. 광수는 싸가지도 없고, 도박이나 하고 자빠져있고, 지만 잘나서 규칙을 무시했다. 그래서 맞았다. 광수는 맞다 말고 욱 해서 수영선수로서의 미래를 접어버린다. 전도유망한 선수의 앞길을 끊었다, 는 체벌의 부작용은 지가 지 신세 망쳤다, 는 체벌의 필요성과 맞물린다. 광수는 체벌의 온전한 피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쉽게 가지 않는다. 체벌의 필요성을 전제해놓고 일부러 가치판단을 흐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는 광수의 고발장면으로 프롤로그를 마치고 현재로 넘어간다.
- 영화는 주인공 준호와 준호가 처한 현재 시점의 상황을 그린다. 준호는 수영을 하고 있고, 준호의 어머니는 준호가 4등밖에 하지 못하는 것에 답답해한다. 어머니와 준호의 관계를 통해 영화는 폭력의 출발점이 "경쟁사회"에 있다는 것을 짚는다. 준호의 어머니 정애가 그렇게 준호를 닥달하고 집착하는 것은 그가 비뚤어진 애정을 퍼붓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볼 것은 그가 그렇게 준호의 등수에 집착하는 "이유"다. 정애는 뒤틀린 인격체의 반면교사가 아니다. 이 영화가 고찰하는 방식은 "나쁜 사람을 보여주고 이렇게 살지 맙시다" 라는 인생관의 선동이 아니다. 정애 역시도 경쟁의 논리에 세뇌된 피해자라는 걸 곱씹을 필요가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많은 자식들이 1등이 최고, 1등 하지 못하면 아까운 것이라고 칭찬과 위로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렇게 길러진 사람들 중 하나로 정애 역시 똑같은 가치관을 주입하려 한다. 정애에게 행복의 필요조건은 승리라는 결과다. 어떻게든 지지 않기 위해 아득바득 애를 쓰는 투쟁의 장은 이제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정애에게 묻는 책임이 영훈과 비슷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공범으로 묘사되었어야 할 부모 모두가 그 책임의 추를 한 쪽에 쏟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 영화는 <4등>이란 제목으로 이미 경쟁에 대한 질문을 던졌었다. 그렇다면 1등은 무엇이 좋을까? 준호는 지난 번 대회에서 1등을 한 상급생에게 묻는다. 1등 하면 좋냐는 질문에 그 아이는 비싸보이는 헤드셋을 보여준다. 이는 1등의 기쁨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1등을 해서 얻은 "물질적 보상"의 이야기다. 영화 속 교육에는 "의무"와 "성취"만 있다. 그리고 그 성취조차도 온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 정애는 수소문 끝에 광수를 찾는다. 세월이 흐른 후의 광수는 딱 봐도 강압적이다. 며칠을 불성실하게 보낸 끝에 광수는 준호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준호는 가르친 대로 잘 하지 못한다고 광수에게 맞는다. 영화는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모한 광수를 보여준다. 한번 각인된 폭력의 체험은 이토록 강력하다. 광수는 매 맞는 게 싫어서 국가대표 자격까지 포기했다. 피해자로서의 울분이 있을 텐데도 광수는 폭력을 옹호하게 되었다. 교육에서 체벌이란 수단이 무서운 이유는 폭력 자체를 긍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절대 안 때려야지, 가 아니라 그 때 나도 맞았으니 너도 맞아야지, 로 인생관 자체가 폭력에 길들여진다. 폭력의 유혹은 논리로도, 심지어 피해자의 심리로도 쉽게 극복할 수 없다. 준호를 때린 후 광수는 분식집에서 준호에게 먹을 걸 사주며 달랜다. 유치한 당근과 채찍이다. 교육의 현장에서 폭력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 되고 이는 "분식으로 퉁쳐질 수 있는" 일이 된다. 폭력은 교육자를 나태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기기만까지 유도한다. 광수는 간절함이니 뭐니 떠들어대지만 그것은 매 맞는다고 새겨지는 것도 아니고 이미 영화는 프롤로그에서 간절함 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던 광수의 과거를 보여줬었다.
- 교육은 가혹해진다. 준호는 뛰느라 힘들고, 맞느라 힘들고, 수영장에 가는 게 점점 즐거워지지 않는다. 정애는 준호의 등에 난 멍자욱을 보지만 모른 척 한다. 과정의 고통은 결과로 상쇄된다는 논리다. 그리고 영화는 모두를 함정에 빠트린다. 준호의 수영 실력이 늘었고 준호는 2등을 한다. 힘들었지만 분명히 나은 결과가 뒤따랐다. 정애는 뛸 듯이 기뻐하고 준호도 어느 정도 뿌듯해한다.
- 이게 함정인 이유는 일단 준호가 그 성취감을 온전히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준호가 수영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기기 위함이 아니다. 정해진 레일을 빠르게 달리고 싶어서도 아니다. 준호는 레일들을 건너가며 "자유롭게" 헤엄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준호는 기뻐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뻐하고, 인정받아서 기뻐한다. (타인의 만족, 특히 부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경쟁에 소모하는 형식의 성장이 바람직한 것일까) 정애는 준호가 2등을 했다고 기뻐하는 게 아니다.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기뻐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만족에는 늘 단서가 붙는다. "거의 1등" 이다. 1등이 아니면 정애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고 1등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도 계속 1등을 해야 할 것이고 이는 당연해질 것이다. 이를 가장 확연히 보여주는 것은 광수의 태도다. 광수는 4등만 하던 학생을 2등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지 않는다. 왜 자기 말대로 하지 않았냐고 화를 내고 실실 쪼갠다고 승부근성이 없는 준호를 나무란다. 경쟁 세계의 논리에 편입되는 순간 모두가 불행해지거나 가짜로 행복해진다.
- "거의 1등" 축하 파티를 하던 중 영훈은 기호가 꺼낸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굳는다. 이전까지는 안 맞아서 4등밖에 못했던 거냐니. 방 안에서 준호 몸에 난 멍자욱을 확인한 영훈은 코치의 이름을 확인한다. 영화는 아무런 해결책도 보여주지 않는다. 폭력은 나쁘니까 하지 마시오, 란 말 대신 영훈은 어른의 거래로 자식을 지키려 한다. 돈을 더 주고, 기자의 힘을 슬쩍 보이며 협박한다. 폭력을 막기 위해 자본과 권력의 폭력을 동원한다. 준호의 인생과 준호의 교육에 대해 그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 폭력의 사슬은 더 견고해진다.
- 이 후에도 광수는 준호를 때린다. 광수는 준호의 아버지를 위선자라 비웃는다. 영훈은 프롤로그에서 광수의 고발전화를 받았지만 이를 묵살했었다. 폭력의 역설은 순환한다.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에 동조했던 이는 피해자의 아비가 되었다. 피해자의 어미는 폭력을 묵인한다. 맞다 못해 준호는 수영복 차림으로 도망친다. 아빠 회사를 찾아간 준호는 울며 안긴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체벌이, 한 인간을 취미와 생활 바깥으로 도망가게 만든다. 준호는 집에서 수영을 그만한다고 선언한다. 정애는 준호를 이해하지 못하고 광분한다. 그렇다고 영훈이 준호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하기 싫다니까, 자식이 맞으니까 때려치라는 식이다. 준호의 부모 중 그 누구도 준호에게 수영의 즐거움과 광수와의 훈련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가장 끔찍한 장면을 그린다. 그렇게 맞는 걸 싫어하는 준호가, 자기가 맞던 방식으로 기호를 엎드리게 하고 때린다. 폭력은 전염되었다. 맞을 때의 억울함이 오히려 세상의 삐뚤어진 법칙을 따라가게 만든다.
- 폭력은 "경쟁"의 부산물이다. 경쟁을 하지 않으면 수영 자체가 즐거울 것이고 아무도 더 빨리, 1등, 같은 결과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준호가 수영에서 찾는 기쁨을 경쟁의 바깥편에서 찾는다. 준호는 레일 사이를 넘나든다. 준호가 수영하며 행복해하는 세계는 나뉘어진 각자의 레일에서 타인을 밀쳐내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속도도,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 자유와 고요의 세계다. 준호의 기쁨은 물 바깥에 있지 않다. 준호가 수영을 하는 이유는 물 속에 숨어든 빛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빛과 숨박꼭질하는 물의 세계에서 준호는 더 놀고 싶다. 그래서 수영을 그만둔다 했지만 결국 수영을 포기하지 못하고 새벽녘 수영장에 몰래 들어갔다가 끌려나온다.
- 준호는 광수를 다시 찾아간다. 광수는 준호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의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이야기를 한다. 광수는 폭력에 찌들어있는 피해자다. 과거의 폭력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이를 합리화하고, 자신의 과거도 부정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다만 여기서 준호의 불행에 대한 책임전가를 모조리 정애에게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부분은 있다. 정애의 집착과 강박은 보다 심층적인 문제를 "엄마들의 치맛바람"으로 격하시키는 것처럼도 보인다.
- 영화의 결말, 영화는 새벽 수영장 씬의 혼란을 야기한다. 영화는 더 이상 일직선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준호와 다른 참가자들을 쫓지 않는다. 준호는 물 속에서 이리저리 오간다. 레일을 무시하고 가로로 오가며 준호는 물 속에서 논다. 대회에서 저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대회의 규정 자체를 무시하고 노는 준호를 통해 보다 자유로워진다. 준호에게는 더 이상 등수가 상관이 없다. 물 속의 빛을 손 안에 담을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 이 영화의 결말은 다시 역설로 빠진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어보니 준호는 1등을 했다. 난생 처음으로 엄마가 그렇게 원하던 1등을 해낸 것이다. 얼핏 보면 과정을 즐길 수 있다보니 그 결과가 저절로 따라왔다 - 는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거울을 바라보는 준호의 표정은 웃는 것도 벅찬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이다. 여기서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1등을 할 수 있었으니 준호가 물 속에서 그렇게 놀았던 것은 "1등이란 결과"를 위한 통과의례였을 뿐이냐고. 1등을 했는데도 왜 준호는 별로 즐거운 얼굴이 아니냐고. 오히려 1등이라는 결과가 준호의 순수한 물놀이를 어지럽히고 말았다. 그저 좋아서 수영을 했고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게 즐거웠는데, 그게 죄다 1등할려고 그랬던 것만 같다. 준호는 1등을 하고 말았다. 그런 게 없이도 마냥 행복했고, 간신히 거기서 벗어났는데 가장 필요없는 순간 보상이 찾아왔다. 이기고 싶은 적 없는 아이가 모두를 제치고 이겼다는 게 과연 행복한 일일까. 그리고 1등으로 준호를 밀어줬던 건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광수의 손자국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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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영화관에서 같이 관람한 사람들 중에는 폭력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고 몇 번이나 되는 함정에 걸려든 이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생을 때리는 순간에도 적게나마 웃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여러 함정들이, 이렇게 글로 읽으니 더 명확하게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