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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4/25 23:16:53
Name 王天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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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스포] 해피엔드 보고 왔습니다.


- 영화는 최보라가 아파트 복도를 걷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최보라는 복도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한 여자를 의식한다. 집에 도착해서는 김일범에게 살짝 다른 여자의 존재를 확인해본다.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이 둘은 이내 열정적인 섹스를 나눈다.

- 영화가 맨 처음 보여주는 것은 관능과 격정이다. 이 후에 남편 서민기를 노출시키면서 최보라의 욕망이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최보라에 이입해 그 로맨스를 순간이라도 즐겼던 사람들은 엄청나게 불편해진다. 최보라의 농밀한 삶은 오로지 서민기를 향한 동정의 재료로 쓰인다. 심지어 최민기의 삶 자체도 비루하다. 직장이 없고, 낡은 책방에서 시간을 때운다. 로맨스의 조건에서도 그는 아내보다 열등하다. 최보라는 하고 싶은 사랑을 마음껏 충족하고 있다. 서민기는 연애 소설로 망상을 메꾼다. 영화 초반의 텐션은 금새 사그라들고 보는 이들은 젖은 장작이 되어 이입할 수 없는 열정을 계속 목격한다.

- 다만 시작부터 영화 속 윤리적 추의 균형이 살짝 기울어져있다. 후에 나오는 서민기와 최보라의 부부생활은 불륜이 있든 없든 이미 행복하지는 않은 상태로 묘사된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배우자가 아닌 대체재를 통해 연애감정을 해소한다. 그들에게는 윤리적 하한선을 넘지 않을 정도의 의무만 있을 뿐, 딱히 커다란 신뢰나 애정을 걸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서민기의 "다소 순수해보이는 연애감각"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고지순함을 위장하는 느낌이 든다. 연애 소설을 탐닉하는 것과 결혼생활에 충실한 남편, 연애에 대한 환상을 가진 남편과 아내에 대한 연애감정을 지속 중인 남편은 동치되지 않는다. 최민기의 독서취향은 말 그대로 취향일 뿐이다. 그러나 이 설정은 "아내에게 배신한 남편"으로서의 로맨스의 희생자 입지를 더 강조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엔딩과 연결지어 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당시의 윤리관념이나 시대를 고려해본다면 정지우 감독의 의도적인 편향은 아닌 것 같다. <사랑니>의 제 멋대로 사는 주인공을 보더라도 감독이 추구하는 자유와 파격은 여전하다. 다만 이 부분에서 복선의 장치와 성격 묘사의 수단으로서의 연애소설이 "어떤 효과"를 낳는지에 대해서는 엄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것도 20년이 지난 후 미래 시점에서 하는 비판이니 정지우 감독에겐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 이 영화의 가장 성공적인 부분은 경제권을 상실한 중년 남성의 패배감을 그려낸 부분이다. 최보라의 생기와 주체성을 보고 난 이후 서민기의 삶이 이어지기 때문에 영화는 놀랄 정도로 힘이 빠진다. 그 무력함의 묘사는 오히려 최보라를 향한 분노를 덮을 정도로 건조하고 위계적이다. 최보라를 향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라며 윤리적으로 비판을 가할 정도의 에너지가 서민기에게는 장착되어 있지 않다. 서민기는 얹혀 살고, 구직의 욕망도 크지 않고, 그 도전도 실패하고, 심지어 다른 아줌마와 드라마를 보며 수다를 떤다. 그리고 최보라에게 구박을 받는다. 식탁에서 서민기를 혼내는 최보라를 보고 있으면 울컥하다가도 대꾸할 말이 목구멍 밖으로 올라오지 않는다. 부부생활 이면의 불륜이라는 진실보다 서민기의 무능력함과, 이에 대한 자책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파고다 공원이 아니라 탑골 공원이야." 라는 서민기의 변명은 그가 얼마나 구차해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사다. 그 모든 비난을 견디지 못해 꿈틀거리는 남자의 자존심이, 기껏해야 공원의 지명이나 간신히 정정해주라 요구하는 데 그친다. 서민기는 꼬리 내린 개다. 딱하고 짠하다. 그렇기에 최보라는 서민기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다. 역으로 최보라의 불륜이 정당해보이는 가치관의 전복마저 일어난다. 저렇게 한심하고 섹스도 못하는 남편이 있는데 첫사랑을 만나 욕정을 연소시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고.

- 최보라는 교활하고 이기적이다. 이는 현실에 대한 균형감각의 방증이기도 하다. 최보라는 서민기나 김일범보다도 자신의 위치를 훨씬 잘 이해하고 처신한다. 그는 아내로서, 사랑받는 여자로서, 엄마로서 어떻게든 그 자리를 지키고 싶어한다. 타인을 기만할지언정 자신에 대한 예의는 지키려고 애쓴다. 각기 다른 욕망과 책임을 부여받을 때마다 최고의 욕심을 부리고 최소한의 절제를 한다. 그리고 그 가면극의 균형은 조금씩 무너진다. 최보라 주변의 남자들은 최보라만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최보라는 자신의 욕망을 경계했지만 타인의 욕망은 과소평가했다.

- 김일범은 순진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제일 짜증나는 인간이다. 가끔은 나쁜 사람보다 멍청한 인간들이 사람 속을 더 뒤집어놓는다) 택도 없는 욕망을 순수로 포장하고 그것을 자꾸 밀어붙인다. 자기 처지가 기껏해야 화력 좋은 불장난 땔감인 걸 계속 부정한다. 최보라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관계가 놀이라는 걸 주지했지만 김일범은 이를 위반한다. 기만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모르는 척 하는 건 악행의 정도에 있어서도 질이 다르다. 이 남자가 최보라를 향해 소유욕을 펼쳐오는 과정은 전략적으로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관계 자체의 존속만 해도 이들의 관계는 굉장한 긴장을 소모한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이 감정에 휩쓸리는 걸 열정으로 착각하면서, 여자 최보라가 아닌 엄마이자 아내인 최보라를 "사회적"으로 빼앗으려 한다. 아기용품을 선물로 주는 이 남자의 마음씀씀이는 마지막에 닥쳐올 결말에 그 모든 연민을 거두어가 버린다. 최보라는 서민기가 아니어도 어차피 김일범에게 죽었을 것이다.

- 서민기는 이름부터가 "서민의 기" 에서 소유격 조사 의만 빼놓은 것 같은 보통 사람의 표상이다. 취미 장소가 고풍스럽긴 하나 그 시절 그 처지의 남자들에게는 별 다른 선택지도 없었을 것이다. 아내의 외도를 발견하고 번민에 빠지나 그에게 별다른 해결책은 없다. 서민기는 뒷걸음질만 친다. 소리지르거나 쌍욕을 퍼붓거나 하는 남성성을 뽐내지 못한다. 이미 사회적으로 거세당한 인간이다.

- 이 캐릭터의 정체성이면서 가장 큰 균열은 최보라를 살해하는 씬이다. 서민기에게는 울분이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상상해보았음직한 그 분노를,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할 그 분노를 터트리며 서민기는 극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캐릭터의 폭발은 캐릭터 내의 긴장감을 무너트리는 역효과가 더 커보인다. 양면성이라고 하기에는 일관되게 눌려왔고, 그래서 이 영화의 처연한 비감을 계속 살려왔던 축이 끝내 한쪽으로 쏠려버리는 것이다. 이 파국은 지나치다. 어차피 최보라, 김일범, 서민기 사이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젠가의 스릴은 무너지지 않게끔 계속해서 건물 내부의 위기감을 자초하는 것이다. 무너져버리면 모든 게임은 끝난다. 서민기의 살인은 이 영화의 위태로움을 일거에 해소시켜버린다. 모든 상상의 단초조차도 스스로 쓸어내버리면서 말이다.

- 영화는 최보라의 불륜으로 관객들의 일상적 기대를 깨트리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러닝타임 내내 서민기의 남은 한 조각 신뢰마저도 찢어발기며 영화는 목격자의 고통을 자극한다. 점철되는 고통으로 관객을 멈추지 않고 찌르는 리듬으로 영화는 나아간다. 이 영화의 아파트 복도 씬이 대표적이다. 서민기는 집에 돌아와 엄마 없이 잠에 쓰러져있는 아기를 본다. 병원에 아기를 데려가고 그는 아기를 염려하느라 어쩔 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술기운인지 뭔지 모를 로맨스에 절어있는 최보라와 김일범을 보여준다. 최보라는 김일범에게 업혀나간다. 스크린 밖의 관객은 몇번이나 고통에 시달린다. 그리고 정지우 감독은 이미 심리적으로 넉다운 직전의 관객에게 두 번의 확인사살을 더 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서민기는 아기를 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문 앞에서 애달파하는 자신의 아내와 아내의 불륜 상대를 목격한다. 그는 얼어있다가 뒤로 숨는다. 그리고 너무도 사려깊게, 자신 빼고는 아무도 불편하지 않도록 윗층 복도로 피신해있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나고 김일범은 내려갔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김일범은 무슨 변덕이 들었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최보라를 다시 찾아간다. 복도의 위와 아래에서 두 사람은 교차한다. 김일범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서민기는 천천히 걷는다.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확인하고 서민기는 혼자 마음을 단속한 채로 집으로 들어서려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무언가를 목격한다. 아마 이 전의 것보다 더 한 꼴이었을 것이다. 이 관계의 파탄, 이를 목격해야 하는 증인, 그리고 묵비권을 강요당하는 것까지 이미 삼중고(그리고 애아빠로서의 배신감)를 감독은 체험시킨다. 이는 관계의 비극이고 신뢰의 종말이다. 능욕당하는 서민기를 보면서 감정의 에스컬레이터는 나락으로 처박힌다. 그런데 왜 여기서 굳이 생명권을 둘러싼 싸움으로 다시 한번 긴장감을 터트릴까? 복수, 혹은 살인이라는 장치로 감정의 고조를 재점화하려는 시도는 썩 성공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 서민기가 최보라를 죽이기까지의 과정에서는 다소 인위성이 엿보인다. 바로 아기의 존재다. 최보라, 서민기, 김일범이 모두 선을 넘었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아기를 건드리는 장면들이다. 최보라는 아기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김일범을 만나러 간다. 김일범은 아기 용품을 선물한다. 서민기는 젖병 안의 개미들을 발견하고, 아기를 응급실로 데려간다. 이 셋에게서 서로를 어찌하지 못하는 인내의 한계는 아기로 모여있다. 아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하고 어른들의 갈등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흔히들 상정한다. 아기를 위협하면 그 캐릭터는 천하의 악당이 되고 아기를 소중히 하면 그래도 휴머니티의 기본은 가지고 간다고 보인다. 아기는 이만큼 절대적인 존재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 속 내용과 상관없이 이미 "금기"로 규정되어 있는 소재를 편리하게 끌어온다. 아기를 건드리니까 관계의 환상을 진실이라 믿고, 이 불륜을 끝내야 하고, 아내를 용서할 수 없다. 이 것은 여태 극중 내의 주요한 갈등이 아니다. 애당초 엄마로서의 의무 때문에 서로가 싸운 것도 아니다. 이건 그래도 심하다, 라는 감정의 트리거로서 "원래 그러한 존재"를 인용하는 것에 더 가깝다. 이 영화에서 아기를 지워보자.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나 서민기의 도화선은 절대로 불이 붙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서민기의 배신감을 "불륜에 휘말려 자신의 아기에게 수면제까지 먹이는 몹쓸 어미"로서의 불관용에 슬쩍 업혀가고 있다. "아기"의 존재 때문에 남편으로서 느끼는 배신감이 오히려 옅어지고 그 처벌은 다소 사회적인 기대에 부응하는 모양새를 띄고 만다. 절망의 방향이 살짝 뒤틀린다는 이야기다.

- 원래 한국의 중년 남성들이 같이 사는 여자에게 "아내"보다는 "애엄마"로서의 의무를 더 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으니 서민기의 분노가 그렇게 이상할 것까지는 없다. 그 동안의 전개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면에 아기를 이용한 감정선의 흐름이 상대적으로 더 튀어보일 뿐이다. 그러나 캐릭터의 구축이라는 부분에서 서민기의 전환은 급작스럽다. 여태까지 별 이야기도 못하고 짓눌려오면서,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이후로는 자괴감에 더 뭉개진다. 최보라의 뻔뻔함에 서민기의 분노는 "반비례" 양상을 띄고 있다가 아기라는 계기 하나로 정반대의 인물이 되는 것이다. 연애 소설을 읽다가 추리 소설을 읽고, 용의주도해지고, 과감해지고, 한없이 냉정해지는 이 변화에는 인물 자체에서 별 다른 징조가 없었다. 오로지 사건이 있고 그 사건 뒤로 달라진 인간이 있다. 원래 정지우 감독이 이야기 속에서 감정의 덧셈 뺄셈을 논리적으로 납득시키는 감독이 아니라지만, 서민기의 "변신"은 많은 것이 생략된 것처럼 보인다. (최민식씨가 GV 현장에서 이 부분을 좀 더 설명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이 영화의 살해씬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환상이다 아니다 라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까닭은 장면 자체의 비현실성이라기보다는 캐릭터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부작용에 가까워 보인다. 그 분노의 표출이 너무 극단적이기에 이마저도 "일반 사람의 숨겨진 양면성"이라고 삼키지 못하고 스토리의 현실적 전개에서 자연스레 배제시키는 관객 스스로의 이해 과정일 것이다.

- 영화가 서로 교차시키는 질투의 방향에 두고 생각해본다면 이런 지점이 더 아쉽게 다가온다. 최보라는 김일범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의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서민기는 최보라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의심이 맞았다는 것을 알고 주저앉는다. 최보라의 질투는 자신이 남편을 기만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투영한 심리적 불안정이다. 서민기의 질투(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감정)는 믿음이 깨진 현실 그 자체다. 소유욕으로 관계를 이어나가던 최보라는 관계 자체를 놓을 수 있다. 최보라는 자신의 욕망을 흐지부지 흐리며 아내로서 되돌아오려고 한다. 여기서 서민기가 최보라의 존재 자체를 말살하는 것은 인물 사이의 동등해보이던 욕망의 등식을 부등호로 집어삼킨다. 서민기의 절망 앞에 최보라와 김일범의 욕망은 두 년놈의 하잘 것 없는 사랑놀음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 아기의 존재가 트리거인만큼, 서민기의 분노는 앞뒤가 없어보인다. 아기가 소중한 존재이고, 그래서 그 아기를 낳은 어미가 제 임무를 다 하지 않고 방치한 것에 분노했다면, 아기가 필요로 할 어미의 무게 또한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아기가 소중한만큼 그 아기를 키우고 아기를 외롭지 않게 할 어미의 존재가 아비에게 있어 "죽여 없애야 할" 정도의 존재까지 격하되는 과정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다시 로맨스로 귀결한다. 보라야....라며 흐느끼는 서민기의 마지막 모습은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남편으로서의 추모다. 여기서도 서민기의 슬픔이 죽인 행위 자체에 대한 죄책감인지 사랑하는 이를 제 손으로 떠나보낸 상실감인지 애매하다. 이 장면은 오히려 영화의 엔딩보다 서민기가 최보라를 죽이기 전에 들어갔다면 더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 같지만, 감독이 그런 식으로 애정과 증오 사이에 선을 긋는 필체를 가진 사람은 아니니까.

- 그럼에도 그 균열을 단점이라고만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서민기의 살해씬은 이 영화의 흠인 동시에 정지우만의 개성이다. 이 예고없는 클라이맥스가 주는 파괴력은 대단하다. 정지우는 일상의 파멸을 이야기하기 위해 서서히 금을 내지 않는다. 세 인물을 둘러싼 세계를 단숨에 부순다.  “보통 남편”으로 존재하던 서민기는  돌변한다. 이전까지의 감정선을 점진적 하강, 혹은 요동치는 감정곡선의 운동이라면 영화는 서민기의 살해씬에서 감정선이 높고 뾰족하게 천장을 찌르는 것처럼 전환한다. 절망에서 분노까지,  일상에서 비일상까지 단 한번의 도약으로 뛰어넘는 이 리듬은 명백한 반전이다. 매우 이질적인 리듬에서 관객들도 혼란을 겪고 이해하기에 급급해진다. 이 순간만큼 관객들은 최보라에 이입한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분노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템포로 그렸어야 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 감정을 수긍하기는 어려우나, 감정 자체들의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딱히 이해할 필요가 없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서민기의 살해씬은 감독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부분을 그리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이 전까지의 서민기와 최보라의 결혼 생활은 굳이 대단한 연기가 없이도 내러티브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자연스럽고 보편적이다. 그러나 그 경계를 넘어가는 데는 대단한 논리적 얼개가 필요하지 않다. 본디 사람은 비논리적이고 "그럴 줄 몰랐던" 야누스적 존재다. 이 영화는 살해씬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소극적이고 평온하며 일반적이다. 딱 한 순간의 파격이 이 영화 전체를 이상하게 만들어버린다. 이상한 이야기를 설득이 되게 그린다면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이상하지 않다. 이상할 소재를 "이상하지 않게 그리는" 이야기가 되고 이는 결국 정상의 범주에 머무른다. 위기는 갑자기 찾아온다. 언제라도 무너질 것 같지만 무너지지 않고 있기에 보는 이는 위험을 느낀다. <해피엔드>라는 제목의 허구성을 이 영화의 결말을 초래하는 클라이맥스씬과 대구를 이룬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 리가 없다며 사람들은 해피엔딩을 비웃는다. 클라이맥스씬은 그 비웃음만큼만 현실적이다. 누군가는 바라고, 누군가는 행복을 부정한다. 어찌됐건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믿기지 않는 방식으로 파괴한다. <해피엔드>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죽어도 싼 여자를 죽였고,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죽고 난 후 다시 이전처럼 돌아온 서민기를 보면 믿을 수 밖에 없다. 단 한순간의 비현실성이 이 영화 전체를 비현실적으로 만들면서, 현실적이어서 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역으로 현실적으로도 만든다. 파격의 미니멀리즘이다.

- 수사가 마무리되고 서민기가 집에 돌아온 뒤 영화는 최보라를 보여준다. 분명히 죽어 시체가 되었지만 아무런 전조 없이 태연하게 등장해 베란다에서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조등을 쳐다보는 씬이다. (순간 나도 조등이 원래 헬륨가스 같은 게 차서 날아오르는 물체라고 생각했다) GV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감독의 경험을 재료로 삼아 만든 "환상적인 꿈"의 씬이고 영화 속에서 최대한 논리적으로 바라본다면 죄책감과 그리움이 섞인 서민기의 꿈이다. 다만 편집의 리듬에서 이 장면은 매우 쌩뚱맞게 느껴지고, 모든 것이 끝난 다음 갑자기 튀어나오기 때문에 보는 이들을 순간 헷갈리게 만든다. 이런 식의 의도된 혼란으로서 조등 씬은 이 영화에 이상한 책갈피로 기능한다. 나열된 텍스트를 따라가다가도 갑자기 덜컥 걸리면서 이 전까지의 흐름 전체를 의심하고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스스로 꺼내게 되고 만다. 이 장면은 어떻게 보아도 어색하고, 그래서 기묘한 돌출점으로서 이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우리는 너무 엄청난 현실을 겪으면 이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현실과 같은 질감의 꿈으로 마음 속 공백을 칠하려한다. 그 반대로, 엄청난 진실 앞에서 무력할 때 현실은 꿈처럼 아련하게 느껴진다. 열린 결말의 가능성이라기보다는, 순간 현실이 진실로 연결되지 않는 불협화음이 이 장면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혹시...? 라는 가능성은 암시하지만 그것이 서민기의 모든 현실을 부정할만큼 압도적인 증거는 되지 못할 것이다. 여태 몰입해온 내러티브를 스스로 뒤집는 것은 그저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서 허무함만을 남긴다)

-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는 완벽한 이해를 부정하는 영화다. 절망과 분노가 서로 싸우고 잡아먹으며 공허만을 낳는다. 끝이 없어서 울지도 못하고, 마침내 찾은 끝에서 울지 않은 채 피를 닦지만 다시 구석에 기어들어가 끝이 없어서 운다. 죽은 이는 평화롭게 하늘을 쳐다보고 산 자는 죽은 자의 흔적을 없애며 변기물 속으로 꺼져들어간다. 가해자밖에 없거나, 희생자밖에 없는 이 영화에 갸우뚱하면서도 일상에 접착된 감정이 뜯겨나간다. 그것은 이 영화가 논리를 뛰어넘는 구간들에서 발생한다. 힘 없는 남편이 갑자기 돌변한 그 순간, 죽은 아내가 날아오르는 조등을 보는 그 순간, 섣불리 동조되지 않는 그 장면들이 엔딩 크레딧 이후에도 가슴 속에서 계속 떠다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먹먹한 감정을 억지로 추스리기가 어렵다. 영화를 보고 나면 서민기처럼 갑자기 오열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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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s elbow
16/04/25 23:20
수정 아이콘
다 떠나서 20살때 본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감전주의
16/04/25 23:32
수정 아이콘
16~17년 전 극장에서 심야영화로 봤던 기억이 나네요..
아무로나미에
16/04/25 23:51
수정 아이콘
우리가 멍청하다 느낀 캐릭터는 자기랑 비슷해서죠. 그러니 악인보다 더짜증나요 내가 잘안변하고 캐릭터도 그럴거거든요
영원한초보
16/04/25 23:59
수정 아이콘
이거랑 결혼은 미친짓이다가 작품성이 야한걸 덮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자랑 봐도 나올때 그렇게 안어색 내용 이야기 많이 할 수 있어서
peoples elbow
16/04/26 10:08
수정 아이콘
작품성과 선정성으로 둘 다 갖춘 색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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