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뭐 하나 이뤄놓은게 없는게 당연해라고 넘어온 27. 열한살 엄마의 전축에서 처음들었던 서태지의 "하여가"가 내 삶을 바꿀거라고는 오늘의 나는 생각을 못했었다. 90년생 어린아이의 느낌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그날의 기억은, 만나는 사람마다 "나도 내이야기를 하고 살거야." 라고 떠벌리고 다닌 속초 출신의 어린아이에겐 어제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는 힘이 될거라곤 급똥처럼 눈치챌 수 없는 것 이었다.
2. Be the reds. 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던 02년의 여름에 나도 잘할수 있어. 라는 치기어린 생각으로 그당시 담임선생님 앞에서 처음 불렀던 "Sea of love" 는 "쟤 뭐야 이상해." "왜 이렇게 깝쳐?" 라는 같은반 친구들의 냉소적인 태도앞에서도 스스로에게 잘했어. 라고 위로와 '누군가에게 나를 보여주는 방법' 에 대한 생각을 깊게 했던 한 추억의 페이지다.
3. 지금이야 흔해진 '중2병'이란 단어로 모든걸 설명할 수 있었던 사춘기 시절의 난. 300명이 가까운 야수들이 모여있던 정글속에서도 또 자신있게 꺼냈던건 그당시 친구 mp3에서 들었었던. "왼손잡이" '난 왼손잡이야 ~' 라고 커밍아웃한 비가오던 소풍날의 유원지의 대강당에서 "왜 이렇게 깝쳐" 반. 그리고 "와 저새X 존나웃긴놈이네." 반 그리고 꼬리표 처럼 따라다니던 새로운별명이 될 거라는 건 삼연벙처럼 급작스러운 홍수였다.
4. "왼손잡이"의 충격 사이엔 여러일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의 손에 이끌려다니던 합창단과 시골의 평범한 집안에서 버틸수 없을정도의 큰 액수던 성악수업. 누군가에게 내 감정과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게 부자연스럽지는 않았고 내 재능에 대해 처음생각했던 시간들 이지만. 시간당 10만원이란 돈은 지금 나에게도 매우 큰 돈이었다. 남들보다 조금더 빠른 눈치와 미리 땡겨쓴 당의 힘을 믿던 중학생의 내가 날개짓을 한 곳은 소풍날 유원지의 대강당이 아니던 학교 체육관의 2층무대 전지현이란 배우를 처음알게 해줬던 "I believe"
5. 가장의 추락이 기울게 한건 우리집 뿐만이 아니었다. '난 남들보다 멋져. 잘났거든. 그리고 공부도 꽤해.' 란 오만과 자존심으로 버티던 내가 넘어온 고등학교는 녹록치 않았다. 한창 FD 테란의 열풍이 불던 우리교실안에서도 난 '사파토스' '엽기토스'라는 별칭과 더불어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 당시 내 참고서 공책 심지어 교과서를 채우던건 의미적은 텍스트 'Biggy' 그리고 'Nas' 몇몇의 피부색깔이 다른 사람들의 다른 중얼거림이었다.
6. 희대의 불수능? 축에도 못끼던 고3의 수능에서 다른 앞자리를 받아들던 나에겐 선택권이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레어 저그의 뮤탈? 러커?의 2지선다앞에 덜덜 떨던 프로토스 처럼 돌파구가 필요했다. 가장 먼 곳 그리고 내가 적게 낼수 있는 학교를 찾았었고. 투가스에서 배에 힘을주고 모으던 한방러쉬처럼 꾸역꾸역 또 그자리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버텨냈다. 또 한번의 앞자리가 바뀐 졸업식날 부모님없이 뛰어나간 고등학교. 그리고 집에돌아와서 들었던건. "Lost yourself" 죽여주는 둥둥거림 이었다.
- 뭔가 한페이지의 글로 모든걸 담아내려고 했지만 많은 피쟐러님들이 그렇듯. 저도 잘라보겠습니다. (사실... 분량조절실패에요) 아 지금은 지켜야될게 나라뿐이 아닌 삶을 살고있습니다. 제가 연결한 이어폰엔 이노래가 나오고 있습니다.
항상 자게의 글쓰기 버튼은 무거운것 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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