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미국 내부의 문제는 남아 있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 말이죠. 애초에 개척자들의 나라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서부개척 역시 자연과 인디언과 싸우면서 (-_-;) 이뤄냈죠. 정부의 필요성은 느꼈으니 만들었지만 작은 정부를 원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미국에서 최고로 여기는 가치는 자유니까요. 미국 정부는 이런 자유분방한 자들을 묶어야 했습니다.
19세기, 인류는 새로운 시대로 가고 있었습니다. 혁명을 통해 인권의식이 급성장했고, 산업혁명을 통해 산업구조가 바뀌어가고 있었죠. 애초에 미국의 독립도 스스로 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이런 흐름의 일부였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유럽에서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제도를 없애가고 있었습니다. 노예제 말이죠.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사상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노예제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갈수록 강해졌고, 19세기 초, 프랑스와 영국에서 노예무역을 없애기 시작합니다. 경제적인 이유 (산업혁명으로 노예보다 임노동자가 더 나아졌다는 것) 와 정치적인 이유 (적국을 견제) 도 당연히 있었고 결코 작지 않았죠. 기껏 노예해방 해놓고 되살리기도 했구요. 하지만 결국 노예무역은 (최소한 겉으로는) 없어졌고, 19세기 중반으로 가면서 노예제 자체도 없어집니다. 이런 흐름은 민주공화국, 자유의 나라 미국에도 퍼져가고 있었죠.
미국 북부는 공업이 발달했고, 고관세의 보호무역을 선호했으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남부는 노예가 많이 필요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달했고, 저관세를 선호했으며, 당연히 노예제 유지를 주장했죠.
남부의 면화(목화) 농장. 내륙지방의 면화는 씨와 분리하기 어려워서 해안에서 발달했습니다. 하지만 조면기의 등장으로 내륙에서 난 것도 쉽게 분리할 수 있게 되었고 면직산업이 더 발달하게 되었죠. 규모는 갈수록 커졌고, 그만큼 노예가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이 오히려 노예의 수요를 늘리게 된 것이죠.
북부는 이민을 계속 받아들이며 성장했고, 인구에서도 남부를 압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노예해방 움직임은 갈수록 거세졌죠. 이에 맞서 남부는 노예제를 지키면서 북부에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영토가 늘고 새로운 주가 들어오면서 이 힘싸움은 커졌고, 노예주들은 연방 탈퇴까지 주장했죠. 연방정부에서는 이를 어떻게든 봉합하려 했습니다.
이것을 주도한 게 휘그당의 헨리 클레이. 그는 노예해방론자였지만 그부터가 노예를 거느렸고, 바로 폐지보단 점진적인 폐지를 주장했죠. 죽기 전에 노예들을 해방했구요. 노예해방을 주장하거나 동의했던 많은 정치인들이 이런 식이었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해야겠지만 남부를 무시하고 강행할 수는 없다는 것이요.
그가 주도해서 타협안을 낸 것이 1820년의 미주리 협정입니다. 자유주와 노예주의 비율을 1:1로 맞추는 것이었죠. 일단 이렇게 급한 불은 껐지만, 갈등은 계속 남아있었죠. 다음으로 터진 건 멕시코와의 전쟁 이후였습니다. 캘리포니아 등 새로 편입된 주들은 남쪽이었지만 자유주였죠. 이 때문에 또 논란이 일어났고, 헨리 클레이가 다시 나서서 타협을 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성공하지 못했죠.
일이 제대로 터진 것은 영토 가운데에 있는 캔자스였습니다. 1854년에 네브라스카와 함께 준주(territory)에서 주(state)로 승격되게 됩니다. 이게 또 자유주가 되느냐 노예주가 되느냐의 문제가 생겼죠. 미주리 협정으로 보면 자유주가 되어야 했지만, 세력균형이 깨질 위험이 있엇습니다. 당시 이 문제를 맡고 있던 민주당의 상원의원 스티븐 더글라스는 새로운 걸 내밉니다. [국민주권]의 원리 말이죠.
간단히 말해서 주민들의 투표로 결정하자는 거였죠. 이러면 되겠지 했는데... 피를 부르게 되었죠. 미국 한가운데, 자유주의 한가운데에 노예주가 생길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노예제 찬성자들이 잔뜩 몰려가서 노예주로 만들어버린 것이죠.
이에 맞서 노예해방론자들이 맞섭니다. 아예 자기들만의 주정부를 만들기도 하면서 말이죠. 양측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유명한 것이 존 브라운, 강경한 노예해방론자였죠. 5명을 죽이고 노예해방을 위한 봉기를 계획했지만, 진압당합니다. 너무 강경해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의 편을 든 해방론자는 (정치인은 물론이고) 없다시피했고, 현재도 평이 갈리는 편입니다. 전쟁할 때야 북군의 아이콘이었지만요. 흥미로운 게 그를 진압한 사람이 바로 로버트 리라는 것.
이렇게 캔자스에서 지속적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납니다. 59년까지 총 56명이 죽었다고 하죠.
한편 57년에 그동안의 타협을 뒤흔들 판결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판결입니다. 드레드 스콧은 노예였지만 그의 주인들이 노예가 불법인 북부에 오래 있었기에 해방을 요구했고, 주인인 샌드포드(남편은 죽었고 아내만 남아있었죠)는 거부해서 법정으로 가게 됩니다. 미주리주 지방법원에서는 스콧이 승리하지만 대법원에서는 패하죠. 이에 연방지방법원을 거쳐 대법원까지 갔지만 결국 패소합니다. 노예주 출신인 로저 토니는 "노예 흑인도, 자유 흑인도 미국 시민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은 연방법원에 제소할 권리가 없다"라고까지 했습니다.
노예 한 명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흑인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였고, 자유주와 노예주를 가른 미주리 협정 자체를 위헌으로 보게 된 판결이었죠. 양측의 갈등을 더욱 가열시킨 판결인 것이죠.
+) 스콧은 패했지만 스탠포드는 노예해방론자와 재혼했고, 여론에 밀려 그를 전 주인에게 보내줍니다. 전 주인도 해방론자라서 결국 해방됐다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유행하고 있는 소설이 있었으니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죠. 해리엇 비처 스토가 52년에 발표한 책입니다. 흑인 노예들의 비참한 삶을 그린 이야기... 이게 해방론자 사이에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그녀는 흑인의 어머니라는 별명까지 받게 되었죠.
양측의 갈등은 계속됩니다. 북부에서는 남부의 노예들을 탈출시키는 조직(Underground Railroad 지하철도)이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남부에서는 이걸 막으려고 도망노예법을 계속 강화하려고 했죠. 그럴수록 북부는 더 강경해지고 남부도 더 강경해지고... 애초에 한 나라 안에서 이게 공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저 시간을 벌고만 있을 뿐이었죠. 남부는 어차피 힘에서 북부에 밀렸습니다. 노예부터 관세까지 여러차례 자신들의 주장을 요구하며 맞서긴 했지만,
정치인들도 결국 갈라집니다. 휘그당이든 민주당이든 양쪽으로 갈라져서 싸웠고, 휘그당은 아예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탈당해 공화당을 세웠고, 대통령까지 내게 되었죠.
그가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수염 없으니까 참 어색하죠? (...)
우리가 아는 링컨의 낙선의 인생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55년에 상원의원 낙선, 56년 부통령 후보 경선 낙선, 58년 상원의원 낙선까지... 뭐 그래도 마지막 낙선 때 위의 스티븐 더글라스와 여러차례 토론회를 열었고, 노예폐지론자로 큰 인상을 주긴 했습니다.
+) 이 때 더글라스가 "링컨은 두얼굴의 사나이"라고 깠는데, 링컨이 "내가 두얼굴이 있다면 지금 이런 얼굴로 왔겠냐?"고 맞섰다 합니다. (...);;;
그리고 이어진 1860년의 대선, 링컨은 불과 39%의 득표율로 대통령이 됩니다. 민주당이 남북으로 쪼개졌기에 이길 수 있었죠. 북부 민주당의 후보는 바로 위의 스티븐 더글라스였습니다. 그 오랜 낙선의 끝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역시 쉬운 길은 아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다음 길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지 불과 한 달 후, 전쟁이 시작됩니다.
+) 더글라스는 노예제 문제에서 "국민주권의 원리에 따라 국민들의 투표로 결정하자"는, 정말 중립적이게 나왔지만 덕분에 양쪽에서 다 까이게 됩니다. 그가 중시한 건 미국은 하나여야 한다는 것, 링컨의 적이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링컨의 편을 들어 전국을 돌며 연설을 했고, 30만에 달하는 의용군을 모집했다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정치인으로서 재기를 꿈꾸기도 한 모양이지만 곧 죽었다 합니다.
북쪽의 연방으로 남은 자유주, 남쪽의 탈퇴해 독립한 노예주, 그리고 노예주지만 연방에 남은 경계주의 구분입니다. 준주들 역시 저 선대로 북쪽은 자유주였고 남쪽은 노예주였습니다.
제퍼슨 데이비스
연방 정부는 노예주의 이탈을 막기 위해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건 이제까지처럼 선을 그어서 어느 주의 노예제는 인정하겠다는 수준이었습니다. 대통령도 의회도 다 넘어간 마당에 노예제 페지는 시간문제일 뿐이었죠. 결국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7개 주가 연방을 탈퇴, 1861년 2월에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만들게 됩니다.
이들이라고 바로 전쟁을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바란 것은 남부 독립의 승인이었죠. 하지만 연방 정부와 새로 대통령이 된 링컨은 연방의 분열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분열된 집안은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이걸 막기 위해, 링컨은 고심 끝에 남부 해체를 전쟁을 결심합니다.
이것이 American Civil War, 미국에서는 그냥 The Civil War로 불리는 미국 남북전쟁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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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관련한 책으로는 박정기가 쓴 남북전쟁과 김준봉이 쓴 이야기 남북전쟁이 있습니다.
박정기 남북전쟁은 이야기책 읽듯이 편한 맛이 있고 전투 자체만이 아니라 각종 수기 등이 인용되어 있어 남북전쟁 당시의 분위기도 느끼기 좋은 반면, 책 곳곳에 쓸데 없이 들어간 글쓴이 자신의 종교관이나 사상이 읽는 사람 오글거리게 만드는 문제가 있습니다.
김준봉 남북전쟁은 깔끔하고 전투 자체에 대해선 박정기 책보다 자세한 반면, 좀 딱딱하고 전투 이외의 정치적 상황이나 이런 건 미흡하고 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내용이 적습니다.
남북전쟁에 관심이 가시면 저 두 책 다 중고로 아직 구하기 쉬운 걸로 아니 한번 찾아보시면 어떨지요. 넷플릭스에 있는 남북전쟁 다큐멘터리도 볼만하더군요.
박정기 장군 책은 정말 잘 썼는데 사소하지만 치명적이기도 한 문제가 있습니다.
연도나 등장인물들 나이에 관하여 여기저기 오타가 많거든요.
이분 서술대로 계산하면 남들 중학교도 안 갔을 시기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가 나중에 이상한 부분을 발견하고 백과사전 사이트 참고해 가면서 연필로 가필해가면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특히 링컨 사망일자를 두 개로 나눠서 기재하시는 바람에(물론 하나는 완전한 오기) 링컨 대통령을 두 번 죽이시기도 했지요.
제가 텍사스 살다보니 텍사스 역사를 조금 알게 되었는데, 텍사스를 멕시코로부터 독립시킨 영웅이 샘 휴스턴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텍사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죠 (조지 워싱턴의 마이너 카피랄까요?). 이 양반이 이후 텍사스와 미국의 병합 역시 주도한 뒤 텍사스 주지사가 되었는데, 이 분은 남북전쟁에서 남부 연합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거절때문에 텍사스 의회에 의해 탄핵되어서 주지사 자리에서 쫓겨났지요.
당시 링컨이 '널 지원하는 5만명의 군대를 보내줄께' 라고 거래를 제시했는데, 텍사스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거래를 거절한 뒤 그냥 평화롭게(?)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왜 남부 연합을 지지하지 않는지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는 군중들에게 연설하기를,
"전쟁 안됨. 우리가 이길 리가 없음요. 북부 놈들은 우리 남부인에 비해서 약해 빠진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걔들도 근성이 있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는 나름 강력할 거임. 우리 수십만 죽을 거임. 안돼요 안돼"
남북전쟁 내내 북군이 역량을 다한적이 없었죠. 기껏해야 40% 정도 썼을까요? 인구가 넘사벽이라 남군에서 리와 잭슨같은 훌륭한 지휘관과 사냥으로 단련된 스나이퍼 부대도 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예비군을 편성해서 원상복구... 남군은 누적되는 피해 + 그랜트의 초토화 작전에 조금씩 밀리면서 결국 지게 되는...
그러게요. 어렸을 때 처음 남북전쟁 배웠을 때만 해도 양쪽이 대충 비슷한 국력인 줄 알았는데, 이건 뭐 답이 안 나오는 전쟁이었더라구요. 무슨 정신으로 이런 짓을 했는 지 의문입니다. 하긴 처음에는 전쟁을 원했다기 보다는 독립을 원했던 거긴 한데, 미국은 초창기부터 땅 욕심이 큰 집단이었던 지라, 분열을 허락할 리가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