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가자니까? 아직도 망설이는 거야?”
“그래그래, 가자, 가!”
“오케이~ 그럼, 형은요?”
“나? 나는 뭐... 그래 같이 가지 뭐...”
내 친애하는 동기 황 일병은 4-2부대 유흥 문화의 선두주자였다. 미국에서 6년간 살다가 입대한 유학파 황 일병은, 파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가는 유흥광이었다. 반면 입대 동기 중 황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밤 문화와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모범생들이었다. 나는 과학고-카이스트를 거쳐온 사람이 보통 그렇듯 놀 줄 모르는 범생이였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실패하고 느지막이 군대에 온 J 형은 평생 여자 손이라고는 엄마 손밖에 못 잡아봤다는 모태솔로였다.
황은 그런 우리에게 클럽의 아름다움을 전파하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은 그야말로 최고라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 DJ들이 오랜만에 내한하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황은 잔뜩 흥분해 열변을 토했고, 우리는 마침내 설득 당했다. 그리하여 클럽 죽돌이와 완전 초짜 두 명이라는 기묘한 조합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같이 1박 2일 티켓을 끊었다.
마침내 디데이. 우리는 아침 일찍 청량리역에서 만나 양평으로 가는 중앙선을 탔다. 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제법 많았다. 개중에는 형광색 티셔츠나 꽃무늬 남방 등 튀는 옷을 입은 사람도 몇 있었다. 십중팔구 우리처럼 디제이 페스티벌 가는 사람일 거라고 황이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너희는 왜 이렇게 얌전하게 입고 왔냐고 타박을 준다. 나는 잠시 주눅이 들었지만, 짓궂은 농담이라는 걸 알기에 곧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황은 오늘 자기가 실력 발휘 좀 해서 니들에게 예쁜 여자 하나씩 꽂아 주겠다고 호언장담한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황도, J 형도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양평역에서 지하철에 가득 찼던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행사장 찾아가는 길이 꽤 복잡해서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인파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월디페 행사장이 보였다. 입구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 예약한 이름을 대고 손목에 차는 팔찌 형 입장권을 받았다. 그렇게 들어간 행사장은, 과연 아시아 최고라고 자부할 만큼 으리으리했다. 초대형 스테이지가 다섯 개에, 끝없이 보이는 행사용 천막, 그리고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비행선... 놀이공원에 처음 온 어린이마냥, 우리는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심지어 평소에 소심하던 J 형도 감탄사로 비속어를 내뱉고 있었다. 내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정말 멋진 광경이란 것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이제 놀면 되냐고 묻자, 황이 메인이벤트는 오후부터 시작이고, 또 아직 받을 것도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황이 텐트를 예약했었다. 아무래도 클럽 초보들은 1박 2일을 밤새워 놀기 힘드니 놀다 지치면 텐트에서 자라는 숙련자의 친절한 배려였지만, 나는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자겠어? 라고 반문했다. 다분히 허세 끼가 있는 발언이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이왕 왔는데 제대로 놀아 보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지정된 캠핑장에 텐트를 치고, 밖으로 나가 늦은 점심을 먹으며 개막을 기다렸다. 강하게 내리쬐던 오후 햇볕도 한풀 꺾이자, 메인이벤트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시작되는 강렬한 비트. 모두가 스테이지를 바라보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고개를 까딱이며, 또 누군가는 손을 흔들며. 점점 bpm이 올라가자 어느새 모두가 뛰고 있었다. 귀를 찢을 듯한 리듬에 맞춰서 그저 뛰고, 또 뛰고.
사실 나는 월드 DJ 페스티벌이 일종의 큰 클럽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창피당하지 않으려고 몰래 클럽댄스를 연습했었다. 기본적으로 춤을 즐기지 않는 나에게 춤을 추러 간다는 건 꽤 큰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도 그런 춤을 추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자연스럽게 음악에 홀려서 뛰고 있을 뿐이었다. 큰 안도감을 느꼈다. 사람들이 클럽을 좋아하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남들 시선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뛰고, 또 뛰었다. 지칠 때쯤 되면 잠시 스테이지를 벗어나 군것질 좀 하다가 또 뛰고, 레드불과 보드카를 섞은 폭탄주를 마시고 또 뛰고.
와, 정말 힘들더라. 5시에 시작했는데,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같이 놀던 J 형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체력이 방전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좀 쉬고 싶었지만, 황은 세계랭킹 1위에 빛나는 티에스토 공연은 봐야 한다고 나를 만류했다. 언제 하냐고 물었더니 새벽 2시라더라. 덧붙이는 말이 그때가 피크타임이란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새벽 2시가 피크타임이라고! 클럽 죽돌이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나는 도저히 그때까지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텐트에서 좀 쉬다 오겠다고 하고 스테이지를 벗어났다. 체력 방전과 술기운이 겹쳐 다리가 후들거렸다. 얼른 텐트에 가서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새삼 황의 선견지명에 감사를 느꼈다.
비틀거리며 캠핑장에 도착했지만, 화려한 조명 때문에 그나마 앞이 보이는 스테이지와는 달리 캠핑장은 깜깜한 암흑이었다. 다행인 것은 낮에 길을 좀 봐 놓아서 우리 텐트를 찾을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핸드폰 불빛으로 길을 밝히며 더듬더듬 텐트를 찾았다. 그러고는 풀썩 쓰러질 요량으로 지퍼 문을 열었다.
“어, 어? 너... 너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나는 얼어붙었다. 당황한 듯한 목소리는 J 형이었지만, 누군가 한 명이 더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실루엣은 분명 여성이었다. 정황상 어떻게 된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미안하다고 사과한 다음, 조심스레 지퍼를 닫았다. J 형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문을 닫고 텐트에서 멀어지면서, 아직 남아있던 클럽의 열기가 순간적으로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난데없는 소외감과 외로움이 엄습했다. 우습게도, 나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황은 지금 자기가 좋아하는 클럽 음악에 푹 빠져 있고, J 형은 놀랍게도 처음 보는 여자를 데리고 와서 재미 보고 있는데,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놓고 뛰어놀던 클럽 스테이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쿵쿵대는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멀게 들렸다. 결국 나는 즐기는 척 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곳이 없어 다시 스테이지로 돌아가는 자신이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서울로 가는 첫 차는 새벽 4시였지만, 나는 혼자서 지하철역으로 돌아갔다. 아직 열리지 않는 개찰구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온갖 잡생각이 다 들었다. 시간이 정말 느리게 흘렀다. 하지만 다시 행사장으로 돌아갈 용기는 없었고, 결국 나는 3시간을 더 기다려 집으로 돌아왔다.
솔직해지자.
나는 처음부터 페스티벌에 가는 것이 무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겠다고 결정한 것은, ‘잘 노는 것’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해 보고자 했던 다짐과 J형의 존재 때문이었다. 나는 나와 같이 두려움에 떨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 안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J형이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 내 열등감은 증폭되었고 더 이상 나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내 클럽 공포증, ‘잘 노는 것’에 대한 열등감은 현재진행형이다. 고치고자 해서 고쳐지는 게 아닌 모양이다. 생긴 대로 사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