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카친스키 그리고 치밀하게 조여오는 복수의 칼날
폴란드의 2015년 총선은 결국 5년 전 참극이 75년 전 트라우마까지 일깨우면서 폴란드 전역을 애국과 매국으로 나누었으며, 여기에 난민 문제가 불거지면서 민족주의와 친EU(친독일) 세력의 대결까지 가세하였습니다.
총선 결과로 투스크가 속했던 집권 중도파 Civic Platform이 복수를 다짐한 카친스키가 이끄는 법과정의당에 100석 가까이 뒤지며 참패하고 정권을 내줘야 했습니다.
* 2015년 10월 총선으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법과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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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정의당(PiS)의 선거 승리 후 모습은 정말 복수의 날만 기다려온 증오와 분노로 똘똘 뭉친 서부시대 주인공의 복수극을 떠오르게 할 정도였습니다.
우선 카친스키 전 총리는 주변의 우려(특히 EU)를 의식하고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대리인을 지명하여 총리로 내세우는 등 처음에는 유화적 모습을 보였습니다.
* 카친스키 전 총리(우)와 새로 총리가 된 Beato Szydlo(좌)
http://www.economist.com/news/europe/21679494-two-weeks-polands-new-government-making-europe-nervous-return-awkward-squad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자 이내 수년간 마음 속에 품었던 복수의 칼날을 빼들었는데 우선 요직의 인사들(임기가 있는 경우 포함)과 공기업(증권거래소까지)의 수장들을 한꺼번에 퇴임시키고 자파 인사로 채웠으며 자신들이 차지한 의회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헌법재판소의 판사들을 교체하고 한발 더 나아가 의결 조건을 2/3 이상으로 올리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무력화 시켰습니다. (의회에서 통과한 법안을 친여 재판관들과 까다로운 의결 조건을 통해 헌법재판소가 견제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제 제도적 걸림돌이 어느 정도 해결되자 커튼 뒤에 있던 카친스키는 언론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2015년 12월 31일 폴란드 의회는 EU의 간곡한 우려를 담은 편지를 무시하고 언론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법 통과로 폴란드 재무장관이 공영 TV와 라디오 방송사의 인사권을 갖게 되면서 이들 방송사들은 실질적인 국영 방송사로 전락하였고 기존 경영진은 이에 항의하며 사임하였습니다. 물론 카친스키나 그 추종자들이 보기에 기존 언론과 기득권 세력은 민족을 강대국에 팔아넘기려는 매국노들이라고 봤을 것이기에 형식적 민주주의 수호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카친스키는 폴란드가 1989년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공산당 정치국 잔존 세력이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부정부패로 타락한 국가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스몰렌스크의 참사까지 더해지면서 2차 대전 때 처럼 폴란드를 무력화하여 분할 지배하려는 러시아와 독일과 이들 편에서 민족을 팔아넘기려는 민족반역자들을 저지해야 된다는 숭고한 책무(또는 과대망상적 음모론에 대한 집착)를 이행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는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과거사 정리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언론까지 장악한 현시점에서 카친스키는 이제 복수의 칼끝을 스몰렌스크 참사의 주범과 방조자들(자신이 생각하기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제 폴란드 정부는 총리 시절 투스크의 핵심 보좌관 두 명을 포함한 네 명의 전직 관료들을 스몰렌스크 참사에 대한 직무태만을 죄목으로 법정에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다음으로 카친스키는 투스크 전 총리를 법정에 세우려고 주도 면밀한 계획을 수립할 것입니다.
폴란드 정국의 변화가 왜 중요한가?
먼 나라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는 폴란드 정치 상황은 사실 국제적으로도 결코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첫째, 카친스키가 제거하려고 칼끝을 겨눈 투스크 전 총리는 2014년부터 EU의 3대 의사결정기구(집행위원회, 유럽의회, EU 이사회) 중 하나로 EU 정상들로 구성된 EU 이사회의 의장을 맡고 있습니다. 2015년 7월 그리스 사태 수습을 위해 장장 15시간의 마라톤 정상 회의가 이어졌던 당시에도 투스크 의장의 중재 역할이 적지 않았습니다.
물론 메르켈 총리의 후견이 없었다면 투스크 의장의 존재감도 제한되었겠지만 지금처럼 EU가 맞닥뜨린 심각한 현안이 많은 상황에서 투스크 의장이 자국 내 역사 바로 세우기 문제의 희생양이 된다면 EU 지도부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질 것입니다.
* 자국에서 코너에 몰리고 있는 EU 이사회 의장 투스크 전 폴란드 총리
둘째, 폴란드는 1999년 NATO 합류 후 가장 동쪽에서(발틱 3국을 제외하고) 10만 병력을 가지고 러시아와 맞서고 있는 NATO의 핵심 회원국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반러 정서가 강한 법과정의당 정부라고 하지만(즉, 친푸틴 성향의 그리스 치프라스 정권이나 헝가리 오반 정권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반EU 성향이 강하고 민주주의 질서 유지보다도 과거사 정리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보니 어떤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특히 집권 후 주요 보직을 교체하면서 NATO와 매우 밀접한 정보당국의 수장을 임의로 바꾼 것은 NATO와의 관계에도 어려움을 더할 전망이며 NATO의 전략 수립에도 먹구름을 예고할 것입니다.
* 나토 회원국의 방위비 비중과 병력 수: 폴란드는 NATO 동맹보다는 다른데 관심이 있는 터키와 그리스를 제외하면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다음의 군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폴란드는 EU 6 번째 경제대국으로 2004년 EU의 동방 확대 전략으로 EU 울타리에 들어온 10개 국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폴란드는 그동안 EU 확대 전략의 확실한 성공 사례로 여겨졌었습니다. EU가 서유럽 일부 부국의 폐쇄적 리그가 아닌 그 풍요함과 민주적 질서를 주변에 파급시킬 수 있다는 생생한 모범사례가 바로 폴란드였던 것입니다.
단적으로 막대한 금액이 소요되는 EU 연간 예산 중 가장 많은 순지원금(EU 교부금-EU 납부금)을 받는 나라가 폴란드입니다. 아무리 그리스에 지원을 몰아준다고 해도 그리스 순지원금은 폴란드가 타가는 금액에 비해 반에도 못 미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EU로서는 가장 많은 돈을 퍼부어 주었음에도 지금과 같은 반EU 성향의 민족주의 정권이 들어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물론 돈이 전부가 아니겠지만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특히 순지출금이 많음) 납세자의 돈을 모아다가 폴란드의 인프라 투자에서 행정 서비스 개선까지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EU 체제의 가치(언론의 자유)를 무참히 훼손하고 공동의 숙제인 난민의 부담을 대놓고 거부하는 폴란드 정부를 방치한다면 당장 Brexit 투표를 앞둔 영국과 국민전선이 약진하고 있는 프랑스는 물론 가장 많은 금전적 부담을 지고 있는 독일의 납세자들마저 EU 체제에 반기를 들 것입니다.
* 2013년 EU 회원국의 EU 예산 납부금 및 지원금 비교
결과적으로 폴란드 카친스키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EU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적어도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급기야 EU는 폴란드 정부의 언론 탄압과 민주주의 질서 후퇴에 대해 조사에 착수하였는데 만약 심각한 훼손이 확인된다면 2014년 신설된 EU 조약 7조(그 강력한 효력으로 인해 nuclear option이라고 불림)에 의거하여 폴란드의 EU 투표권을 정지시키는 사상 초유의 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폴란드 법과정의당 못지않은 언론 탄압을 자행한 헝가리의 오반 정권에 대해서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한 EU가 이제 와서 폴란드에게 강제력을 행사하기는 여러모로 명분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폴란드의 법과정의당 정권은 EU(또는 NATO까지)가 사실은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2015년 그리스에 이어 재확인시켜주는 또 다른 유럽의 저승사자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폴란드 신임 총리 Szydlo는 EU 관계에 대해 특별 대우를 하지 않겠다고 발언하였습니다.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우리의 권리라고 하면서 이전 정권들이 EU 하자는대로 일방적으로 끌려다녔음을 비판하였습니다.
* 커튼 뒤의 실력자 카친스키는 독일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가겠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