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한 게이 커플에 관한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그들은 수십 년을 함께해온 노신사들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연인 곁에서 보호자가 되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법적으로 부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거주하는 주는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곳이 아니었고, 결국 연인의 보호자가 되어주고자 그들은 법적으로 부자관계가 되었다. 법은 그들이 부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다. 그들이 합법적인 '가족'이 되는 방법은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입양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사랑은 기꺼이 그것을 감내하게 했다.
그들의 심경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았다. 아무리 법적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에 놓였대도, 아무리 가족이 되어야만 했대도 서로 연인인 그들이 법적으로나마 부자관계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분명 그들도 조금은 망설였으리라. 그러나 사랑 앞에서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싶다. 내가 그들과 같은 상황에 놓였더래도, 결국엔, 나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그리고, 미안해했겠지.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아주 오래전 일이다.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여자가 있었다.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여자도 많았고 실제로 같이 살았던 여자도 몇몇 있었지만, 정말 '반려자'로서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나는 그녀와 결혼을 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철딱서니 없게도, 나는 그녀에게 종종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떠들어댔다. 신혼여행은 제주도에서 한 달쯤 보내고 싶다는 둥, 반지는 항상 끼고 다닐 수 있게 보석 박힌 거 말고 심플한 것으로 하고 싶다는 둥, 신혼집 인테리어는 어떻게 하고 싶다는 둥 하는, 정말이지 철이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 없는 말들을 그녀의 품 안에서 쫑알거렸다. 그녀에게 비수 같았을 말들을.
그녀는 내가 결혼과 관련된 얘기를 할 때마다 묵묵히 듣기만 했다.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처음이라서 그랬을까, 나는 정도를 모르고 계속해서 헛꿈을 꾸어댔다. 십 년 뒤에는 같이 이렇게 살고 싶다, 이십 년 뒤에는 시골 내려가서 마당이 있는 집을 짓고 조용히 살고 싶다, 하면서 혼자 꾸어서는 안 될 꿈을 꾸었다. 그것이 말 그대로 '꿈'일 뿐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꿈은 꿔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꿈 꾸는 게 죄도 아닌데, 어차피 안될 꿈이지만 꿈으로나마 행복하면 좀 어때. 뭐 그렇게 생각했었나 보다. 내가 그렇게 헛꿈을 꿀 때마다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녀도 나의 꿈에 동조한다고 착각했었나 보다. 그때 나는 정말 철이 없었다.
당시에 나는 제주도에 가 본 적이 없어서,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가는 것이 꿈이었다.
여름 휴가를 얼마 앞두고, 그녀가 휴가 기간을 맞추어 제주도에 다녀오자는 말을 꺼냈다. 나는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그녀와 둘이서 제주도에 간다는 사실에 들떴다. 신혼여행을 가는 것만 같아서 휴가 기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여행 준비를 했다. 그녀를 졸라 커플티도 샀다. 그녀도 나도 평상시엔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우릴 이상하게 쳐다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들었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커플티를 입고 기념사진이라도 찍고 싶다는 욕심에 그녀를 졸랐고 그녀는 조금 고민했지만 결국 내게 져주었다. 커플티는 아니었지만, 제주도에서 입을 옷도 모두 새로 샀다. 똑같은 옷은 아니되 코드는 맞춰서 날짜별로 입을 옷을 고르고 또 고르는 나를 보며 그녀는 웃어주었다. 여행 3일 전부터 짐을 쌌다가 풀었다가 하는 나를 볼 때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4박 5일 동안, 나는 제주도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그녀와 보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고 그녀와 하는 모든 것들이 즐거웠다. 천국에 가면 이런 느낌인가 보다 싶다며 나는 방방 떴다. 그녀도 햇살처럼 웃었다. 밤에 사랑을 나눌 때도, 그녀는 평소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속삭였다. 나는 정말로 신혼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커플티 입고 사진 찍기도 했다. 나흘 동안 나는,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눈뜨자마자 마주친 그녀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녀는 나를 안은 채 오랫동안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않고 내 머리칼만 매만졌다. 웬일인지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이 꼭 울 것만 같아서,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아주 어렵게, 미안해 라는 세 글자를 내뱉었다. 나는 그대로 울어버렸다. 그녀는 나를 품에 안고 조용조용 말했다. 미안하다고, 그렇게 결혼하고 싶어하는 걸 알면서도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여자여서 미안하다고.
그제서야 나는 내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을 때 그녀가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그걸 꿈꾸는 연인을 보았을 때, 얼마나 미안하고 비참했을지. 얼마나 스스로를 원망했을지. 얼마나 아팠을지. 얼마나 괴롭고 지쳤을지. 철딱서니 없이 불가능한 꿈을 꾸는 내 곁에서 그녀는 그동안 얼마나 다쳤을지.
꿈을 꾸는 것도 죄가 될 때가 있었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꾸는 꿈이, 내 연인에게 얼마나 잔인한 비수였는지를.
퍼뜩, 밖에서 아이를 볼 때마다 어찌할 줄 몰라 좋아하던 내 곁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 때마다, 아이를 낳게 해 줄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내게 미안해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든 이후로, 나는 밖에서 아이를 보아도 전처럼 좋아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또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제주도 여행 이후,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그녀에게 미안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 또한 내 곁에서 아주 많이 미안해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여자라서 그녀에게 해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내가 여자라서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미워했다. 그녀의 곁에 당당히 있을 수 없는 나를, 그녀와 '가족'이 될 수 없는 나를.
사랑했던 만큼, 함께 하고 싶었던 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해했다.
미국 전역에서, 꾸어서는 안 될 꿈을 꾸고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바라던 이들이 이제, 원하는 대로 꿈을 꾸고 바라고 싶은 만큼 바랄 수 있게 되었다. 죄책감 없이, 다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고 그럴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 축하를 전한다. 더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그들이, 이제 기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이상, 미안한 사랑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들이 부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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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중고딩때 교회에서 사귄 아주 친한 친구들과 지금도 SNS로 엮여 있는데 최근에 그들이 올리고 서로 맞장구 치고 있는 글들을 보면서 마음이 참 무거워 집니다. 동성애 반대에 관한 글을 최근에 자주 share하고 있더군요. 일례로 메르스도 박시장의 퀴어문화제 허용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는 글을 올리면서 서로서로 "아멘"을 답글로 달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노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친한 친구들인데 .. 어쩌지 못하고 그냥 보고만 있습니다..
미국이 법적으로 허용했으니 미국 기독교도 좀 수그러들테고 그럼 큰형님 미국을 따라서 한국도 그렇게 될까요?
한국 사회도 제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성애 이슈도 이슈지만, 저런 면에서 한 걸음, 두 걸음씩 진보한다면 결국 사회와 개인의 관계, 국가의 의미, 개인간의 조직적인 증오와 권력의 문제, 이것들에 대해서 정말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거에요. 단순히 저 이슈에만 그치는 일이 아니라 정말로 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기회이자 큰 그림의 교두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