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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6/20 00:05:45
Name 바위처럼
Subject 하늘색 레이스 팬티


며칠 전이었다. 대한민국 전국이 가물다고 난리였고, 서울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시험기간에도 알바를 가는게 짜증났지만, 어쨌든 벌어야 술도 먹고 놀러도 가고 핸드폰비도 내고.. 데이트는 할일이 없어서 다행이고.. 모범적인 알바생이 되면 사장에게 가끔 최반장이 주검사에게 야지주듯 시급 안올려준다고 농도 칠수 있고 그래서 성실히 출근했다. 메르스 때문에 매장 매출이 말이 아니지만 내 시급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은 그래도 좋은 것 같다. 최저임금제 만세! 산업혁명이후 공장법을 지나 투쟁하신 모든 노동자분들께 존경을 담아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그런면에서 난 전태일 평전은 절대 라면 받침으로 쓰지 않는다. 사람은 행동이 중요한 법이다.


쇼핑몰 알바는 개점시간이 일치해서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기 마련인데, 그날은 어째 횡단보도에 단 두사람 뿐이었다. 나와 윗층 옷매장의 옷맵시 좋은 예쁜 여학생.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횡단보도가 바뀌어서 급히 건너는데,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그녀는 아주 짧은 미니스커트 원피스를 입었다. 본의아니게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사람의 걸음걸이는 씰룩 씰룩하다. 뒤에서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엉덩이가 허벅지 근육에 의해 씰룩씰룩한데, 문제는 백팩을 매면 옷이 운동에너지에 의해 조금씩 말려들어간다는 것에 있다. 나는 약 20미터의 횡단보도에서 그러한 운동과정이 실행되는 것을 보았다. 짧은 치마를 입고 따라따라따따따 AOA의 노래가 들리는 듯 하다. 햇볕은 쨍쨍했고, 바람은 한 점 안부는데 팬티는 하늘색이다. 면팬티가 아니고 레이스 팬티였다. 시력이 안좋아서 안경을 한번 닦고 다시 썼다. 하늘색 레이스 팬티였다.


나는 강렬한 내적 갈등에 빠졌다. 횡단보도를 지나 쇼핑몰까지는 또 하나의 횡단보도를 포함하여 아직도 100m가 넘게 남았다. 나는 쇼핑몰에서 매장들을 상대로 도매물품을 납품하는 곳의 배달부였고 그래서 저 집 여성분도 얼굴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서 치마를 지적할 수는 없었다. 다만 왜 남자들이 사각 입었을때 속옷이 꼬이거나 위치가 바뀌거나 하면 거북해져서 바로잡는 스탭을 사선으로 밟듯이 여성분도 분명 그 상황을 인지할거라고 기대를 했고 내 눈이 사륜안이나 사시가 되지 않도록 애써 먼 곳을 바라보았다. 녹턴으로 딸피에게 궁쏘는 걸 참는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 횡단보도까지 갔을때 이미 원피스의 왼쪽 부분은 거의 오른쪽에 비해 비대칭적으로 형성되어 절반의 천쪼가리밖에 남지않았다. 여전히 사람은 그녀와 나 둘 뿐이었다.


나는 꽤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다. 지나가나 사람이 뭘 흘리면 쫒아가서 주워주고, 대중교통에서 자리도 잘 양보한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내가 반드시 지적해줘야 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나는 이걸 어떻게 지혜롭게 이야기 해 줘야 하나 싶었지만, 그동안 읽었던 인터넷 유머글들이 떠오르며 별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땐 솔직하게 말하는 수 밖에 없다. 유머글에선 찌른다거나 옷을 내려준다거나 뭐 뒤에 밀착해서 가려준다거나 그런게 있지만 내가 그런짓을 했다간 높은 확률로 턱이 돌아갈 것이다.


"저기요.."

백팩에 이어폰을 꽂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약간 귀찮은 듯한 표정과 네 안녕하세요 하는 표정이 섞여있었다. 아마 얼굴정도는 알지 않을까. 나는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어갔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그.." 그러자 그녀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위 아래를 쓱 훑어보며 "저 남자친구 있습니다 죄송해요."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예쁘다고 생각하곤 있었다. 근데 빌어먹을 나도 남녀공학 대학생이고 우리학과에 여자애들 되게 많다 예쁜애들도 많다 씨 내가 데이트할 여자도 없고 여자친구도 없지만 그래도 카톡해주는 여자애들도 있고 어 쇼핑몰에 여자애들 되게 많고 밝게 인사나눠주는 애들도 개중에 한 둘 있는데 아니 야 참나 하는 생각은 한참 뒤에 들었다. 그 때는 그냥 엇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다시 그녀를 불렀다. "아 왜요?"

"뒤에 치마 말렸어요."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한 손으로 거칠게 말린 치마를 내렸다. 때마침 횡단보도가 바뀌었고 그녀는 '아 씨X'라는 명언만 남기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제가 아이스께끼 한것도 아닌데 너무하시네..


그 뒤로는 별 일 없이 출근했고, 일을 했고, 퇴근했다. 오고가는 사이에 몇 번 마주쳤지만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주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 하늘색 레이스의 팬티를 보고 한 가지 내면적 변화가 생겼다.

이제까지 관심없던 일본의 판치라 게임들에 호기심이 생겼다. 일본애들이 왜 그렇게 그깟 팬티 보는 씬을 중요하게 여기나, 팬티를 슬쩍 보이는 철학은 일본이 세계 최고다 라는거에 뭐 저런 머저리들이 다있지 싶었는데. 이젠 내가 그 철학에 깊은 흥미가 생겼다.


팬티,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랑 강제로 이별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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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oLaRiON
15/06/20 00:09
수정 아이콘
댓글은 없고 추천만 4개라니 크크크
15/06/20 00:16
수정 아이콘
아래 댓글중에 추천수에 염증을 느끼시더니 쓰신듯 크크크크크크
카미너스
15/06/20 00:15
수정 아이콘
바위처럼
15/06/20 00:19
수정 아이콘
아니 이런걸 주소만 떡하니 올리시면 감사합니다
파우스트
15/06/20 00:29
수정 아이콘
되게 자체로서 흥미로운 글이네요.아랫 글로 보아 글쓴분은 추천을 받고 싶어하시는 것 같은데 글은 확실히 추천을 받을수 있는 소재(...)고 회원들은 댓글 없이 추천만 누르고 간다라... 크크
바위처럼
15/06/20 00:31
수정 아이콘
추천보다는 추게를 가고싶어하는게 맞는데 이 글은 소재가 좀 자극적이고 여성분들이 불쾌할 가능성도 있어서 추게는 포기한 게시글입니다. 다만 거의 한달이상 피지알 자게에 좀 가볍고 해프닝 있는 글을 쓰고싶었는데 소재가 있어도 게으름+의욕없음으로 안쓰다가 시험도 끝났고 소재도 있는데 아래에서 키보드까지 두들기다보니 뭔가 글쓰는 각?도 잡혀서 휘릭 쓰게 되었네요. 생각했던것보다 노잼이긴하지만요..
파우스트
15/06/20 00:35
수정 아이콘
목적이 뚜렷한 글이군요. 좋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궁금한 건, 읽으면서도 딱히 특별나게 재밌는 팬티 이야기는 아니네..하면서 내려갔는데, 나는 왜 추천을 눌렀을까..? 하는 점입니다..
바위처럼
15/06/20 00:36
수정 아이콘
팬티..좋아하세요?
그렇다면 동지애입니다.
파우스트
15/06/20 00:43
수정 아이콘
아뇨;; 팬티 안 좋아하는데요.. 여기 그리고 여초사이튼데 잘 못하다가는...

하지만 그는 곧 팬티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음란파괴왕
15/06/20 00:36
수정 아이콘
조용히 추천드리고 갑니다. 그 안구 혹시 살 수 있나요?
바위처럼
15/06/20 00:36
수정 아이콘
음란파괴왕님이 사시기에는 아직 음란도가 모자랍니다.
대문과드래곤
15/06/20 00:41
수정 아이콘
저라면 말 안걸고 계속 봤... 죄송합니다.
눈뜬세르피코
15/06/20 00:57
수정 아이콘
좋은 글입니다. 조마조마한 심상 묘사가 살아있네요. 추천 쾅!
쿠로다 칸베에
15/06/20 01:14
수정 아이콘
글쓴이가 과연 어떤 심상을 가지고 이런 글을 쓰게 되었나 마냥 그게 궁금해서
[하늘색 레이스 팬티]를 구글 검색어에 입력하고 이미지를 찬찬히 훑어보았습니다
정말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눈뜬세르피코
15/06/20 01:41
수정 아이콘
착한 독자 인정합니다.
하늘색 레이스 팬티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셨네요.
15/06/20 01:16
수정 아이콘
컬트적 추천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죠 크크크
15/06/20 01:28
수정 아이콘
팬티에는 똥이 있어야 재맛이죠.
15/06/20 01:34
수정 아이콘
명문에 추천드리고 갑니다.
서두를 거시적인 논의로 출발해서 개인의 내면묘사와 변화로 마무리하는 그 깊은 내용
현대문화에 대한 깊은 조예와 의학적 관찰력이 엿보이는 문장들
게다가 일반인들과는 다른 결단력과 절제력에 감탄합니다.
15/06/20 04:47
수정 아이콘
한창 소란스러운 이 때에 이런 위트진 글이라니, 두 무릎을 타악 치고 갑니다.
유리한
15/06/20 05:00
수정 아이콘
판치라보다는 브라치라죠.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라요.
22raptor
15/06/20 10:34
수정 아이콘
이부분 정말 표현 쥑입니다.

"아니 뭐 예쁘다고 생각하곤 있었다. 근데 빌어먹을 나도 남녀공학 대학생이고 우리학과에 여자애들 되게 많다 예쁜애들도 많다 씨 내가 데이트할 여자도 없고 여자친구도 없지만 그래도 카톡해주는 여자애들도 있고 어 쇼핑몰에 여자애들 되게 많고 밝게 인사나눠주는 애들도 개중에 한 둘 있는데 아니 야 참나 하는 생각은 한참 뒤에 들었다. 그 때는 그냥 엇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다시 그녀를 불렀다. "아 왜요?"

감동받았네요.. 진심.
15/06/20 14:44
수정 아이콘
크크크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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