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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6/12 02:30:18
Name Venada
Subject [일반] 자학의 기억



1. 중학교 시절, 잔뜩 울분이 올라 커터칼을 든 여동생을 나와 어머니는 심드렁하게 쏘아붙였고, 기실- '제 까짓게..' 하는게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움뿍 나오던 그 피를 나는 아직 기억한다. 제 손목을 부여잡고 울며 집을 나가는 동생을, 아무도. 감히. 붙잡지 못했다.

   분명한 필연성. 당연한 사람이 당연하지 않게되고, 혹은 존재하지 않았던 이가 갑자기 존재하게 된듯, 정해져있다고 생각한 우리 모두의
   자리가 갑자기 그 위상을 달리한다.

   그리고, 피를 닦는 것은 내 일이었다.







2. 열 일곱. 타의로 인한 거의 완전한 독립을 했다. 곧 바로 시작한 아르바이트로 받는 월 40 가량의 수입으로 18만원짜리 고시방비를 포함
   일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또 부끄러움으로 급식비 지원 등의 혜택도 받지 않았지만, 다행히 학교 앞 분식집의 자잘한 일을 도와드리고
   (깨진 유리창을 손봐드린다거나, 문맹이신 아주머니를 대신해 메뉴를 작성해드린다거나..따위) 예쁨을 받아 점심끼니는 그 곳에서 공짜로,
   혹은 저렴하게 해결하곤 했다.

   무더웠던 그 해 여름, 학교 급식이 맛없어서 안먹느냥, 또는 흡연을 핑계로 매일 같이 점심시간이면 학교를 빠져나가  분식집을 가는
   나를 따라나오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더러는 매일 먹는 분식을 포기하고 급식을 사랑하게 된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의 가난을 엿본
   몇 친구들은 그 것을 오히려 모른척 해주려 꾸역꾸역 분식집을 따라나서주기도 했다. (남고의 의리란..)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정말 도저히 내가 그걸 먹을 수가 없어 혼자 화장실가서 거나하게 토사물을 쏟아낸 일이 있다.

   거울을 보고 나는 분명하게 웃었다. 그 때에도 그랬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낮에는 웃고, 밤이면 울었다.
  






3. 스무 살, 아무런 생각도 목적도 없이 호주 땅을 밟았다.

   여전히 낮에는 웃고 밤에는 울면서, 맘 속으로는 간곡히 죽는 날을 기다리던 나날의 연속.

   그 간곡한 나의 날이 오지 않음에, 2 개월만에 거식증으로 7-8kg 가량이 빠졌다.
   하하호호 웃으며 형 누나들과 밥을 먹다가도 화장실에 가서는 곧 바로 토해내곤 했는데, 각고의 노력으로 꽁꽁 숨겼지만 가끔은 완급조절(?)에 실패해 죽을 병에 걸린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영양실조로 오른쪽 귀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내리거나 손톱이 흐물흐물해져 빠지기도 했지만,-
   그게 낮이라면. 나는 웃었다.




   브리즈번 소재의 한 레스토랑 주방일을 하며 알게 된 누나가 나를 집요하게 훝어보곤 해서 단 둘이 술자리를 가진일이 있었는데,
   서울대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석사과정 중 자신 스스로가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아 다 내던지고 왔단다.

   '너 정말 이상해 보여.'
   말 없이 연거푸 두 세잔을 마시더니 하는 첫 마디.
   내 목과 손목은 깨끗했고, 주위에서는 호감을 살만한 유쾌함이나 유머감각 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으니
   그 어떤 명징한 흔적이 없음에 그런 걸 느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에게 조언이 필요해 보이는데, 그러려면 '동정의 소년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알아야 한단다.
   대답도 하기 전에 느긋한 섹스 제안이 따라왔다. 상당히 육감적인 몸매였지만 그 느긋한 성숙함. 여유가 나에게 필요하다 판단해서였을까.
   느긋한 거절과 함께 동정이 아님을 밝혔다.

   그 뒤의 따라온 진지한 조언이 내 삶을 바꿨다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적어도 '왜' 이러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의 필요성을 그 사람이 깨닫게 해주었다.







4. 고통으로 점철 된 삶. 그 삶 안에서 어떠한 것들이 고통으로 승화하는 임계점이 올라갈수록 내 존재는 가벼워진다.
   내가 내 스스로의 멘탈을 극단으로 밀어붙이지 않을 때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내가 내 스스로에게 내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통의 무게에 짓뭉개진 거울속의 웃음을 볼때에, 어두운 퇴근길에 쏟아내는 눈물이, 나를 또 살게하고 또 전율시킴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나는 오대수의 표정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아아, 고통스럽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글에 재주도 없으면서 또 두서없이 배설한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적나라한 사례들은 일부러 적지않았습니다.
다음에는 군대 '그린캠프'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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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러플린
15/06/12 03:39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켈로그김
15/06/12 07:29
수정 아이콘
잘 챙겨드세요. 건강한게 정말 재산이에요..
고통도 건강할 때나 견뎌집니다.
두둠짓
15/06/12 10:27
수정 아이콘
그게 낮이라면. 나는 웃었다.
이 부분이 쨍하게 마음을 찌르네요. 글 잘쓰시는데요.
지금은 어떠신지가 궁금합니다. 괴롭지 않으셨으면...
조과장
15/06/12 10:58
수정 아이콘
적어 주신 글의 내용이 과거이셨기를 바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윌모어
15/06/12 11:09
수정 아이콘
글 잘읽었습니다
너무 스스로에게 몰입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끔 나를 잊고 사는것도 행복의 한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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