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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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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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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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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하얀 세상이었다. 다음에는 노란색과 초록색이 섞여들었다. 뒤이어 검은 색과 주황색이 나타났다. 한참이 지난 후에 뒤섞인 색깔들이 제각기 분리되기 시작했다. 흐릿함이 점점 더 명료하게 바뀌고, 색깔들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이어 선과 면이 하나씩 구분되었다.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얼굴이었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개. 그 얼굴은 입을 벌리고 있었고 거기서 무슨 소리인가가 들려왔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대충 이런 목소리였다.
“야! 내가 보여? 정신이 든 거야?”
당연히 보이지. 하지만 나는 목소리를 입 밖으로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짜증이 나서 나는 온 몸의 힘을 입으로 모았다. 간신히, 간신히 입 밖으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대강 ‘으어어어’ 정도로 들렸다.
“어? 야! 너 말했지! 의사선생님! 얘가 말했어요! 말을 했어요!”
나는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이렇게 시끄러운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친구는 잘 가려 사귀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을 잘 듣지 않은 게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하지만 내가 뭐라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친구는 계속 뭐라고 고함을 질러 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 몰라. 나는 잘 거야.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의사는 내가 깨어난 것이 기적적인 일이라고 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다시 살아날 확률이 50%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50%면 반반 확률인데 그거 가지고 무슨 기적입네 하나 싶었지만, 거울을 통해 내 머리에 선명하게 남은 수술 자국을 확인한 후 나는 의사의 말에 동의하기로 했다. 손톱만한 길이로 짧게 자라난 머리카락 사이로 길고 큼지막한 흉터가 뒤통수에서 정수리를 거쳐 이마 가까이까지 내달리고 있었다.
내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은 일주일가량이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신 나의 수술동의서에 사인한 사람은, 그리고 내가 깨어날 때까지 매일 내 곁을 지켜준 사람은 바로 내 친구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다시는 이 친구를 욕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다짐은 대략 오 분 정도 유효했다.
“뭐라는 거야, 미친년아.”
“시끄러워. 여자친구가 깨어났으면 당연히 남자친구를 불러야지.”
“누구 멋대로 남자친구야?”
“그럼 아니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고개를 외로 꼬았다. 혼수상태에 있었던 동안 나는 꿈을 꾸었다. 죽어서 유령이 된 나를 녀석이 불러낸 꿈이었다. 무당 귀신이 나를 불러냈고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그걸 도왔다. 여고생 정도로 보이는 그 무당귀신을 통해 죽은 나는 살아있는 녀석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다. 어딘가 허술한 설정이었지만 꿈치고는 그럴 듯했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나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더러 녀석에게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질문을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너, 나랑 사귈래?’
그 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마치 방금 전에 있었던 일처럼 너무 생생했던 탓이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내가 병원 침대에 누워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녀석이 문을 거세게 밀어젖히고 폭풍처럼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발을 헛디디기라도 했는지 공중에서 녀석의 몸이 크게 반 바퀴 돌았다. 머리부터 떨어지며 쿵 소리가 나는 바람에 나는 찔끔했다. 그러나 녀석은 바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 녀석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선배!”
“아이고 눈꼴 시려라. 어디 커플 아닌 사람은 서러워 살겠냐.”
친구가 투덜거리면서 나를 쳐다보더니 슥 병실 밖으로 나갔다. 나가려면 얌전히 나갈 것이지 눈은 왜 찡긋하고 지랄이람. 그러나 나는 친구에게 뭐라 말할 계제가 아니었다. 녀석이 양팔로 내 몸을 휘감은 채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아파.”
“아프다니까.”
“아프다고!”
세 번이나 말한 다음에야 녀석은 간신히 내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러고 보니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린 탓에 녀석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옆에 놓인 티슈 곽을 들어 던졌다. 녀석은 티슈를 너덧 장 뽑아 한참 동안 얼굴을 훔쳤다.
“선배, 괜찮아요?”
한참 동안이나 어색한 침묵이 감돈 끝에 녀석이 한심할 정도로 몰개성적인 대사를 뱉어냈다.
“네 눈에는 내가 괜찮아 보이냐?”
“아뇨.”
“그래. 안 괜찮아.”
녀석이 코를 훌쩍이다 말고 어설프게 웃었다.
“그래도 살아 있잖아요.”
“어, 그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본 적이 있는 얼굴이 머리를 디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어?”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꿈속에 나왔던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한손에 큼지막한 꽃바구니를 든 채 병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녀석에게 그 꽃바구니를 건넸다.
“바리가 꼭 사다 주라고 하더군요. 분명 깜빡할 게 틀림없다고요.”
“아........ 고, 고맙습니다.”
녀석이 당황해하며 꽃다발을 받아들고는 잠시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내밀었다.
“자. 내 놔.”
“예?”
“어차피 나 줄 거잖아. 아냐?”
“마, 맞는데요.”
“그러니까 내 놔.”
녀석은 어색한 자세로 내게 꽃바구니를 내밀었다. 나는 코앞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어차피 장미와 안개꽃 말고는 뭐가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좋은 향기가 났다.
“고마워.”
녀석이 해맑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 어딘가가 짜르르 떨려와, 나는 부러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남자가 병상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멍청하게 들리는 질문을 던졌다.
“꿈이 아니었나 봐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내가 죽었었다고 그랬잖아요.”
“제가 그렇게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다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헛기침을 하더니 의뭉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때 부탁하신 말은 모두 전해 드렸습니다.”
“그대로요?”
“모두 그대로요.”
“죽겠네요.”
“어째서요?”
“쪽팔려서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 번 죽었다 깨어난 셈이지 않습니까.”
역시 나는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남자가 싫다. 남자는 웃더니 살짝 목례해 보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자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스리슬쩍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남은 건 나와 녀석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밤이어서 유리창에 내 모습이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푸른 줄무늬 환자복을 입고, 박박 깎은 머리에다 기다란 흉터가 나 있는 내 모습이.
대체로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았다고 그 남자가 말했었다. 나도 동감이었다.
“너, 저 남자한테 다 들었다고 했지?”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윽박지르듯 말했다.
“그럼 대답해.”
“예?”
내 눈치를 살피던 녀석이 당황하며 말했다. 나는 녀석을 째려보았다.
“대답하라니까. 미리 경고하지만, 똑같은 말 또 하게 만들면 너 죽여 버린다.”
내게는 다행히도, 녀석은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녀석의 입이 헤벌어지더니 이내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몹시 부끄럽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녀석이 말했다.
“좋아요, 선배!”
적어도 녀석이 평생 동정으로 살 일은 없어진 셈이다. 그러니 이 정도면 괜찮은 마무리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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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사실 이 글은 매우 사소한, 그리고 꽤 악취미적인 발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조금 낚아볼까 싶어서 말이지요. 그래서 이번 글을 쓰면서 사람들을 낚기 위한 소품들을 의도적으로 여기저기 배치했습니다. 그게 비교적 잘 먹힌 것 같아 즐겁다고 말한다면 아무래도 제 성격이 나쁘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제가 여러 댓글에서 주창한 바와 같이, 소위 '욕데레 여자선배' 캐릭터를 한 번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판에 박은 듯 뻔하긴 하지만, 뻔하다는 건 결국 그만큼 다수의 인기를 얻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성공적으로 그려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족을 하나만 덧붙이자면 원래 이 이야기는 기담의 일환으로 쓰여졌지만, 첫 번째 에피소드를 올린 후에 조금 고민을 했더랍니다. 아예 새로운 로맨스물로 가 볼까 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포기했습니다. 제가 로맨스를 쓰는 재능이 없기도 하거니와, 기존에 쓰던 기담을 젖혀두고 다시 새로운 걸 시작하자니 양심에 찔려서 말입니다. 변기에 앉았으면 힘을 주어 깔끔하게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이 피지알러의 소양 아니겠습니까. 기담을 끝낼 때까지 열심히 힘을 줘 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