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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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짜증스러운 투로 말했다.
“아, 짜증나네.”
“왜?”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친구는 나를 흘깃 노려보더니 맥주병을 들어 꿀꺽꿀꺽 들이켰다. 이내 병을 비워버린 친구는 손을 들어 한 병을 더 주문했다. 하지만 내 오른손에 들린 병에는 맥주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는다지만 아무래도 나는 예외인 모양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거의 10년 가까지 되었지만 내 주량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맥주 반병이었다.
친구는 새로 받아든 맥주병을 들고 내게 삿대질했다.
“너 좋아한다는 애가 어디 흔할 줄 아냐? 거기서 네가 튕길 계제야?”
“뭘 튕겨. 그냥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으니 그렇지.”
“아이고 그러세요? 대단한 성인 나셨네.”
이죽거리는 친구의 얼굴에 한 대 날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애당초 상담을 신청한 건 나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조금만이라도 더 현명했더라면 이딴 친구에게 상담할 생각을 하진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친구와 알고 지낸 지도 벌써 이십 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고등학교 입학한 날 아침에 멋모르고 아무 자리에나 앉았는데, 별 생각 없는 담임선생은 그 날 학생들이 앉은 자리를 1년 동안 앉을 자기자리로 정해 버렸다. 덕분에 나는 이 친구와 일 년 내내 짝이 되었다. 그 나잇대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처음에는 투덕거렸지만 이내 친해졌고, 석 달 후에는 그야말로 단짝이 되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반이 되었을 때도, 서로 다른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도, 서로 다른 직장에 다니게 되었을 때도 여전히 우리는 단짝이었다. 내가 마음을 털어놓고 상담할 만한 친구를 찾아보자면 사실 이 친구 하나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내 좁아터진 대인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폭풍처럼 일었다.
“내가 인생 잘못 살았네.”
“그걸 이제 알았냐.”
친구는 고개를 내젓더니 갑자기 진지해진 표정으로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 너 솔직히 말해 봐. 너 그 꼬마 좋아하지?”
“무슨 개소리야?”
“솔직히 말하라니까.”
난 슬쩍 친구의 시선을 피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헐렁한 회색 셔츠에다 오래 입은 탓에 꼬질꼬질한 색이 된 청바지를 입고 맨발에 검은 색 운동화를 걸친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꼬마 아냐.”
“어이구, 대단하셔.”
친구가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정신 차려, 이년아. 세상에 너 좋아한다는 미친놈이 하나 더 있을 것 같아? 그런 남자 있을 때 잡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하지만......”
“하지만 뭐? 너 그러다 백방 후회한다니까?”
몰아세우는 듯한 친구의 말투에 나는 그만 신경이 곤두서버렸다.
“야, 이 미친년아. 나랑 걔가 몇 살 차이인 줄 알아?”
하지만 친구는 태연히 대답했다.
“알지. 네가 말해줬잖아. 열두 살 차이 아냐. 네가 서른일곱. 그 꼬마가 스물다섯.”
“알면서 그런 말이 나오냐? 아직 대학교도 졸업 안 한 애랑 사귀라고?”
“뭐 어때. 요즘 세상에 그깟 연상연하 따윈 널리고 널렸어.”
“내가......”
“아 쫑알쫑알 시끄러워 좀!”
순간 친구가 고함을 버럭 지르는 통에 나는 말을 꿀꺽 집어삼키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이 이쪽을 힐긋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친구는 개의치 않았다.
“그만 좀 징징거려. 네가 무슨 말 할지 뻔히 다 아니까. 너 나이 많다고? 직장도 변변찮아서 아직 계약직이라고? 그나마도 잘려서 이젠 백수라고? 무슨 비렁뱅이처럼 옷을 입고 다니고, 화장이라고는 비비크림도 바를 줄 모르고, 입에 걸레라도 문 것처럼 말을 더럽게 하고, 문예창작과 나와서 소설 쓴다면서도 아직 변변한 습작 하나 완성도 못했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방구석에 처박혀서 컴퓨터 게임이나 하는 것밖에 없다고? 기껏해야 그런 말이나 하려는 거면 관둬. 너한테 그딴 이야기는 지겹도록 들었으니까.”
나는 친구의 기세에 눌려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친구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손에 든 술병을 기울여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버리고 말았다. 병 주둥이에서 입을 뗀 친구의 목소리는 다시 원래대로 가라앉아 있었다.
“정신 차려. 네가 그런 형편없는 여자인 줄 그 꼬마도 다 안다고. 네 나이도, 네 직장도, 네 꼬락서니도 다 알고 있을 거 아냐. 어차피 넌 그런 거 감출 깜냥도 없으니까.”
“......사실이긴 하지만 역시 열 받네.”
“당연하지. 들으라고 한 이야기니까.”
친구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더니, 좀 더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마치 천둥처럼 울렸다.
“중요한 건 말이야, 네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년인 걸 알면서도 걔가 여전히 널 좋아한다는 거잖아. 안 그래?”
오랜만에 마신 술 때문인지 얼굴과 팔이 후끈거렸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나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버릇처럼 카톡 메시지를 삼십 분마다 들여다보게 된 것이. 아마도 한참 전부터, 녀석이 종종 새벽에 내 자취방 현관문을 두드려대기 전부터, 녀석이 소주를 잔뜩 들이마신 후 내게 어설프게 고백을 한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녀석을 만난 건 회사에서였다. 나는 2년짜리 계약직으로 온갖 잡다한 업무를 보고 있었고 녀석은 군대를 다녀온 후 6개월짜리 인턴십에 지원해 들어온 차였다. 말이 인턴십이지 부려먹기 편한 대학생들을 잔뜩 뽑아 거의 공짜로 잡무를 시키는 것이었다. 즉 나와 함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대체 왜 나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나로서도 알 방도가 없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녀석은 선배, 선배 하며 친근한 척했지만 나는 노처녀 계약직다운 태도로 깐깐하게 녀석을 부려먹었고, 6개월 후 녀석이 대학교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도 그저 잡무를 대신해 주던 일꾼이 없어지게 되어 아쉽다는 생각뿐이었다. 녀석은 인턴십 마지막 날에 형식적으로 진행된 환송회에서 엄청난 주량으로 다른 직원들을 죄다 기절시켜 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살아남은 사람은 애초에 술을 마시지 않았던 나뿐이었다. 그건 내게 오는 술잔을 모두 녀석이 대신 마셔준 덕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죄다 의자에 쓰러져 잠든 그 선술집 구석에서 녀석은 내게 고백했다. 선배가 좋아요. 나는 대답했다.
“너 취했어. 헛소리 말고 얼른 꺼져.”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 다리가 덜덜 떨린 것을 녀석이 깨달았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한 달 후 한밤중에 녀석이 내 자취방 현관문을 두들겨 댔다. 녀석의 술 취한 연기가 지나칠 정도로 어설펐던 바람에 더욱 당황한 나는 도망치듯 자취방에서 뛰쳐나왔다. 다음날 아침에 돌아간 자취방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내게는 내 방을 종종 찾아주는 우렁총각이 생겼다.
녀석이 왜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건 내게 풀리지 않는 신비한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나는 문득 그 답을 알고 싶어졌다.
카톡이 울렸다.
선배 뭐해요?
나는 나도 모르게 씩 웃고 말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게 내 성격에 맞다. 나는 녀석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나는 내가 녀석에게 전화를 건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어 나는 횡단보도로 발을 내딛었다.
“여보세요? 선배?”
신호가 두 번도 울리기 전에 녀석이 전화를 받았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야. 물어볼 게 있는 데 말이야.”
“뭔데요?”
퉁.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는 데는 시간이 약간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인지 알아챘을 때는 이미 내 몸이 공중에 떠 있었다. 아픔은 없었다. 어쩌면 아픔이 아직 머리까지 도착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 한쪽 구석에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흰색 승용차가 보였다. 저 차가 나를 쳤구나. 외제차 같은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팔자 좋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 멀어졌던 아스팔트 도로가 다시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추락했다.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순간 시야가 어두워졌고 곧 암흑이 나를 덮쳤다. 전화. 내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손에 들린 휴대전화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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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첫 번째 글을 쓰면서 잠시 고민했습니다. 사실 그 짤막한 글의 뒷이야기는 이미 머릿속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쓰고 나니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이어서 쓸까, 말까 하고 고민했더랍니다. 하지만 기왕 쓰기 시작한 거 다 써보자 싶어서 뒷이야기를 올립니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읽는 분들을 세 번 낚을 생각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후배가 남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선배가 여자라는 사실입니다. 둘 다 성별을 의도적으로 감추었고, 남자선배-여자후배, 남자선배-남자후배, 여자선배-남자후배 순으로 추측하도록 이야기를 배치했습니다. 댓글을 보니 상당히 많은 분들이 제 의도대로 따라오신 것 같아 조금 기뻤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낚시는 아마도 완결일 다음 번 글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기대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말이지만, 부디 기대해주시길.
ps) 다들 욕쟁이 츤데레 여자선배 캐릭터 좋아하지 않나요? 저는 좋아하는데요. 흐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