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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0/03 15:18:00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운명을 지배하는 인간, 운명 앞에 쓰러지다 - 워털루 1815 (3)


『백일천하』



 1815년, 엘바에서부터 파리에 이르는 나폴레옹의 여정은 역사상의 영웅담 중에서도 최고봉에 있을 위업이며, '단 한명이 한 왕국을 함락시키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차라리 문학적인 표현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낭만이라는 짦은 순간의 인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흥분의 열기가 하루하루를 지나 조금씩 가라앉으면서, 나폴레옹은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물론 대외상황이다. 퐁텐블로 조약, 곧 나폴레옹을 엘바 섬으로 내쫓은 그 조약은 나폴레옹이 문을 박차고 나옴으로써 폐지되었고, 이제 그는 전 유럽의 '공적인 복수의 대상' 으로써 국제법을 새롭게 그리고 철저하게 적용하는 상대들에 맞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춤추는 회의' 는 이제 다시 가속도를 내어 처치곤란이었던 폴란드 문제를 어느정도 해소했다. 


 나폴레옹은 그들을 교란시키기 위해서 몇가지 수단을 썻고, 그 결과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와 메테르니히는 25분 정도 짦은 불편한 대화를 나눠야 했지만 이들의 병력동원 계획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숙적 중의 숙적 영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나파르트 정권을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러시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프로이센을 포함한 70만이 넘는 전 유럽의 군세가 속속들이 벨기에를 향해 집결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은 전쟁 뿐이었고, 전쟁을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했다. 그러나 라파예트의 말처럼, "저 이집트의 사막과 과달키비르 강, 다흐 강의 강변, 비슬리 강 언저리, 그리고 모스크바의 빙원, 지난 10년동안 그곳에 묻힌 300만의 프랑스 국민" 을 아직 사람들은 잊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6월까지도 국민들이 염증을 느끼고 있는 강제징집을 망설였다. 당시  3월 경 프랑스에서 복무 가능한 병력은 겨우 20만이었으며, 서부 지역에 대한 징병을 실시하자 혁명기간 내내 왕당파의 기세가 강했던 방데에서는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이 시기 프랑스의 병력이 정확히 어느정도였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대체로 파리에서는 다부 원수의 휘하에 2만명, 프랑스 국경 지대를 수비하는 8만 5천여명, 방데 반란을 진압하는 1만명, 북군 12만 3천명의 23만 8천명의 실전 병력 외에 약 11만 5천명의 프랑스 군이 휴가 중이거나 이탈 중이었으며, 4만 6천명의 신병들은 막 소집되어 교육을 받고 있었다. 시간만 있었다면 국경 요새에 소집된 국민방위대도 소환되었겠지만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병사들의 경우에는 그나마 상황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향에서 이질감을 느끼며 맴돌던 고참병들은 군에 돌아오자 물을 만난 고기와 같이 전의가 넘쳤다. 문제는 지휘관들이었다. 장군들은 거의 의욕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플뢰리 드 샤브롱의 말에 따르자면 '사람들의 생각 이상으로 자신의 추억과 습관에 얽매인 황제는' 또다시 군을 예전 지휘관들의 지휘 아래 두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역전의 명장들이 아니었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동안 젊은과 야망을 가지고 계급과 명성을 얻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과거의 장군들은, 이제 전쟁에 지치고 군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적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이나 나폴레옹이 베풀어 준 재산을 즐기며 살고 싶을 뿐이었다. 나폴레옹이라고 그 점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모를 수도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원수들을 더 이상 기용하지 말아라.' 라는 익명의 편지가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와서 다른 지휘관들을 쓰려고 해도 경험 부족이 염려되었다. 결전을 앞에 두고 나폴레옹은 자신을 한번 배신했던 그들을 다시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5월 8일에는 술트를 참모 총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일반 병졸들은 원수들의 비열함에 치를 떨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군의 불신감을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었다. 어떤 늙은 중위는 나중에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 황제에게 충고하기도 했다.


 "폐하, 술트 원수를 조심하십시오. 그 사람은 틀림없이 우리를 뒤통수 칠 인간입니다." 


 아무튼 술트 원수를 기용한 일을 군에서는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술트를 참모 총장으로 기용한 것은 이런 정신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도 올바르지 않은 인사였다. 술트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보여준 것처럼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었지만 참모로써는 검증도 되지 않았고 낙제점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참모라고 하면 떠올리는 인물은 오직 한명 뿐이다. 바로 베르티에였다. 베르티에야 말로 최고의 참모였지만, 그는 원수 직위를 박탈 당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베르티에! 그 망할 자식! 그래, 용서해줘야지. 단 왕실근위대 제복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나야 하네."     


 하지만 베르티에는 6월 1일 밤베르크의 집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 이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뒷말이 무성했지만, 어찌되었건 나폴레옹은 최고의 파트너를 잃어버렸다. 남아있는 원수들 중에서는 알프스 지역 지휘를 맡은 쉬세도 있고, 무엇보다 지금은 죽은 란, 마세나와 함께 최고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다부가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그를 전선으로 데리고 가기 보다 전쟁장관으로 파리에 남겨 두었다. 다부는 아우슈테트에서 경이적인 승리를 거둔 적이 있는 당대 최고의 지휘관 중 한명이었는데, 이  인사 조치에 대해 '나폴레옹이 다부를 두려워 했던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루시는 기병대장으로는 훌륭했지만 독립부대 사령관 경험이 전무했고, 오랫동안 함께한 쥐노는 러시아 원정 이후 미쳐버렸다. 써먹을 수 있는 원수들 중에서는 네이가 활력소가 될만했다. 네이는 용맹무쌍한 지휘관으로써 여러차례 능력을 증명했지만, 그러나 독립적인 지휘관으로써 능력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이 검증되지 않은 인사는 이후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능력은 둘째치고라도 누구에게 충성을 해야할지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네이의 정신은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1815년 네이가 보인 행동에 대해, 군사적 장애로 해석하려는 시각도 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재앙을 경험한 후 파리로 피신했을때, 네이는 러시아 전역에 남아 프랑스군의 후위를 지휘했다. 그 이후로 일종의 '전투 피로증' 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1815년의 네이는 확실히 예측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였으며 군인으로서는 (이후 증명하듯) 효용이 다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나폴레옹은 언젠가 네이가 프랑스 군대의 가장 어린 병사들보다도 이해력이 떨어진다고 불평했으며, 세인트헬레나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에는 워털루 전투 중에 네이가 보인 행동에 - 그리고 활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 거듭 불만을 터뜨렸다. 


 네이가 믿음직스럽지 않다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아예 없는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대체를 넘어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줄 사람이 있었다. 물론 전유럽을 뒤진다 한들 조아생 뮈라 외에 그런 사람이 더 있겠는가?





 조아생 뮈라. 훤칠한 미남으로, 케르시 지방에서 여관 집 아들로 태어나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채 군에 입대한 그는 방데미에르 13일 쿠데타에서부터 나폴레옹과 보조를 같이 하여 수차례 기적같은 승리를 이루어냈다. 최고의 기병지휘관인 뮈라는 무너지는 적을 섬멸하거나 위기에 빠진 전황을 한번의 돌격으로 뒤집는데 있어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서커스 배우 같았던 그는 자신의 몸에 총탄이 박혀도 농담을 지껄였으며, 러시아의 혹한을 걸어나올 때도 신파극의 주인공 같은 차림새로 앞섶을 풀어해치고 여자를 보면 시시덕거렸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용맹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그는 궁전에서는 늘 음모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 우유부단한 귀를 쫑긋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누이와 결혼하여 나폴리 왕국의 주인까지 된 뮈라였지만, 그는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방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빈 회의에서는 유럽을 '혁명 이전' 으로 되돌리기 위한 모의가 진행 중이었고, 혁명의 아들인 나폴레옹과 그 잔재인 뮈라 역시 배제될 위기에 처해지고 있었다. 빈 회의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뮈라는 다시 한번 나폴레옹에게 붙으려 하고 있었다.


 뮈라의 추잡한 행동에 대해 나폴레옹은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시기에 뮈라의 가세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뮈라 본인은 둘째치더라도 나폴리의 군사 수만명은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현재에는 아주 큰 도움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뮈라에게 우선 경거망동은 삼가하고, 프랑스군이 지원하러 오면 그때 움직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욕심 많은 뮈라는 프랑스군이 이탈리아에 진출할 무렵이면 다시 프랑스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두려워했고, 자신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겠다고 나서며 경솔하게 부대를 북부의 이탈리아로 진군시켰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군대를 파견해 뮈라를 격파하였고, 퍼즐의 한 조각으로는 용맹했지만 최종사령관으로는 아무것도 증명된 것이 없는 그는 지리멸렬하게 패퇴하여 도주할 수 밖에 없었다.


 뮈라의 대패로 최대 5, 6만에 이르는 보조군을 잃어버린 나폴레옹은 신음을 흘렸다.


 "그 녀석이 내 운명을 빗나가게 하는 것이, 이번이 두 번째로군!"


 이렇게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는 나폴레옹은 내부적으로는 여러 불만세력을 잠재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프랑스 혁명의 초창기부터 이름을 날린 카르노를 내무장관에 임명하고 '뱀 같은 인간' 으로  통한 푸셰를 불러들여 치안을 담당했으며, 자신을 '징기즈 칸, 아틸라' 라고 비난한 작가 방자밍 콩스탕을 초청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국에 '겉으로나마' 자유주의적 색깔을 부여했다. 


 이 1815년의 자유헌법은 종종 현대에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처럼 여겨지며 나폴레옹의 고평가를 돕기도 하지만, 정작 그 당시에는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헌법이었을 뿐이다. 시민적 자유, 장관의 책임조항, 상원 세습제, 복잡하고 제한적인 선거권을 토대로 한 하원 구성등은 '입헌 군주제' 의 서막이었지만 보나파르트파는 황제의 권력이 삭감된 일에 유감을, 자코뱅파들은 이러한 조치가 부족하다고 여겼고,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믿지 않았으며, 왕당파는 두려움을 느꼈다. 훗날 나폴레옹 본인도 이렇게 술회했다.


 "그 헌법 때문에 그렇게 귀중한 시간을 빼앗인 것은 잘못한 일이었어. 내가 일단 정복자가 되고 나면 다 없애버릴 의회들이었는데! 내가 이 의회에들에게 의지할 만한 방편을 찾기를 바란 것은 헛된 일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지. 그 의회들은 워털루 이전에는 나를 방해했고 워털루 이후에는 나를 버렸다."


 『민법전』을 포함하여 나폴레옹이 후세에 남긴 제도적 업적은 상당하지만 신랄하게 말하자면 당대의 문제는 해결한 것은 그런 선구자적 제도가 아닌 '징기즈칸, 아틸라' 라고 조롱받은 그의 군사적 능력이었고, 재정의 해결은 법률의 안정이 아닌 군대의 약탈로 해결된 것이며, 대중의 인기는 자유주의 법전이 아닌 영웅의 군사적 개선이었다. 나폴레옹의 말처럼, 지금 중요한것은 군사적 승리였다. 



Napoleon Bonaparte at Fontainebleau portrait man canvas art print by Paul Hippolyte Delaroche


『지휘관』
 
『프랑스』


 
 군사적 수단으로서 프랑스가 가지는 이점은 분명하다. 그들에게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휘관이 있었다. 서방 세계의 군사적 지휘관들 중에는 오직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한니발 바르카만이 나폴레옹과 이름을 나란히 하고 있을 뿐인데, 한니발의 경우 그 자신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결국 일개 명장에 불과하므로 전쟁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모두 물을 수는 없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우에는 요절했다는 점에서 나폴레옹에 비해 유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1815년의 나폴레옹은 분명히 뛰어난 재능, 압도적 카리스마, 명석한 전략적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분명히 자신의 최전성기, 즉 이탈리아를 누비고 두 명의 황제를 아우스터리츠에서 격파했던 그 시기의 나폴레옹이 아니었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건강이었다. 카스틸리오네, 올룸, 아우스터리츠의 나폴레옹은 문자 그대로 초인이었다. 단순히 능력에 대한 경의가 아니라, 나폴레옹이라는 개인의 육체성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이다. 당시의 그는 온 전선을 총괄하며 좌충우돌했고, 위기에 빠진 곳이면 언제든지 나타나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넘치는 정력을 바탕으로 모든 부분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압도적인 기동 - 포위 섬멸전을 벌였다.


 그러나 워털루의 나폴레옹은 그는 말에 타는것조차 힘들어했다. 유럽의 지배자였던 시절에도 그는 점차 능력이 약화되는 기색을 보였다. 초창기에 비해 바그람 전투의 나폴레옹은 단순한 화력의 전면대결을 선호했고, 이전에 비해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여주지도 못했다. 물론 이것은 프랑스 군대가 규모가 커지며 다국적군의 모습을 보여 지휘에 어려움을 겪은 면도 있었겠지만, 그 이후의 나폴레옹이 1805년의 나폴레옹이 비해 여러면에서 약해졌다는것은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바이다. 물론 그는 러시아에서 패망한 1814년 열세의 전력으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 압도적 순간에도 미심쩍인 결정은 몇번 보였고 클라우제비츠 등은 이에 의문을 표시했다.


 혹 그가 말단비대증에 시달리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분비성 장애인 이 병에 걸린 사람은 간헐적으로 무감각해지거나 혹은 이유도 없이 낙관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런 모든 점들을 종합해보면 나폴레옹은 1815년에도 여전히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군사 전략적 면에서는 당대 최고였다. 하지만 전술적인 면에서는, 최고라고 말하기에는 꺼려지는 몇가지 모습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그대들에게 말해주지. 자네들이 웰링턴을 훌륭한 지휘관으로 생각하는것은 바로 그 자에게 패배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장담하건데 웰링턴은 보잘것 없은 녀석이고 영국군은 형편없는 군대다. 모든 일은 소풍 나온 것처럼 간단하게 해결 될 거야."


 하지만,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적에 대해 조금만 더 잘 알았어도, 이것이야말로 터무니 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웰링턴

 『영국』


 
 그 '보잘 것 없는' 웰링턴은 웰즐리 가문에서 출생한 영국계 아일랜드 가문의 셋째 아들이었고, 나폴레옹과 같은 나이였다. 그러나 공통점은 그 뿐으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폴레옹은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병사들을 고무하여 폭발적인 지휘를 했다면 웰링턴은 냉정한 면모를 유지하며 상황에 따라 지휘했다. 나폴레옹은 예술에 가까운 직관을 보였다면 웰링턴은 분석과 논리에 바탕을 두었다. 어느정도 나폴레옹이 '승리 그 자체' 에 목적을 두는 면이 있다면, 웰링턴은 본래 충분하지 못한 병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편이었다.


 종종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침입 - 곧 반도전쟁은 완벽한 나폴레옹의 전략적 실수이며, 무슨 짓을 하건 실패가 예정된 싸움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808년 포르투갈에 침입한 영국군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낙관적이지 못했다. 1793년 이래 영국 육군이 보여준 모습은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국 독립 전쟁 이래 영국 육군의 위상은 끔찍하게 추락했으며, 랠프 애버크롬비나 존 무어 경같은 인물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반도전쟁의 총사령관을 맡았던 웰링턴은 '효율' 적인 싸움을 하는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전쟁 필수품에 대한 관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형' 을 잘 이용하는 데 있어서 그를 따라올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훗날 역사적 오점으로 아편전쟁에 찬성하기도 했던 그는 귀족적 시각으로 병사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계층을 경멸했지만, 자신의 전투 체계가 만든 전투병들은 전적으로 신뢰했다. 적어도 보병은 말이다. 그는 기병들은 까다로운 존재라고 투덜거렸다. 웰링턴은 자신의 부대에 대해 "그들을 무수한 시련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그들이 단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고 인정했다. 


 워털루 전투가 펼쳐질 무렵이면, 웰링턴 이외의 장교들도 전반적으로 수준이 좋은 편이었다. 부대의 부사령관이자 기병 지휘관이었던 옥스브리지 백작은 웰링턴과 대단히 사이가 좋지 않았고, 웰링턴 자신이 반대했음에도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 이유는 옥스브리지가 웰링턴의 재수를 유혹해 같이 달아난 스캔들 탓이었다. 고지식한 웰링턴은 옥스브리지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무뚝뚝함으로 대응했다. 옥스브리지는 웰링턴에게 넉살 좋게도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고, 웰링턴은 이렇게 대답헀다.


 "귀관, 내 계획은 프랑스군을 무찌르는 거요."






블뤼허


『프로이센』



 프로이센 군대의 사령관은 72세의 노장 블뤼허였고, 누구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선 지휘관으로는 엄청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블뤼허의 넘치는 에너지와 불굴의 용기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우슈테트에서 포로가 되는 굴욕을 맛본 그는 프랑스 군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했으며, 막무가내에 성급한 성격을 가졌지만 병사들에 대한 진실한 애정을 가진 인물로, 부하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었다. 다만 전장을 보는 시각이 좁은 탓에 나폴레옹에게는 수차례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였고, 심지어 1814년에도 여러차례 당해야만 했다. 


 다만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프로이센 군만큼 비난을 받은 군대도 드물다.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대왕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유산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발전이나 진보를 조금도 보여주지 못했다면서 말이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대육군' 에 프로이센의 군대는 수차례 패배를 거듭했으며, 블뤼허는 그 굴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군 경력의 후기, 그는 그나이제나우 장군과 짝을 이루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블뤼허는 군에 결단과 용기를, 그나이제나우는 두뇌를 제공했다.




그나이제나우



 미국 독립 전쟁에도 참여했던 그나이제나우는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에 큰 기여를 하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시켰다. 참모로써 그는 블뤼허를 충실하게 보조했다. '전진 원수' 라는 별명이 붙은 블뤼허는 용맹무쌍한 전사 중의 전사였지만, 안심할 수 없는 면모가 있었다. 끓어오르는 성격은 둘째치고라도 정신분열증 같은 모습을 보이던 블뤼허는 종종 코끼리가 자신을 임신시켰다는 둥, 프랑스 군이 자신의 발에 화상을 입히기 위해 부하들에게 뇌물을 주어, 땅바닥을 뜨겁게 달구게 했다는 듯의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나이제나우를 포함한 프로이센군의 최고 사령부는 이러한 장애 따위는 넒은 마음으로 포용했다. 지금은 전사하고 없는 그나이제나우의 선임 샤른호르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설사 몸 속에 100마리의 코끼리가 있다손 치더라도, 블뤼허 장군이 지휘해야 한다." 


 사납고 용맹무쌍한 프로이센 부대를 지휘하는 지도부는 분명 능력이 있었고, 나폴레옹의 귀환을 오히려 수치를 다시 한번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연합군은 나폴레옹을 평가 절하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난 15년 동안 나폴레옹의 성과를 느리게, 그러나 어쨌든 배웠다. "나폴레옹의 모자 하나가 병사 4만명에 버금간다." 웰링턴의 말처럼, 그들은 숙적을 결코 우습게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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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teGiants
13/10/03 15:28
수정 아이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추천 하나 날립니다 乃
13/10/03 16:01
수정 아이콘
아아.. 또 현기증이 ㅠㅠ
一切唯心造
13/10/03 16:4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어요 흐흐
옆집백수총각
13/10/03 16:49
수정 아이콘
웰링턴씨 나왔다 으흐흐흐
Je ne sais quoi
13/10/03 17:19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있습니다!
지금뭐하고있니
13/10/04 00:39
수정 아이콘
너무 잘 보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 시기 나폴레옹은 너무나 건강이 안 좋았죠..군인으로의 일만 했었다면 이 정도까지 나빠지진 않았을텐데..하는 생각을 합니다.
swordfish
13/10/04 17:41
수정 아이콘
하지만 블러허의 존재는 전쟁에서 중요했죠. 능력 부족에 사실상 용맹빼면 시체여도 말이죠.
만약 반영성향의 그나이제나우가 블러허가 없었다면 그냥 군대를 라인강 이동으로 뺐을 테니 말이죠.
그걸 막고 영국군과 합류시킨 인물이 블러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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