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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 유명한 효신이구나! 한잔 받아.”
은성이는 소주병을 들어 효신이에게 술을 따랐다. 효신이는 꾸벅하며, 양손으로 공손히 은성이가 따라주는 술을 받는다. 술을 받는 폼이 제법 그럴싸한 게 주도를 어른들에게 배웠구나 생각됐다.
“예? 아니에요. 저 안 유명해요.”
효신이는 술을 받고나서 은성이의 말에 전혀 아니란 듯이 양손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예쁘면, 살면서 예쁘다는 소리도 엄청 들었을 거고, 주변에서 떠받드는 남자들도 많아서 자기가 예쁜 줄 알 것이다. 제법 겸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유명하긴! 효신이 네가 얼마나 유명한데. 예쁘다고! 한효주 닮았다고 남자들이 난리던데? 선배들 사이에서도 엄청 유명해. 오죽하면 여기 현우 선배가...”
효신이의 겸손에 연주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들어 연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얘가 신입생 데리고 와서 취했다고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하하하. 미안해. 저기서 잘 놀고 있었는데. 이 선배가 원래 취하면 좀 그래.”
“아니에요. 연주 언니가 얼마나 좋은데요.”
벌써 선배라는 호칭까지 뗀 걸보면, 둘이 꽤 친할지도?
“둘이 친해?”
“음. 언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는 친하다고 생각해요. 처음에 학교 와서 이것저것 알려주시고, 책도 주시고 밥도 사주셨거든요.”
연주가 제법 후배들을 잘 챙긴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동성인 여자까지 이렇게 챙겼구나. 하긴 후배뿐만 아니라 나 같은 선배도 챙기는 녀석인데. 새삼 연주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솔직히 3학년 쯤 되면, 자기 일도 바쁠 텐데 여러 후배들에 못난 선배까지 챙기다니.
“푸하. 거봐요 선배! 내가 진짜 이런 사람이라고요. 그치 효신아? 헤헤.”
“네.”
연주는 내 손을 떼어내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말끝머리에 헤헤 웃는 게 꽤 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도 효신이랑 친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어디 가서 나랑 친하다고 자신 있게 말해도 괜찮아!”
“아 정말요?”
효신이가 감격한 표정으로 연주를 쳐다봤다.
“효신이 그래도 진짜 예쁘긴 예쁘네. 오죽하면 선배가...”
나는 다시 재빨리 연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도대체 얘가 새내기 데려다 놓고 나를 어떤 나쁜 놈으로 만들려고 이러는 걸까. 이런 단체 생활에 효신이가 연주의 말을 잘 못 받아들여 이상한 소문이라도 난다면, 나는 졸지에 예쁜 후배나 데려와 술이나 따르게 하는 호색한 놈이 되어버릴 수 있었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이런 자리일수록 행동거지나 말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연주 언니가 저보다 더 예쁜걸요.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연주 언니 인기가 최고거든요.”
“정말? 헤헤헤.”
효신이가 빙그레 웃으며 연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연주는 자신보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효신이가 직접 자기 칭찬을 해줘서 인지 기분이 상당히 좋아진 것 같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은성이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효신이도 예쁘지만, 친구로서 솔직히 연주 너는 얼마나 예쁜데!”
“정말!? 선배도 그렇게 생각해요?”
은성이가 나의 신호를 정확하게 캐치하고, 지원 사격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왔다.
“당연하지. 아까 했던 말은 그냥 장난이고. 진짜 나한테 너만 한 후배가 또 어디 있겠어!”
“헤헤헤.”
성공이다. 연주는 완전히 풀어진 표정으로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나는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정도면 나중에 술 깨고 나서도 뒤탈은 없겠지.
“그럼 술이나 한 잔 하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주찬이 씩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은성이가 그때 술잔을 올리며, 내게 도움의 눈길을 보내왔다. 나는 은성이에게 걱정 말라는 신호로 눈을 한번 찡긋했다.
“그래 다 같이 한 잔 하자. 아 참! 효신아. 여기 이 자식은 조심해. 아주 나쁜 놈이니까. 아주 치사하고 쪼잔 한 것도 모자라서 여자도 많이 울린 놈이거든. 그러니까 건배할 때 술잔도 부딪치지 마.”
“네?”
“농담이야. 짠!”
나는 재빨리 내게 뭐라 하려던 주찬 이를 커트하기 위해 농담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건배했다. 주찬이는 타이밍을 놓쳐 그대로 애꿎은 술만 쭉 들이켰다. 나는 그 모습에 은성이를 보며 다시 한 번 눈을 찡긋했다. 뭐 이 정도면 되겠지.
“선배~.”
그 사이 술 몇잔 더 마셨다고, 연주는 더욱 취한 것 같았다. 이제 얼굴은 발그레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빨간 홍시처럼 익어버렸다.
“왜?”
“왜는 또 무슨 왜에요. 후배가 선배 그냥 부를 수도 있지.”
연주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주찬이는 그 모습을 보더니, 나를 보며 고개를 밖으로 까닥거렸다. 연주가 취한 것 같으니까 그만 먹이고 잠깐 데리고 밖에 나갔다 오란 뜻이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웬일이에요. 선배가?”
연주가 못 믿겠는 얼굴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까 사주겠다고 했잖아.”
“네 좋아요! 잠깐 갔다 올게!”
연주는 그대로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와중에 고개를 슥 돌려 앉아있는 주찬이를 바라봤다.
귀엽고 소녀 같은 스타일의 정은성. 신입생 중 가장 예쁘고 한효주 닮았다고 소문이 자자한 김효신. 주찬이는 그런 미인들 사이에 청일점이 됐다. 함주찬 부러운 놈. 역시 저놈은 여복을 타고난 놈이다.
여복 터진 주찬이를 뒤로 하고, 나는 연주와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깔끔하게 종류별로 아이스크림을 나눠 둔 냉동고에 멈춰서 뭐 먹을지 고민에 빠진다.
“연주 넌 뭐 먹을래?”
“음 저는 메로나요! 술 먹고 나서 제일 좋더라고요.”
“그래?”
연주의 말에 나는 메로나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바로 카운터로 들어가 값을 계산하고 나와 하나를 연주에게 건넸다.
“자.”
“잘 먹을게요. 선배.”
아이스크림을 건네받는 연주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아주 약간 내 기분도 좋아진다. 가끔은 후배에게 뭘 사주는 게 나쁘지 않구나.
“많이 마셨지?”
나는 메로나 포장을 뜯으며, 편의점 앞에 마련된 파라솔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연주도 나를 따라 그대로 착석했다.
“아뇨. 아직 별로 안 마셨어요.”
술 취한사람은 자기가 취한지 모르는 법이지. 하지만 오늘 같은 날 조금 취하면 어떠랴.
“그래. 그래도 지금 얼굴도 꽤 빨간데, 이제부터는 조금만 마셔. 괜히 또 마시다가 술병나면 고생하잖아.”
“지금 제 걱정해 주는 거예요?”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연주는 헤헤거리며, 실없이 웃었다.
“다음 주면 또 과제 있으니까. 적당히 마시는 게 좋겠지. 착한 후배님 없으면 나도 고생이잖아?”
“어이구, 그럼 그렇지! 선배가 웬일인가 했네요!”
얘기를 주고받고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렇게 함께 시간을 나눈 만큼 그 사람과 더 친해졌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느낌은 아주 조금 나를 기쁘게 한다. 사람 간의 관계가 주는 기쁨 중 하나겠지. “선배. 근데 선배는 진짜 다시 여자 친구 안 만들어요?”
“응?”
한창 즐거움을 음미하고 있을 때, 연주의 날카로운 질문이 파고든다. 아무래도 아이스크림을 괜히 먹인 것 같다. 바람 좀 쐬니까 술이 깨고, 정신이 들자마자 공격이라니.
“그건 왜?”
“그냥요. 꽤 오래 전에 헤어졌던 것 같은데, 한참 없으니까요.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연주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사실 그러고 보면,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는 딱히 여자 친구가 필요하다거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전 여자 친구를 딱히 못 잊은 것도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음 그리고 딱히 여자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안 들고.”
“정말요? 에이 그래도 막상 효신이 같은 애가 사귀자고하면 사귈 거죠?”
장난스럽게 말하는 연주를 보고 있자니 덩달아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또 괜히 장난쳤다가 연주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진지하게 대답했다.
“음. 일단 효신이가 나한테 사귀자고 할 일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 잘 모르잖아. 그리고 좀 이런 말 하면 미친놈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효신이는 내 이상형과는 좀 멀거든.”
“이상형이요? 선배 이상형도 있어요?”
연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있지.”
“뭔데요?”
“그러니까...”
“네.”
엄청 궁금해 하는 표정이다. 저런 표정을 보면 역시 제대로 알려줄 수 없지!
“비밀이야.”
“네?”
“다 먹었으면, 먼저 올라간다?”
나는 연주에게 씩 웃어 보이고, 쓰레기들을 대충 처리한 후 몸을 돌렸다.
“에이 치사해! 같이 가요 선배!”
왠지 알 수 없는 기분에 얼굴에 어리는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10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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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