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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6/29 13:31:39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강화도 조약, 문을 열다

bgm 좋은 거 있음 추천받습니다 _-)/

일본과 통상을 할 경우 나라가 망하는 이유

1. 화친은 상대편의 구걸에서 나오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능히 제압할 수 있어야 화친을 믿을 수 있습니다. 겁나서 화친을 요구한다면 당장은 몰라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2. 그들의 물건은 모두 사치품이지만 우리의 물건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생필품입니다. 통상한 지 몇 년 안 돼 버틸 수 없을 것이며, 나라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3. 그들은 왜인이라 핑계대지만 실제로는 서양 도적들이니, 화친이 이루어지면 사학이 전파돼 온 나라에 가득찰 것입니다.

4. 그들이 뭍에 올라와 왕래하고 산다면 재물과 부녀들을 마음대로 취할 것입니다.

5. 화친하자는 자들은 병자년 남한산성의 일을 들며 화친 후 두 나라가 사이좋게 지내면 될 거라 하는데 저들은 재물과 여자만 아는 도리를 모르는 족속들입니다.

최익현의 지부상소(도끼 들고 상소 안 받아들이면 도끼로 나 죽여라ㅡㅡ) 내용입니다.

척화라고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물론 자세한 내용은 척화했으니 당연히 모를 겁니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의 목적과 통상할 경우 당연히 불평등이 될 거라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죠. 실제 그렇게 됐습니다.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이 일단 밑지고 들어갔고, 조선과 열강의 국력상 평등하게 맺어도 조선이 손해였죠. 사학(천주교) 부분도 맞지만 그냥 넘어가고 -_-; 일본은 조선의 재물? 여자? 그런 걸 넘어서 조선 자체를 노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조선은 망했습니다.

하지만, 통상하지 않더라도 조선은 망했을 겁니다. 근대화에 대한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못 하고 말이죠. 척화파의 방법은 그저 지금까지처럼 문을 닫고 살면 안전하겠지 정도였으니까요.

1876년, 강화도 조약은 그저 일제 침략이 시작된 때가 아닙니다. 조선이 드디어 문을 열고 근대라는 미래로 뛰어든 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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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신미양요 동안 대원군은 척화비를 곳곳에 세웁니다. 두 차례의 양요는 척화파에 큰 힘을 실어줬습니다. 뭐라 하든 결국 침략이었으니까요. 프랑스나 미국 내의 반응도 그리 좋진 않았습니다.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다시 말해 대군으로 아예 확실히 밟든가 ㅡㅡa) 괜히 설 건드려서 조선은 더 문을 닫았고, 동아시아에서 서양의 영향력이 줄었다고 평가받았거든요.

이런 분위기가 깨진 게 내적으로는 고종의 성장, 외적으로는 일본의 성장입니다.

고종은 1873년에 이미 스무두살이 됐습니다. 하지만 대원군은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죠. 대비의 수렴청정도 기본적으로 스무살까지였습니다. 아무리 지금까지 조선의 병을 치유했다 하나 너무 오래 있었고, 그에 대한 불만도 커져가는 시점이었죠. 그걸 무너뜨린 게 바로 최익현의 상소였습니다. 10월 25일, 11월 3일에 두 차례 올린 상소였죠. 뭔가 지나가는 말인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부분은 이거였습니다.

"다만 종친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은 그 지위만 높여주고 후한 녹봉을 줄 것이며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원군의 섭정에 대한 반대였죠. 그 외에 여러가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주로 만동묘와 서원의 복구 등 기존 유림의 주장을 답습하는 수준이었죠. 대원군이 사면한 이들 중에서도 노론은 딱 빼고 남인의 사면만 문제삼았구요 (...)

당연히 이에 대한 비난이 뒤따랐지만 고종은 위리안치를 시킨 후 입을 닫습니다. 대원군을 공격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대원군은 양주로 갔고, 조정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합니다. 고종은 아버지를 찾지 않았고, 신하들도 그걸 요구하지 않았죠. 조선의 지존은 왕이며, 이 명분은 설사 왕의 아버지라도 꺾을 수 없는 거였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권력이 교체됩니다. 이게 고종의 뜻이었죠. 이후에도 고종은 최대한 아버지를 찾지 않으며, 대원군은 권력을 되찾기 위한 많은 시도를 합니다. 임오군란부터 동학, 을미사변까지 그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다 나오죠.

최익현의 상소가 시작이었지만, 정작 고종은 최익현의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만동묘나 서원 문제 등 말이죠. 이런 걸 보면 애초에 고종의 목표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게 아빠와는 다른 길을 갈 거라는 반항심일수도 있지만 강화도 조약 등에서 보인 태도는 그렇게 보기엔 너무 단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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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한국식으로 잃으면 운양호입니다. 영국산으로 배수량은 245톤이었죠. 이들은 6월에도 부산으로 가서 동해안을 한 차례 측량한 바 있습니다. 그 다음 목표는 서해였죠. 표면상 목적은 조선의 서남해부터 중국의 옌타이항(랴오둥-요동-반도)까지의 측량이었습니다.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는 식수가 부족을 핑계로 강화도로 향합니다. 이 때 보트가 초지진에게 포격을 받죠. 양력 9월 20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일본군은 소총으로 대강 응사한 후 귀환합니다.

다음 날 아침 운요호는 초지진에 접근했고, 함포사격으로 파괴합니다. 이후 상륙은 포기하고 남쪽 영종도로 향하죠. 22일, 영종진 근처까지 접근 후 보트를 보냈고, 역시 조선군이 공격하자 상륙합니다. 이 때 상륙한 병력은 단 22명,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습니다. 400~500명은 될 조선군은 달아났고, 영종진첨사 이민덕이 인장을 잃어버리고 달아날 정도였죠.

일본군이 집계한 조선군 전사자는 35명, 포로는 16명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부상자 2명이었죠. 이후 영종진 내부를 약탈, 방화하고 돌아갑니다. 포로들은 먹을 걸 주고 풀어줬다 합니다.

곁가지 다 떼고, 여기까지가 운요호 사건의 전말입니다. 양요와 방식이 비슷합니다만, 그 안을 보면 꽤나 차이가 있죠.

+) 양요랑 연결해서 왜요로 부르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전 그럴 필요까진 없다는 쪽이구요.

일단 함포외교를 시도한 것은 같습니다. 프랑스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이들은 곧바로 치고 들어오진 않았습니다. 그저 위세를 보여주면서 시간을 끌었고, 안 되자 무력을 동원했죠. 이들의 주된 목표는 통상을 맺는 거였고, 겁을 주는 건 그걸 위한 방법론이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자기들 입장에선) 최대한 시간을 주면서 협상을 시도했죠.

하지만 일본은 그냥 겁만 주고 갑니다. 딱 봐도 중국으로 간다는 느낌은 안 들죠. 이들은 동해안을 측량할 때도 문정 온 관리가 선물을 요구했다느니 하면서 시비를 겁니다. 그저 시비거리만 찾고 있었고, 찾자마자 바로 행동에 들어간 것이죠.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을 테니까요.

역시 원래부터 조선을 알았다고 해야 될까요, 조선이 서계를 끝까지 거부하니까 안 되겠다 한 걸까요, 그도 아니면 두 차례의 양요를 보고 그랬던 걸까요. 어느 쪽이든 참 확실하면서도 아주 약간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짓거리였죠.

조선군이 이렇게 쉽게 무너진 이유에 고종 친정 후 민씨 세도를 통한 부패와 군비 축소로 인한 군사력+사기 악화가 나옵니다만... 글쎄요. 이전이라면 달랐을까 싶습니다. 양요 때 조선군이 좀 싸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건 서울에서 투입한 병력이었거든요. 서양인들이 시간을 좀 주면서 협박하는 동안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 때는 단 하루이틀 정도...

이런 게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이 때 조정은 이양선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문정관을 파견하려 했지만 일찌감치 가 버렸고, 영종진에 대해서는 영종첨사의 무능으로 판단합니다. 이래저래 영종진의 방어를 강화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일 자체는 이전에 나타났던 이양선들처럼 그냥 양놈의 탈을 쓴 왜놈들의 난동 정도로 여겼죠.

다음은 음력 10월 11일, 부산이었습니다.

부산의 왜관 근처 사하면 초량리, 일본배에서 7명이 메추리사냥을 한다면서 상륙합니다. 막으려고 하니 칼까지 빼어들면서 협박했죠. 그래도 돌아가나 싶더니만 다음 날에는 70명이 상륙했고, 칼은 물론 총까지 들고 옵니다. 동래부사 홍우창은 왜관의 관리자에게 따졌지만 "걔네들 잘못한 건 맞는데 내 관할이 아니다"는 답을 받습니다. 자기는 외무성 소속이고 그 쪽은 해군성 소속이라는 거였죠.

10월 16일, 다시 한 번 난동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유혈충돌이 나왔죠. 조선인 12명이 부상을 입습니다. 이후에도 피해는 없었지만 여러 차례 계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동래부사부터 경상감사까지 "분쟁의 단서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고 보고했고, 그게 맞았죠. 이들은 적당히 협박을 하고 천천히 강도를 높이면서 조선측이 정식으로 따지고 들자 돌아갑니다.

그리고 12월 19일, 동래부사 홍우창은 7척이 와서 4척이 강화도로 갔다고 보고합니다. 남아 있는 일본인들의 말을 들어본 결과 일본에서 전권 대신이 와서 조선의 대신과 만나서 의논하겠다는 거였죠. (이게 또 10일 가까이 늦게 한양에 도착합니다 - -;) 이들은 12월 말 경기도로 접근합니다. 1월 4일에 문정을 시도하죠.

운요호 사건 때와는 달리 문정은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마치 이전의 이양선을 문정할 때와 비슷하죠. (다시 말하면 운요호 사건이 정말 특이한, 다른 목적을 가졌다는 것이죠) 왜 왔는지 말하고 물자는 어떤가 하고 부족한 거 좀 주고 하는 식이었죠.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조약을 맺는 것이요. 조선에서 별 반응이 없자 왔다리 갔다리 하다가 1월 13일, 다음 날에 강화도에 상륙하겠다고 통보합니다. 타이밍 좋게도 중국에서도 연락이 옵니다. 일본에서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는다는 소식이 왔으니 알려준다는 거였죠.

조정은 강화도 건너편의 방어를 강화함과 동시에 상륙을 허가합니다.


이 때 접견 대관으로 파견된 것이 중추부사 신헌이었습니다. 부관으로 윤자승이 따라갔구요. 일본측은 육군중장 겸 참의개척장관 구로다 기요타카와 이노우에 카오루였습니다.


1월 17일, 양측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참 살벌했죠. 일본군은 400명이나 되는 병력을 상륙시켰고, 무기 중엔 그 유명한 게틀링이 있었습니다.

+) 그리고 이 게틀링을 조선에 주고 갑니다. (...)a 이건진 몰라도 조선군이 게틀링을 처음 사용한 건 외국군이 아닌 동학군을 상대로였죠.

+) 양측의 대화를 최대한 넣을 거니까 스킵하고 싶으시면 내리세요 _-)/~

일 : 두 나라에서 대신을 파견한 것은 큰 일을 처리하기 위함이고 이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조 : 300년간의 오랜 좋은 관계를 지금 다시 회복해서 신의를 보이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므로 매우 감격x2입니다.

일 : 이번 임무는 이전에도 말한 겁니다. 어찌 이웃끼리 화목하게 지내지 않고 관계를 끊는 겁니까?
조 : 격식 문제는 매번 있어서 오랜 전례가 됐습니다. 당신네가 격식을 어긴 상태에서 변경의 신하들은 예전의 관례를 지키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제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마당에 그 일을 다시 꺼낼 필요가 있습니까?

일 : 우리 배(운요호)가 작년에 귀국 영해를 지나가다가 포격을 당했습니다. 이웃끼리 이래도 됩니까?
조 : 남의 영해에 들어갈 땐 금지되는 걸 물어보는 게 예기에도 써져 있는데 그 배는 어디 배고 어디로 무슨 일로 간다고 통지도 없이 방어 구역으로 들어갔으니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일 : 운요호의 돛에는 국기를 달아서 우리나라 배라고 표시했는데 왜 몰랐다고 합니까?
조 : 그 때 달았던 깃발은 누런색이어서 다른 나라 배인 줄 알았습니다. 설령 귀국 깃발이라 해도 병사들은 몰랐을 수 있습니다.
일 : 우리나라 깃발 표시는 어떻다고 알렸는데 왜 각지에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조 : 여러 문제를 아직 결정 못 한 상태라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영종진을 다 태워버리고 약탈한 건 이웃끼리 사귀는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번에는 동래에서 사신이 온다는 걸 알려줬기에 손님 맞는 예의로 대접해주는 겁니다. 지금까지 표류해 온 배도 다 잘 대우해줬는데 귀국의 군함이라고 마구 쐈겠습니까?

일 : 이번에 두 나라 대신이 협상하는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까?
조 : 귀하는 먼 데서 와서 전권이라는 직책을 받은 거지만 여긴 수도 코 앞입니다. 나는 그저 접견하러 왔을 뿐입니다.
일 : 우리가 전권대신 파견한다고 먼저 말 했고 귀하가 왔는데 왜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까?
조 : 애초에 우리는 그런 거 없습니다. 거기다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왔는데 어찌 전권을 받겠습니까?
일 : 사신도 안 만나주고 서계도 안 받아주고 6, 7년이 지났는데 그 이유는 뭡니까?
조 : 지난 정묘년(1867)에 중국에서 신문 하나를 보냈는데 조선 국왕이 5년마다 일본에 공물을 바치는 게 전통인데 이걸 폐해서 군사를 동원해 그 죄를 추궁한다 했습니다. 온 나라가 귀국이 우리를 무고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아예 우리를 정벌한다는 말도 있더군요. 이게 서계를 막은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이제 우호를 회복하자는데 왜 계속 옛날 얘기를 꺼냅니까?

일 : ... 그런 일이 있었는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건 루머일 뿐인데 그것 때문에 끊습니까? 우리 정부가 직접 통보한 것도 아닌데 의절할 순 없잖아요.
조 : 그 신문은 귀국 사람이 만들어 다른 나라에 돌린 건데 어찌 그냥 루머로 돌립니까?
일 : 아니 신문이라는 건 진실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신문만을 믿으면 맨날 전쟁이겠죠. 그냥 웃고 넘어가면 됩니다.
조 : 우리나라는 의심은 품은 지 꽤 됩니다. 어쨌든 지금 예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면 되는 거죠.
일 : 그 때 물어봤으면 의심할 일 없었겠죠.
조 : 그러니까 이제부턴 그러면 되는 거죠.
일 : 그러니까 전날 대치했던 거랑 서계를 안 받아준 건 다 잘못한 거 맞죠?
조 : 옛날 일들의 의심은 다 눈녹듯 풀어졌으니 다시 말할 필요 없죠?
일 : 그 말은 부당하죠. 친구간의 약속이라도 저버릴 수 없는데 두 나라 간의 일인데요.
조 : 7~8년간 관계 끊은 이유는 다 말했습니다.
일 : 자, 운요호가 우리 배라는 건 알았으니 누가 잘못한 건지 알겠죠? 죄 지은 군사들 어떻게 할 겁니까?
조 : 그건 알면서 고의로 한 거랑은 다르다니까요.

첫 날은 이렇게 끝납니다. 구로다는 마지막으로 조약 얘기를 꺼내면서 조약을 맺어 영원히 변치 않을 좋은 관계를 맺자고 했죠. 일단 앞으로 어떻게 만날 것인지 의논하고 조선측에서 다과를 대접하죠.

다음 날, 회견은 계속됩니다.

일 : 자, 어제 하던 말을 계속하죠. 저번 신문일은 진짜 이해할 수 없어요. 정부끼리 얘기한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무진년(1868)년 이후 우리 제도가 바뀌어서 당연히 이웃에게 말한 건데 동래에서 맨날 끊겼어요. 변명할 거 있습니까?
조 : 신문 일은 어제 끝났죠? 옛날 일 끄집어내지 말고 이제부터 사이좋게 지내면 되요.
일 : 귀국의 의도는 잘 알겠는데요. 우리는 이 문제 때문에 대신이 4명이나 교체되거나 파면됐고 한 명(사이고 다카모리? - -a)은 죽었어요. 아예 무력으로 귀국을 치자는 말도 나옵니다. 내무경 오쿠보가 (조선을 생각해서 - -) 겨우 무마시켰는데 이걸 알기나 합니까? 귀 대신이 할 말이 없다면 우리도 돌아가서 할 말 없다 이 말입니다. 잘못을 뉘우쳤는가 아닌가 그거라도 딱 잘라 말해줘야죠.
조 : 아 그랬군요. 매우 감사합니다. 근데 우린 그냥 접견하러 온 거니 확답 못 해요. 뉘우친다는 말도 그렇죠. 그게 우리에게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물을 문젭니까?
일 : 우리 쪽에서는요. 제도가 다 바뀌어서 그거 얘기하려고 1868년부터 계속 왔는데 받아주지도 않죠~ 표류해 온 백성도 안 돌봐주죠~ 우리는 그래도 의리를 잊지 않고 왜관에서 기다렸는데 알아주지도 않죠~ 만나질 못하니 뭐라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오늘 겨우 만난 겁니다.
조 : 아, 뭔 말인지 알겠습니다.
일 : 귀국 조정의 확답을 받는 게 우리 임무입니다. 우리들이 돌아가서 할 말이 있게 해 준다면 정말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조 : 알리기는 할게요.

그리고...

일 : 이번에 두 나라의 관계가 회복되는 건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신의와 친목을 위해 특별히 상의할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 13개 조목의 조약 초본을 만들었습니다. 직접 귀국 임금께 알려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조 : 조약이라니 이건 뭡니까?
일 : 귀국 지방에 관을 열고 함께 통상하자는 겁니다.
조 : 아니 300년 동안 통상 안 한 적이 있나요? 갑자기 이러니 이해할 수 없네요.
일 : 이건 전세계에서 다 하고 있는 거고 일본도 마찬가집니다.
조 : 우리는 바다 동쪽에 치우쳐 있어 토산물은 곡식과 무명 정도고요. 사치품도 없어요. 풍속도 검소해서 새로운 거 만들기 싫어하구요. 조정에서 강제로 실행한다 해도 안 따를 걸요? 거기다 새로 무역하면 백성들이 법 어기는 일도 많을 거고 번잡해지겠죠. 좋은 관계 맺었다가 이것 때문에 깨질 수 있는 겁니다. 귀국에도 이로울 것 없고, 우리나라도 손해예요. 이전처럼 왜관에서 교역하는 것만 못 하죠.
일 : 두 나라 관계가 막혔던 건 확실한 조약이 없어서 그렇죠. 확실한 규칙을 정해놓으면 교류가 끊어질 일이 없을 겁니다. 이게 바로 만국공법입니다.
조 : 이런 통상은 우리나라는 해 본적 없는 거고 백성들도 듣도 보도 못한 겁니다. 이걸 백성들의 뜻을 들어보지 않고 승낙할 수 있겠습니까? 정부에서도 어려운데 나 같은 일개 사신이 말할 순 없죠.
일 : 귀 대신이 전권이 없다면 늦어지겠네요. 전권대신을 보내주길 바랍니다.
조 : 나 역시 대관입니다. 이미 대신이 눈 앞에 있는데 다른 사람을 만나겠다는 겁니까?
일 : 그럼 누구랑 얘기하라고요?
조 : 조정에 보고하면 답할 수 있겠죠.
일 : 그럼 두 분이 직접 올라가서 임금을 뵙고 답해주세요.
조 : 이미 명령 받고 왔으니 문서로 교환하면 됩니다.
일 : 그 동안 시간 많이 걸릴건데요? 며칠 안으로 됩니까?
조 : 왔다갔다 하는데만 며칠이죠.
일 : 우리가 일본을 떠난지도 오래됐어요. 한시가 급합니다. 더 늦어지면 안 돼요. 부디 우리가 빨리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조 : 그 말도 넣어서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19일,

일 : 우리 정부에서 보낸 화륜선이 제물진까지 왔습니다. 한시가 급해요.
조 : 모두 전했습니다. 조정의 처분은 아직 모릅니다. 며칠 안에 될 문제가 아닙니다.
일 : 조약 책자는 귀 대신이 훈도에게 분부해서 복사한 겁니까?
조 : 원본 받을 수 없으니 베끼게 했죠. 귀 대신이 베끼지 말랬는데 그럼 뭘 조정에 보내겠습니까?
일 : 그렇군요. 그렇게 해서 귀 조정에서 승인한다면 즉시 돌아가겠지만, 안 되면 우리 일은 끝났으니 다시 만날 일 없을 겁니다.
조 : 보고 했으니 그냥 결과 기다리죠.

일 : 계속 이런 얘기 하는 이유가 뭐냐면요. 이게 좋게 해결 못 되면 불행한 일이 생길까 하는 겁니다. 화목한 관계가 나빠지면 우리 군사들이 상륙할지도 몰라요.
조 : 어제 끝난 얘긴데요? 왜 갑자기 군사 얘기가 나오죠? 이게 예의고 도리입니까? 안 그래도 귀 대신의 군사들이 인천이랑 부평에 상륙한다고 떠들어대는데 장난이라 해도 이렇게 함부로 입 밖에 낼 얘깁니까? 이건 누구 잘못이죠? 이거 확실히 해 주시죠.
일 : 아 뭐 금지시켰으니 걱정은 마시구요.

그 동안 조정에선 다른 일로도 바빴습니다. 청에서 칙사가 왔거든요. 이 때 일본이랑 조약 얘기를 안 했을 리가 없는데 딱히 나오는 게 없네요. 중국에서 알아서 막아주진 않았지만 조선에서 알아서 한다고 문제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 소식이 들리면서 최익현을 필두로 상소가 빗발칩니다. 그냥 다 물리치라는 거였죠. 하지만 이 때 고종의 판단이 참 의외입니다. 오히려 그런 의견을 다 물리쳤고, 최익현은 아예 흑산도로 보냅니다. 24일 의정부에서 올린 말이 조정의 상황을 말해줄 겁니다.

"방금 접견 부관의 등보를 보니, ‘일본 사신이 수호 통상을 하자는 일로 베껴 올린 조규 책자를 묘당으로 하역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300년 동안 믿고 화목하게 지냈으며, 왜관을 설치하고 상호 간에 저자를 열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서계 문제로 서로 대립하여 왔으나, 지금은 계속 좋게 지내자는 처지에서 반드시 통상을 거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호 조약 등 문제는 충분히 더 토론하여 양측에서 서로 편리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이런 내용으로 접견 대관에게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종은 허락했고, 신헌에게 전권을 맡깁니다. 신헌은 한 차례 물러나지만 고종은 그를 굳게 믿었죠. 이 때가 29일, 그리고 조일수호조약, 이른바 강화도 조약은 2월 3일에 체결됩니다.

내용이야 다들 아실테니 의외인 부분을 넣자면...

2월 6일, 신헌과 윤자승은 강화도에서 돌아옵니다. 이 때 그들의 대화를 봅시다.

"문답장계를 보니, 과연 말을 잘 하였다."
"다행히 임금의 영위에 의지하고 묘당의 계책에 힘입어 명을 욕되게 하는 것을 면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입장에서도 만족스러웠다는 것이죠. 기본적인 내용은 일본에서 요구한 초안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헌데 조선에서 문제삼아서 개정한 부분이 있었죠.

"이어서 함께 사사를 논하여 "대"자와 "황제폐하"라는 자를 제거하고 그 밖에 조금 개정한 것이 있는데, 자못 그의 힘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국서를 없애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정부와 저들의 태정부, 예조와 외무성이 서로 왕복하기로 이미 도타이 정하였습니다."

조선에서 신경쓴 부분은 의외로 제 1관이었던 것이죠.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요. 맨 처음 나온 걸 보진 못 했는데, 저 말을 보면 처음에는 일본 천황과 조선 왕 사이의 조약이었던 모양입니다. 이후로는 그런 걸 없애고 양국간의 외교는 군주가 아닌 양국 외교관으로 한정한 것이죠. 애초에 문제가 됐던 일본의 황제국 관련 용어문제를 이렇게 해결한 것이죠.

뭐 일본에서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겠습니다만...

그 외에도 조선이 요구한 게 여럿 있긴 합니다. 하지만 서학이나 아편 같은 것을 금지하는 정도였죠.

신헌은 그런 상황에서도 말을 잘 했고, 조선측의 요구를 관철했습니다. 위의 대화에서 뭔가 꿀린다는 느낌은 딱히 들지 않죠. 하지만 그게 불평등 조약이라는 건 알지 못 했습니다. 그게 당시 조선의 상황이었죠.

설령 평등 조약이라 해도 힘들었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상황은 그렇게 큰 차이가 났으니까요. 척화파들의 말이 틀린 거 하나 없었습니다. 나라가 통째로 먹힌다는 건 이때까진 오버라 하더라도 경제가 먹힐 거라는 건 알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근대의 길로 나아가려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왜 불평등인지 알려면 불평등 조약을 맺고 배워야 알았고, 근대식으로 군대와 경제를 바꿀려면 문을 열어야 했습니다. 이후 일본과도 추가로 조약을 맺고, 서양과도 하나하나 맺어갔으며 그 청나라와도 근대식으로 조약을 맺습니다. 다 불평등했죠. 하지만 그 길밖에 없었습니다.

고립된 섬, 쓰나미가 몰려오는 상황입니다. 나가면 십중팔구는 죽습니다. 하지만 살 길은 나가는 것밖에 없었죠. 문을 닫고 더 높은 곳으로 숨으면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순 없었죠. 방법은 하나, 나가서 살 길을 모색하는 것 뿐이었죠.

일본에서 조약을 꺼낸 날부터 조약이 체결되기까 정말 순식간에 진행됩니다. 조선에서도 적극적이었다는 것이죠. 조정에서는 이제 문을 열자는 쪽으로 흘렀지만, 유림부터 백성들의 여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결국 조정에서 밀어붙여야 가능했던 것이죠. 그 중심엔 고종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힘에 겁먹었다 하지만 그 규모를 생각하면 양요 때와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어떤 피해를 입든 무시한다면 시간은 벌 수 있었을 겁니다. 만약 겁먹었다면 그건 일본의 힘이 아니라 더 이상 홀로 버틸 수 없는 근대의 파도를 겁 먹은 거겠죠. 거기다 일본은 시작하기 좋은 나라였습니다. 근처에 있어서 배우기 쉬웠고, 그저 오랜 외교를 계속 잇는 것 뿐이다고 국내의 반발을 진정시킬수도 있었구요.

정치적으로 따진다면 그가 쇄국을 고집할 경우 대원군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게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걸 감안해도 너무 빠르네요. 그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한 20년 후라면 모를까 지금 겁만 먹고 문을 열어줬다 하기엔 너무 이르죠.

조약이 체결된 후 4월, 고종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수신사를 파견합니다. 그 때 김기수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하죠.

"이번 길은 단지 멀리 바다를 건너가는 일일 뿐 아니라 처음 가는 길이니, 모든 일은 반드시 잘 조처하고 그곳 사정을 반드시 자세히 탐지해가지고 오는 것이 좋겠다"
"대체로 보고할 만한 일들은 모름지기 빠짐없이 하나하나 써 가지고 오라"

그는 일본에서 환대를 받고 돌아옵니다. 6월(통신사가 기간이 오래 걸린 걸 생각하면 역시 시대가 바뀌었군요)에 돌아오자 다시 그를 만나죠.

왕 : 전선(電線), 화륜선, 농기계에 대하여 들은 것이 없는가? 저 나라에서는 이 세가지를 가장 급선무로 여기고 있다는데 과연 그렇던가?
김 : 과연 그렇습니다.
왕 : 기계들은 다 어디서 나온 것이던가? 일본에서는 이제 모두 배웠다던가?
김 : 여러 나라의 기계들을 이제는 모두 배웠다고 합니다.
왕 : 재주가 이미 정교한데다가 배우기를 또 부지런히 하니 이와 같이 쉽게 터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 들을만한 것을 모두 말하도록 하라.
김 : 풍속이 대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17년(1880)에는 김홍집을 보냈고, 또 여러 가지를 물어보죠.

왕 : 일본에서 각국의 말을 배우는 학교를 널리 설치하여 가르친다고 하는데, 그 학교의 규모는 어떻던가?
김 : 신이 일찍이 그 곳에 가보지는 못하였지만 각국의 언어를 모두 학교를 설치하여 가르친다고 합니다."
(화산 얘기는 생략)
왕 : 몇 해 전에 사쓰마 사람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는 것을 그 대신 이와쿠라 토모미가 막아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 일이 사실인가?
김 : 이 말은 진실로 확실합니다.

왕 : 저 나라의 66개 주를 지금 모두 통합하였다고 하던가?
김 : 66개 주를 폐지하고 나누어 36개 현으로 만들었으며, 현에는 합을 둔 것이 마치 우리나라의 감사 제도와 같았습니다.
왕 : 각 주를 세습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지위를 상실했는데, 원망하는 뜻이 없던가?
김 : 그들이 마음속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듯하나, 모두 녹봉을 후하게 받으면서 도성 아래에서 산다고 합니다.
왕 : 부세를 많이 견감했다고 하던가?
김 : 참으로 그렇습니다. 무릇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정사는 반드시 들어서 행한다고 합니다.
왕 : 육군을 조련하는 것은 그 방법이 어떻던가?
김 : 모든 동작이 자못 군사 규범에 맞았습니다.
왕 : 저 나라는 과연 러시아를 몹시 두려워하던가?
김 : 온 나라에 그것을 위급하고 절박한 걱정거리로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중략)
왕 : 저들의 무기가 지금 서양 각국을 대적할 수 있다고 하던가?
김 : 저들이 배운 것이 서양의 병법이므로 스스로 서양에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네덜란드를 질문하자)
김 : 네덜란드는 서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로서 면적이 우리나라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왕 : 나라는 이처럼 작은데 무슨 방법으로 능히 이와 같은가?
김 : 나라가 크건 작건 관계없이 무기가 정예한 것은 또한 스스로 강하게 하고 실제에 힘쓰는 것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왕 : 순사들이 거리를 단속하는 것이 자못 엄숙하다고 하던가?
김 : 그렇습니다.
왕 : 저 나라에서는 각기 그 재주에 따라서 사람을 가르치기 때문에 비록 부녀자와 어린아이라도 모두 공부시키니, 그렇다면 한 사람도 버릴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김 :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도 놀고 먹는 백성이 없었습니다.

뭐 이런 거 외에 참 많습니다. 이 때 김홍집이 들고 온 것이 바로 조선책략이죠.

고종은 근대화를 꿋꿋이 추진하려 했습니다. 롤모델은 일본이었죠. 일본처럼 부국강병의 길을 걷고, 백성들도 잘 살 수 있는 길... (아니 실제 일본인들이 잘 살았냐는 건 둘째치고 (...)) 일본이 했는데 우리라고 못 하겠는가... 그런 걸 바란 거겠죠. 나라가 먹힐 거라는 생각까진 못 했겠지만, 문을 여는 게 쉬울 거라고는 생각 안 했을 겁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살아남는 건 그의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죠. 그의 능력, 지배층의 능력과 의지, 조선의 상황, 외국의 상황... 이 모든 것이 갖춰져야 했으니까요.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했지만...

잘 됐다면 어느 정도 실정이 있다 해도 한국의 역사를 바꾼 군주로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죠.

그리고 일본, 이전에도 충분히 짜증나는 이웃나라였지만, 이 때부터 일본은 정말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됩니다. 일본의 침략을 걱정해야 했지만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은 일본밖에 없었습니다. 개화기, 일제강점기, 해방을 거치면서 일본은 언제나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 역시 일본이었죠. 해방 후에야 미국의 영향이 더 커지긴 했지만요.

이렇게 조선은 문을 엽니다. 희망을 품고 말이죠. 그리고 그 희망이 너무나도 처참히 깨진 것을 아는 우리에게는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오는 시대죠.

이렇게 개화기는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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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29 13:47
수정 아이콘
개화할 최적의 타이밍은 정조 때였다고 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swordfish
13/06/29 14:09
수정 아이콘
사실 50년 전에 서양 상대면 최익현의 주장은 틀리지 않긴 했죠. 병력을 보내 봤자 서양 군대가 몇천이고 설쳐 봤자 해안가 였을 테니 말이죠.

하지만 당시면 서양이라도 헛소리고 바로 옆의 일본이라도 헛소리가 됩니다. 당장 제 2차 아편 전쟁에서 중국과 상대하는 영프 군이 5만명을 동원했으면 함선만 200척 가량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당장 한해 한해 지나면서 기술혁명 때문에 폭발적으로 증가 했구요.
그리고 문제는 바로 옆나라에 무진전쟁과 서남전쟁을 거친 일본인 지라...도저히 조선이 막을 수 없는 전력이죠.
청이 병합 정도는 막아 줄테지만 개화는 안막아주었을테니 이건 불가능한 걸 정부에 요구한 것과 다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 정부에 UFO의 진실을 밝혀주세요. 급 헛소리가 되는 거죠. 불과 반세기 만에요.
13/06/29 14:14
수정 아이콘
조선은 아편 전쟁의 심각성을 몰랐었나요?
swordfish
13/06/29 14:23
수정 아이콘
제가 알기로는 1차는 있었다 정도는 알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단지 1차 아편전쟁의 주 전장은 조선 사신이 거의 갈일 없는 강남 지역이었으니 말이죠.
심지어 중국이 외적을 물리쳤다 정도로 알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냥 그럭저럭한 양이의 침범 정도였죠.

하지만 2차는 베이징 근교가 쑥대밭이 되었는데 이걸 통해 전혀 다른 판단을 한거 같습니다. 서양이 무서우니 연다 가 아닌 이런 무서운 넘들과 상종하지 말아야 겠다 정도?
Practice
13/06/29 15:53
수정 아이콘
이 시점에서, 조선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있게 만들려면 역사에 남을 만한 수완가가 등장해야 할 텐데, 국가의 중대사에 백마 타고 등장한 초인이 모든 걸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허무한 건 없겠죠. 그 당시 조선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저 나름의 생각하는 바가 어찌 없었겠습니까만 어디까지나 '저 나름'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고, 어쨌든 역사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방향으로 흘러갔죠. 본문과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소리이긴 합니다만, 일본이 미국의 싸대기를 때려 줘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광화문 광장에 서 있는 게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겠죠... 흐흐
란츠크네히트
13/06/29 21:09
수정 아이콘
일본이 미국의 싸대기를 때린건, 일본이 중국을 통째로 먹으려고 한 이상 필연적이였다고 봅니다. 일본이 중국을 넘보지 않았으면 서구열강(특히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2차대전에서 승전국에 포함되어 한국-대만은 유지할 수 있었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냉전으로 들어서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면 일본을 인정 안할수 없겠죠. 그럼 pgr은 스타 대신 콘솔 게임 사이트가 됬겠고 우리는 왜 일본어는 이렇게 타자치기가 힘들까 하고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겠죠. 역사에 만약은 없는거지만 상상의 나래가 마구 펼처지네요.
내일은
13/06/29 16:25
수정 아이콘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열강의 개방 요구와 무력 시위 앞에서 버텨내고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의 사례가 (그나마 국가라도 있으면 다행이고 많은 경우 부족 사회...) 실질적으로 일본이 유일하다 싶은데... 하필 그 일본이 바로 옆나라 였다는 점이 조선의 불운이었죠.
그리고 일본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역사에 가정이 있다면) 러시아 정도에 반식민 상태였을 겁니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국민들이 낯선 공장에서일하는 것을 두려워 하자 모범을 보이라고 귀족 자제 특히 여성들을 공장에서 일하게 만들 정도로 뿌리 깊은 신분제 조차 무시하는 과격한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조선에서는 이 정도 개혁이 불가능했을 거라고 봅니다. 갑오나 광무의 개혁 조차도 외세의 압력이 너무 뚜렷한 상태에서 이뤄진거라..
Practice
13/06/29 16:29
수정 아이콘
태국도 추가요 흐흐; 개인적으로 태국이 어떻게 그런 위치에 놓일 수 있었는지 그 당시 그 주변의 정세가 참 궁금한데...
에이멜
13/06/29 17:18
수정 아이콘
이 당시의 조선 운명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학기술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렇듯이 국가의 힘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군사력이고, 고종이 권력을 잡았을때 조선은 군사력에서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군사력이라는 것은 결국 과학과 기술에서 나오는 것인데 조선은 개항 이후에도 서양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엄청난 시간을 소요해버립니다.

한국 최초의 수학 학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유일선 선생 인데 이 분은 도쿄물리대에서 1904년에 학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바꿔말하면 1904년까지는 수학학사조차 단 한명도 없었다는 이야기죠. 물리학이나 공학 등등에서도 학사 한명 없는 상황에서 군사력의 기반이 되는 공학이나 물리학이 발달 할 수 없는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 흥선대원군이 제네럴 셔먼호의 복제를 시도했다는 일화인데 결국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
사실인지 미심쩍으나 링크와 함께 달아둡니다.

http://www.redian.org/archive/8312

(전략)정말 이양선은 우리 힘으로 복제되었을까요? 여기 이 기록을 한번 들어보세요. 문일평이라는 민족사학자가 쓴 “대미관계오십년사”라고, [호암전집]에 실린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때 평안감사 박규수는 불에 타든 미선(米船)을 아삿스나 운용(運用)의 법을 아지못하여 위에 보고하는 동시에 그 파선(破船)을 끌어 한강까지 보내었다. 대원군은 기교로 유명한 김기두 등으로 하여금 그 선제(船制)를 모방하여 철갑함 하나를 맨들게 한 바 그 운전법은 목탄을 피어 거기서 발하는 증기로써 기륜을 돌아가게 하였다. 그렇지만 선체는 무척 크고 무거우며 증기의 힘은 아주 미약하여 불을 암만 때고 물을 아무리 끓여도 움지기지 아니하였다. 부득이 그것을 뜯어 다시 지으니 그 비용이 수십만금이 들고 무고(武庫)의 동전이 이로 인해 왼통 없어지고 말았다. 대원군이 몸소 임하여 이번 새로 만든 배의 진수식을 거행할 새 탄화(炭火)를 피어 기륜을 돌아가게 하였으나 선행(船行)이 매우 느려서 한 시간에 겨우 십여보밖에 더 가지 못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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