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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6/20 23:45:00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강희제 이야기(8) ─ 동트는 새벽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재앙에 직면했을때,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라고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재빨리 침착을 되찾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답을 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희제는 후자에 속했습니다.


왕보신의 배반 소식을 들은 강희제는 즉시 대군을 서안으로 파견했습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양양에 있던 병력이 일부 서안으로 이동했고, 용맹한 몽고병사 3,500여명도 황급히 서북으로 움직였습니다. 북경에 주둔하는 팔기병 중 일부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이 모든 조치는 섬서로 오삼계 대군이 물밑듯이 밀고 들어오는 일을 막기 위한 행동입니다.


이렇게 관군을 파견하여 섬서에 대한 방어를 단단히 하는 동시에, 강희는 서북에서의 동란을 일거에 잠재울 방안에 대하여 고심했습니다. 물론 가장 좋은 해결책은 왕보신이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본래 왕보신과 청나라 조정은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태를 잘 헤아려 보면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선 강희는 섬서 총독 합점에게 명해 왕보신을 회유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라고 전하는 한편, 이렇게 묘한 소리를 덧붙였습니다.


강희의 말에 따르자면, 난을 일으킨 관병들은 "사천의 길이 험하고 멀며, 군량은 계속 이어이지 않으니, 죽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변란을 일으킨 것." 이며, "관병이 난을 주동하고, 변란이 갑작스럽게 일어났으므로 부득이한 상황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황제는 반란군의 죄를 가중시키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즉각 위무하여 군영에 돌아오기를 원하는 자는 즉시 복귀시키고, 만일 귀농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이전의 죄를 추궁하지 말라고 하여 용서해주고, 연좌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또한 왕보신의 반란이 명확해진 현 상태에서도 병부에 명해 왕보신의 처자를 "절대로 해치지 않고, 모두 잘 보살펴" 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보신의 아들 왕계정을 황궁으로 불렀습니다. 왕계정이 황궁에 들어오자, 강희는 불문곡직하고 곧바로 입을 열었습니다.


"너희 부친이 반란을 일으켰다."


존엄한 황제를 만나는 긴장되는 순간에, 난데 없는 이야기를 들은 왕계정은 말문이 막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대답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강희는 반란에 관한 상소를 왕계정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글을 읽은 왕계정은 내용을 아래로 읽어나갈 수록, 두려운 마음에 식은땀을 계속해서 흘렸습니다. 그의 얼굴색은 붉어지다가, 나중에는 하얗게 되어 아무 말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무리도 아닙니다. 반역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은 역사를 막론하고 가장 끔찍한 처형 방법이었으며, 이는 반역자의 인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그는 꼼짝없이 잔혹한 형틀에 묶여, 반역자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살점이 수천조각 뜯겨나갈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왕계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고, 강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 습니다. 그렇게 잠시간 침묵이 흐르다가, 왕계정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와 현지 사령관이었던 막락의 불화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강희제는 왕계정을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듯 달랬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네 부친의 충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결코 모반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경략인 막락이 화해와 조정에 실패하여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 세력이)너희 부친을 위협하여 어쩔 수 없이 반란에 따르도록 했을 것이다. 너는 즉시 가서 부친에게 나의 말을 전하라. 너희 부친은 무죄이고, 경략을 살해한 죄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 너희 부친이 부대원들을 단속하는데 노력하여, 적을 격파하고 공을 세우면, 나는 일체의 죄를 사면할 수 있다. 이는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


극악무도한 형벌로 처형이 될 수도 있었던 왕계정은 이렇게 살아났고, 그는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아버지가 있는 서북으로 황급히 이동했습니다.
 

이 칙서의 내용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면, 왕보신을 질책하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강희는 그저 "놀랐다" 정도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왕보신의 죄는 아무것도 없으며 어쩔 수 없이 지금의 형세에 이르게 되어 슬프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게 못했기 때문' 이라며, 왕보신을 질책하는 대신 황제인 스스로를 질책했습니다.


이러한 칙서를 받은 왕보신은 착찹한 심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그는 변란이 일어난 원인은 오직 막락이 마땅함을 잃어 군심이 복종하지 않은 탓이라고 둘러대면서, 자신은 결코 반란에 따르지 않았지만 어찌하다보니 상황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려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투항하는 관병의 목숨을 조정이 보장해준다면, 자신은 죽는다고 하더라도 기꺼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예민한 강희는 대화의 흐름을 재빨리 읽어냈습니다. 황제가 "기왕의 일은 모두 추궁하지 않겠다." 하여 공언하였는데, 왕보신은 계속 다른 제안을 덧붙이며 구체적인 투항의 행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강희는 왕보신이 조기에 투항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회유 정책은 침착하고 끈기있게 계속 진행되었지만, 부드럽고 의례적인 가면 뒤에는 철의 주먹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황제는 군사적인 대비를 철저하게 점검했습니다.


실제로 왕보신은 투항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막락은 청 조정의 중신이고, 서북의 최고 지휘관이었습니다. 아무리 황제가 공언을 한다 하여도 처벌을 받지 않는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것입니다. 조정에서 파견된 낭중(郎中)이 계속 왕보신을 재촉했지만,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던 왕보신은 마침내 그 낭중을 살해 했습니다. 




오삼계




왕보신의 반란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은 강희 뿐 아니라 오삼계도 있었습니다. 오삼계는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즉각 왕보신에게 은을 2,000만냥이나 보내어 위로하였고, 동시에 '평요대장군섬서동로총병' 이라는 거창한 지휘를 내렸습니다. 오갈 데  없는 왕보신은 오삼계의 품으로 날아왔습니다. 


오삼계와 왕보신의 동맹. 강희는 이를 대단히 두려워 했지만, 현재로선 마땅히 저지할 방법이 없습니다. 때문에 그는 속전만이 승리의 지름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현지에 나가 있는 장군 동액에게 어서 움직이라고 재촉했습니다. 오삼계의 손길이 서북에 미치기 전, 어서 왕보신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액은 전투를 두려워 했기에 전혀 싸우지 않았습니다. 삼번의 난 초기에 조정은 원할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제 아무리 강희가 판단을 내려 작전 지시를 해도 현지에서 번번히 이를 묵살한 탓입니다.


동액이 머뭇거려 생긴 시간만큼 오삼계와 왕보신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힘을 합쳤습니다. 오삼계는 막대한 자금력과 인력으로 섬서와 감숙에 사람을 파견, 관병들의 반란을 선도했고 이에 서북이 진동하면서 난주(蘭州) 등이 무너지고 수많은 관병들이 저마다 성을 헌납하여 왕보신을 따르는 재앙이 벌어졌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섬서와 감숙의 거의 전역에 이르는 지역에서 수많은 관리와 장수들은 반란군에 합류하고 말았습니다.


사태가 어찌나 심각했는지 섬서에서는 오직 서안만 남았을 뿐이었고, 감숙에서도 하서주랑(河西走廊)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삼계 세력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실로 이때야말로 삼번의 난에서 최고의 위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녁의 어둠이 지나가고 나면 아침의 해가 떠오르는 법이고, 절망의 아래에서는 희망의 싹이 내려져 있는 법 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이르게 되었다고 생각 될 무렵, 반전의 계기는 마련되었습니다. 희망이란 이름의 태양은 동쪽에서부터 떠올랐습니다.




복건의 경정충은 당초에 그 세력이 대단히 막강하여 위세가 당당했고, 서쪽으로는 오삼계와 약속하여 강서로 진군하기로 하는 한편, 바다 건너 사신을 보내 대만의 정경을 설득, 정씨의 함대가 중국의 동남 해안을 괴롭히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경정충의 반란군이 일어나며 치안이 불안정해지자 사방에서 산적과 도적이 들끓었고, 정경충은 다시 이들과 연합을 하여 관군을 격파하여 한때 동남의 천하는 완전히 반군의 세력에 넘어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회전양면 전술로 경정충에게 화의의 손길을 내미는 동시에, 1674년 7월 무렵 절강 총독 이지방 등에게 명하여 무력 토벌을 병행하게 했습니다. 삼번의 난 당시 무능한 졸장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게중에 이지방의 이름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지방은 수만의 적군이 몰려오는 위급한 상황에서 부하들이 퇴각을 권유하자, 오히려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전군의 사령관이다! 내가 물러나면 적을 받아들이게 된다. 오늘의 승패는 곧 나의 생사이다!"


그렇게 말한 이지방은 겁을 먹고 진군하지 않는 장수들을 곧바로 군중 앞에서 참수하여 사기를 다독였고, 7월 12일부터 18일까지 다섯 번 적과 생사를 건 사투를 펼쳐 적을 대패시키고 승기를 틈타 잃었던 지역을 수복했습니다. 뜻밖의 패전을 당한 경정충은 세력을 다시 조직하여 수만 부대를 모아 역공을 취했으나 복건의 관군은 다른 곳의 관군하고는 달리, 용맹무쌍하여 수차례 적을 격파했습니다. 이 지역에 파견된 강친왕 걸서는 반란구을 수차례 참패 시켰고, 10월, 반란군 도독 서상조 휘하 마병 및 보병 5만여명을 대파, 적 3만을 참수하고 기세를 타고 진격하여 반란군을 격퇴하고 추가로 1만여 명을 참살했습니다.


경정충은 예상외로 막강한 관군의 공격에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1676년 2월 7일, 관군은 반란군 2만여명을 참수시켜 또다시 결정적인 대승을 거두었고, 반면에 경정충은 대만에서 불러온 정경과의 불화가 발생해 5월이 되자 파견 시켰던 군대를 전부 회군시켜야 했습니다. 악재가 여인어 벌상해자 군량이 결핍되고, 부하들은 지휘를 듣지 않았으며, 심지어 수하 8,000여명이 달아나는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기껏 불러온 대만의 정경은 이 기회를 살려 오히려 경정충의 후방을 공격했고, 관군의 이지방과 강친왕은 전투에서 계속 연전연승하자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상황을 포착한 강희는 경정충에게 다시 한번 투항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지금 대군이 선하령에 주둔하고 말을 달려 포성을 공격했다. 포성은 복건성의 재화와 세금의 원천인데 목구멍을 잃었으니 식량을 보급받을 수 없다. 건녕 및 연평이 무너져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왕작을 그대로 유지하고 백만의 백성을 보전하는 편이 낫다. 게다가 정경은 그대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군읍을 탈취할 때 그대가 마땅히 대군을 도와 토벌하여 공을 세우면 되거늘, 왜 오랏동안 원수를 섬기고 있는가."


방법이 곤란해진 경정충은 하는 수 없이 투항했습니다. 그는 1677년 무렵 관군과 힘을 합쳐 대만의 정경을 하문으로 쫓아보냈고, 이로서 복건이 평정되었습니다. 복건은 당초 경정충의 기세에 비해서는 상당히 순조롭게 일이 풀린 편입니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군 지휘관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능하고 결단력이 있었던 탓으로, 이길 싸움도 질질 끌며 늘어지는 형편없는 모습이 복건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다른 전선에서는 지휘관들의 무능이 상당히 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정충 세력을 상대로 승기를 잡아가던 1675년 2월, 강희는 병부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삼계가 악주, 풍주등을 점령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오군의 수군이 끊임없이 장사에서 출발하여 동정호를 타고 악주로 운반, 군량을 풍부하게 공급하기 때문이며, 이를 막기 위해 강서에서 출발해 장사를 공격하여, 오삼계 반란군의 식량 운반로를 막고, 악주를 협공하자는 전략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강희는 그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안친왕 악락(岳樂)에게 명령, 정예병을 거느려 움직이도록 했습니다. 


이에 대해 악락은 다른 문제를 꺼냈습니다.


"강서 각지는 아직도 반란군이 소요를 일으키고, 민심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군사를 호남으로 이동하면 강서의 병력이 부족해지므로, 우려 할 만 합니다. 응당 먼저 강서의 반란을 평정하여 후환을 없애고, 이후에 군대를 나누어 요충지를 방어하고 군사를 호남으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강희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또박또박 반박하여, 더 이상의 항변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오삼계가 오랫동안 호남을 점령했기 때문에 이를 틈타 간사한 도적 떼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운남, 귀주, 사천, 복건 지역이 함락되고, 광서 및 섬서의 역적이 창궐하게 된 것이다. 호남에서도 한 귀퉁이에서 적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방에서 도적 떼들이 관망하고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오삼계를 무너뜨려 호남을 안정시키면 각자의 도적 떼들은 자연히 흩어지게 되어있다. 호남을 진격하여 점령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재론하지 마라."


결국 9월, 공격 명령은 정식으로 떨어졌고 11월이 되어 준비를 모두 마친 악락은 호남으로 출정했습니다. 강희는 녹기병 3,000명과 2,000여명의 병사를 또다시 보내어 악락을 지원했고, 아담 샬이 만들었던 화포 20구를 현지로 운반시켰습니다. 


악락이 진군할동안, 마침 복건에 있는 (아직 평정되기 이전의)경정충 휘하 여러 총병들은 비밀리에 연락을 보냈습니다. 만일 관군이 강서에서 복건으로 진군한다면 내응할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악락은 이 이야기를 강희에게 전하면서 복건으로 진군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전했지만, 강희는 이 문제는 자신이 알아서 할테니 악락은 장사로 계속 진군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상가희 역시 악락에게 연락을 보냈습니다. 마침 한참 광동 동쪽의 변란으로 상가희의 처지는 어려웠던 상황이라 악락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희는 광동 동쪽을 거쳐 호남으로 진군하면 돌아서 가게 되므로 기일에 맞출수 없고, 또 오삼계 주력을 견제하면 그런 자잘한 세력들은 금세 사그라들것이라 말하면서 악락에게 가던 길을 계속 가라고 전했습니다. 대신 간친왕 나포(喇布)를 보내 상가희를 약간이나마 도와주려는 모습은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악락을 파견한 강희제는 형주에 주둔해서 머뭇거리만 하는 늑이금도 질책했습니다.


"너희가 형주에 주둔한지 2년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군영을 지키고 자신만을 지키는 데 급급할 뿐 조금도 나아가지 않는다. 현재 안친왕이 장사에 진군하고 있는데, 만일 군사를 보내 협공하지 못할 경우, 오삼계는 형주와 악주의 병력이 움직이지 않음을 알고 장사를 사수할 것이므로, 너희들이 군기를 거스르는 죄는 더욱 커지게 된다."


이 당시 오삼계는 17만 대군 중에 7만을 악주와 풍주 등지에 주둔시켜 형주의 군대를 막게 하고, 병사 10만은 장사, 평향 등에 주둔시켜 강서의 군대를 방어하려고 했습니다. 


10만 대군이 버티고 있는 평향에 악락이 당도한 것은 다음 해 2월 경입니다. 마침 관군에게 행운이 있었는데, 이 당시 평향을 지키는 오군의 장군 하국상이 또다른 대장 한대임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고, 매일 술만 마시며 진영에서 여자들을 끼고 사는 인물이라 오군의 사기가 매우 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틈을 타 악락은 한족 군병을 앞세워 진격했고, 적군 1만명을 참수했습니다.


강희는 이 장사 싸움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루에도 수차례씩 북쪽에서 천단위가 넘는 군대가 지원을 위해 속속 도착했고, 관군의 기세에 오삼계 역시 몹시 놀라며 필사적으로 적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하남의 오삼계 본대는 경정충이나 왕보신의 부대와는 달리, 경험이 대단하고 전투력이 엄청나 관군을 압도하는 부대라 싸우기 쉽지 않았습니다.


3월, 드디어 오삼계 군과 악락 군대가 장사성 외곽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싸움은 엄청나게 치열하여 양군은 서로 19로(路)를 보내 수십리를 이어지며 겨루었고, 그런 혈전 와중 오삼계 휘하 장수 왕서(王緖)가 군사를 이끌고 적 진영을 함락하려다가 관군에게 여러 겹 포위되어 기치도 모두 부러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연히 관군은 모두 이 부대가 끝장났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놀랍게도 왕서의 군대는 청군의 포위망을 짖이겨 버리고 오히려 역습을 감행, 적을 대파하고는 위풍당당하게 귀환했습니다. 오삼계 부대의 힘이란 그 정도로 가공할만 했고, 이에 비해 관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치열한 싸움 와중, 오삼계의 조카인 오국귀가 화살을 맞아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오군의 장수인 하국상은 재빨리 달려들어 그를 구출했는데, 공을 세울 기회라 여긴 관군은 그들을 급히 추격해왔습니다. 그런데 성 가까이에 오자 실로 믿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코끼리들이 나타났습니다.





오삼계가 언덕 아래에 숨겨놓았던 큰 코끼리들은 맹렬한 기세로 진군을 시작했고, 관군은 그야말로 기겁하여 싸움도 포기하고 비명만을 지르고 달아나서, 추격하고 도망치는 소리는 가히 천지를 뒤흔들 정도였습니다. 다시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고, 서로가 피를 어마어마하게 흘리며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드디어 전투는 종결되었습니다.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 뒤, 오삼계는 당분간 성에 들어가 방어하며 싸우려고 하질 않았고, 관군도 성을 포위하고 다시 싸우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치열한 싸움의 결과들을 숨죽이며 듣고 있던 강희는 순간 발상의 전환을 했습니다. 오삼계는 지금 장사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으니, 이 틈에 악주를 공격하는 기동력을 보인다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황제는 꾸물대는 대장군 늑이금을 재촉하여 1676년 3월 18일 목표로 진격을 하게 했고, 실제로 동정호에서 오삼계 반란군을 연거푸 물리치며 그들을 밀어부쳤습니다. 계획대로 승리의 여세를 몰아 진격을 하게 한다면, 예주, 상덕, 상음 등을 쉽게 수복하고 장사를 협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황다앟게도 늑이금 등은 '겁을 집어먹고' 더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오삼계는 전열을 정비, 반격을 하도록 했고 늑이금은 피해가 심해지자 폭염을 구실로 형주로 달아났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한심한 일이었고, 늑이금은 창피하고 분해 강희에게 죄를 청했습니다. 강희는 늑이금이 헛되이 군사를 소모하고 '8개월 안에 끝내겠다는' 싸움을 3년 동안 계속하면서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사실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잠시 원래의 직분을 그대로 두고, 적극 노력해서 속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한심스러운 일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 당시 오삼계는 장사에 대한 포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따로 수만명의 병사를 강서의 길안으로 진군시켰는데, 강서의 전투를 지휘하던 간친왕 나포는 군사를 지원해 이를 구원하지 않고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던 황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군이 있어도 지원을 오자 않자 결국 길안은 함락되었습니다. 참고 있던 강희도 너무나 화가 나서 불같이 성질을 내며 나포 등을 재촉해 길안을 수복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나포는 본인은 직접 가지 않고 장군 합이합제 등을 따로 보내었고, 합이합제도 길안에 이른지 수개월동안 조금의 공적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오삼계 군대는 더욱 기세를 타고 예릉 등을 함락시켰습니다.


지휘관의 무능은 장사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왕보신을 상대해야할 서북에서도 이에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았습니다. 


왕보신의 배반은 일종의 변고 입니다. 따라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패륵 동액이 재빨리 제압하려 했다면 더 조그만 일로 끝낼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지휘관 동액은 너무나 겁을 먹은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강희는 동액에게 최후 통첩을 날렸습니다.


"이 모든일은 동액 등이 물러나 위축되었기 때문에 벌어난 일이다. 마땅히 해직해야 하나, 다만 전쟁 중이므로 군사를 이끌고 평량, 진주 등지를 안정시키며, 이전처럼 물러서서 군기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동액은 이러한 칙서를 받자,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진주(秦州)로 이동시켰습니다. 이윽고 1675년 3월, 그의 군대는 진주를 포위했습니다. 강희는 이 싸움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섬서 총독, 사천 총독에게 모두 소속 부대를 이끌고 진주로 이동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며, 도통 도해에게 홍이포를 이끌고 응원하도록 했습니다. 


오삼계나 왕보신도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없어, 4월에 1만여의 군사를 진주로 파견했습니다. 진주 내에 있던 반란군은 8,000명이었는데, 1만여 구원병이 오자 이들은 성밖으로 갑자기 뛰쳐 나가 관군을 동시에 요격했습니다. 


그런데 동액은 이 싸움에서 재빠른 지시로 군사를 나누어 응전함으로서, 이들을 모두 패퇴시켰습니다. 이 능력있는 모습을 보면 왜 동액이 그렇게 꾸물거리면서 싸움을 두려워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입니다. 동액은 이후로도 계속 꾸물대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본래 천성이 겁이 많거나 온화하여 벌어진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반란군의 기세는 갑자기 위축되었고, 여러 장수들이 항복했으며, 사천 등지에서 지원 온 병사들도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동액은 진주에 진입했고, 후퇴하는 적들을 추격했습니다. 왕보신이 평량에서 패잔병들을 모으고 있을때, 강희는 자신의 직감으로 지금이 반격의 적시임을 분명하게 파악했습니다. 그는 동액에게 지시했습니다.


 "적이 두려워할때, 각 로의 관군은 마땅히 승리의 여세를 몰아 평량을 공격하라."


강희의 지시에 따라 각 지역의 관군은 섬서와 감숙에서 전면적인 대반격을 벌였고, 마침내 승리의 전격전(電撃戰)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중 한족 출신의 섬서 제독 장용은 그야말로 눈부신 공을 세웠습니다. 조주, 하주 두 성을 공략한 뒤 공창(鞏昌)으로 진격하여 신속하게 포위에 성공한 것입니다. 


왕보신은 장용의 움직임에 크게 놀라 3,000여명의 구원병을 보내고, 성내에서도 사면의 문을 모두 열고 6,000명이나 되는 군세가 한꺼번에 튀어나와 협격했으나, 장용은 용맹무쌍하게 싸워 수많은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적군을 다시 성안으로 몰아버렸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동액은 즉시 원병을 보내어 기세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결국 공창도 함락되었습니다.


같은 시각, 서녕 총병관 왕진보는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난주를 압박하여 1개월간 포위하여 적을 항복시켜 난주를 수복했습니다. 진주, 난주, 공창, 연안 등지가 모두 평정됨에 따라 흩어졌던 관병도 구름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이제 평량만 공략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잘싸웠던 동액은 또다시 전투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났고, 또 왕보신이 사태의 불리함을 보고 투항의 기미를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자, 일부러 평량에 대한 포위도 어중간하며 하며 계속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왕보신은 동액의 이런 기미를 알아차리고 성을 나서서 공격을 하는 한편, 다른쪽으로는 대화를 통해 관군의 공격을 막았습니다. 강희는 계속해서 동액에게 말했습니다.


 "왕보신이 항복을 요청함은 모두 기만이다. 우리 군대의 공격을 늦추려는 계책일 뿐이다. 너희들은 급히 평량을 공격해야 한다."


 그런데 동액은 이런 소리만을 반복했습니다.


 "청컨대 비중 있는 대신을 보내 항복을 받도록 해 주십시오."


 강희는 답답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동액을 질책했습니다. 동액의 모습을 보면 분명히 능력이 없는것은 아닌데, 계속 머뭇거리면서 어중간한 모습만을 보이고 있으니 해임하기도, 그대로 두기도 답답한 노릇입니다. 실제로 왕보신은 앞으로는 관군과 담판하면서, 밖으로는 1만 부대를 보내 포위망을 뚫어버리고 각지에서 관군을 물리쳤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오삼계가 지원군을 보내어 관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평량의 군대와 화합하려 하자, 형세가 다시 이상하게 변해버리고 맙니다.


이 모두 왕보신의 세력을 일소하면 끝날 일입니다. 강희는 지독하게 말을 안듣는 동액을 몇번이나 질책해서 간신히 움직이게 했는데, 평량성 아래의 해자가 깊고 지형이 험해 공략이 쉽지 않았습니다. 동액은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는 식으로 진격하지 않고 성에서 3리 떨어진곳에 군영을 두었습니다. 이 사태가 무려 1년이나 이어지며 1676년 2월에까지 이르자, 강희는 하나의 결단을 내립니다.


재주와 지략이 뛰어난 인물, 대학사 도해를 초원 대장군으로 삼아, 섬서로 파견하여, 한족과 만주족 모든 부대를 통솔케하고, 패륵 동액 이하 모든 인물들이 도해의 지휘를 받게 한 것입니다. 





장사에서 오군과 청군이 격돌하고, 서북으로는 도해가 파견되었으며, 복건에서 경정충이 예상외로 강력한 관군의 반격에 놀라는 사이, 광동에서는 커다란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이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1674년 7월부터 1675년 동안 관군은 치열하게 경정충과 싸웠고,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에서는 평남왕 상가희도 관군 소속으로 참여했습니다. 상가희가 주로 전투를 치루는 곳은 광동 동쪽, 즉 경정충의 복건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지리적 상황때문에 변란이 계속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가희가 동쪽의 평정에 열심일 무렵, 갑자기 대만의 정경이 바다를 건너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들 반란군을 도와주는 바람에 상가희는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아직 세력이 강력하던 경정충은 군대를 동원하여 광동성의 여러곳을 점령함으로서, 광동과 강서(장시성)의 연결을 아예 단절시켜 버렸습니다.


또한 여기에 오삼계까지 군대를 파견하여 상가희를 협공하자, 상가희는 북경에 하루 빨리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강서와 광동의 연결이 모조리 끊어졌기에 관군은 상가희를 도우려 해도 도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울화통이 터진 고령의 상가희는 병세가 급속하게 악화되어 자리에 누워버렸으며, 졸지에 모든 권한이 상지신의 손에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상가희는 설마 아들이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겠지만, 후계문제로 불만이 극심했던 상지신은 들고 일어서며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을 반대한 김광을 살해하는 동시에, 오삼계와 협력하기로 약조하면서 상가희가 있는 왕부를 감시했습니다. 상가희는 노년에 이런 일을 당하자 너무나 부끄러웠고, 자식에 대한 원망이 극심했으나 실권은 이미 모두 빼앗겨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상가희는 조정에 충성을 맹세했고, 적극적으로 조정의 토벌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상지신이 이제 아비의 몸과 명예를 완전히 실추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늙은 평남왕은 나이가 너무 많고,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무력감 속에 그는 비통해하면서 자신이 죽어 결백을 알려야 한다고 말했고, 아픈 몸으로 일어나 죽을 힘을 다해 끈을 묶고 자진하려 했습니다. 수하들이 조기에 발견하여 이를 저지했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임종하게 된 상가희는 직전에 여러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황제의 큰 은혜를 입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러, 적을 살해할 수도 없으니 죽는다 해도 허물이 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가 하사한 관복을 주고 강희가 있는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혼백이 되어서라도 황제를 섬길 것이다!"


그 말을 마친 상가희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격동의 세월을 한 몸으로 지낸 일흔두살의 백전노장이 맞은 최후였던 것입니다. 훗날 아들 상지효가 상가희의 유골을 북경으로 운반하자, 강희는 이 장렬한 무장에 보답하기 위하여 내대신, 학사, 시위를 보내고 8,000냥을 사하했으며, 융숭한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비석을 세워 충성심을 기렸습니다.


상가희가 죽자 번부를 완전 장악한 상지신은, 우선 형제인 상지효는 고향으로 가서 쉬라고 권하여 치어버리고는, 대만의 정경과 협상을 하여 해안의 군사적 위협을 줄였습니다. 


하지만 강희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상지신은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기 보단 그저 더 많은 권세를 쫒는 기회주의자일 뿐이였습니다. 그는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그는 목적이 어디까지나 번부를 장악하여 상가희의 후계자가 되는것 뿐입니다. 애시당초 반청을 확고부동한 목표로 내세운 오삼계 등과는 목적이 달랐습니다. 


그가 오삼계에게 협력하고 있다고는 하나, 실제적으론 오군이 광동에 진입하는것을 저지하고 있었고, 오삼계의 병력지원 요청도 무시했습니다. 그저 아버지 상가희처럼 드러내 놓고 적대하고 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만약 삼번의 난이 그 이름과 같이 세 번이 전심전력으로 연합하여 북방으로 진격했다면, 건국 초기의 연약한 청나라 조정은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번의 난' 의 실체는 오삼계의 반란일 뿐이고, 나머지 세력들은 오삼계와 청 조정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는 기회주의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삼번은 자기들끼리도 반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삼계는 이를 원망할 처지는 못 될 것입니다. 스스로 영력제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는, 이제와서 반청을 내세우는 그의 명분이야 말로 실로 기회주의자의 그것이였기 때문입니다. 1676년을 지나며 이 중국 전역을 휘몰아치는 전란의 광풍은, 조금씩 무게의 추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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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20 23:51
수정 아이콘
오늘은 하루 쉬시나 했는데 오셨군요!!! 흐흐

선추천 후감상입니다 크크크
13/06/20 23:52
수정 아이콘
동액은 뭔가 생명존중사상 같은걸 지닌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희생을 막아보자...뭐 이런
테페리안
13/06/21 00:27
수정 아이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신불해님 글을 봐야 하루가 비로소 끝나는 느낌이에요 흐흐흐
Liberalist
13/06/21 00:35
수정 아이콘
이 글을 읽고 나니까 뜬금없이 오삼계가 영력제를 어딘가로 꿍쳐놨다가 나중에 이용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영력제를 살려놓은 다음에 명 황조를 되살리겠다 운운했으면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가 거셌던 난의 폭발력이 상상을 초월했을 것 같은데요.

뭐, 역사엔 IF가 없고, 오삼계도 당시에는 설마 자신이 강희제와 맞서 싸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영력제를 죽였겠지만요.
안동섭
13/06/21 10:34
수정 아이콘
카이저소제!
13/06/21 01:02
수정 아이콘
동액 진짜 답답하네요.
왕보신한테 엄청 쫄았거나 큰 은혜를 진적이있나..
아키아빠윌셔
13/06/21 01:37
수정 아이콘
이번 편의 주인공은 동액이군요(...)
Je ne sais quoi
13/06/21 07:57
수정 아이콘
신기한 인물이네요. 능력이 있는데 겁을 내다니. 자신을 믿지 못하는 성격인가요. 잘 읽었습니다.
설탕가루인형형
13/06/21 09:19
수정 아이콘
근데 오늘은 뭔가 오타가 좀 많은것 같아요~
지하생활자
13/06/21 19:02
수정 아이콘
다음편 기다려지는군요!
13/06/22 08:06
수정 아이콘
효종이 살아있어 북벌의 기치를 높여 정예 10만을 양성하여 이시기를 놀렸다면 과연 청에 대한 복수를 할수 있었을까요? 아니 산해관은 통과할수 있었으려나요? ... 대체역사소설들은 대게 산해관을 쉽게 통과하던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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