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대의 운명은 오삼계라는 한명의 청년 장교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습니다. 산해관의 군단만으로 독자적인 행보는 불가능하겠지만, 그가 어느쪽을 향해 걸어가느냐에 따라 이자성, 그리고 청나라의 명운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자성의 대순(大順) 왕조가 북경을 점령 한 후 직후, 각지에서 항복을 청하는 문서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자성은 그 모든 항복 문서들보다 단 하나의 서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삼계의 항복 문서는 도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자성은 오삼계가 필요했습니다. 그가 있어야만이 저 만주의 오랑캐들을 막아 세울 수 있는 일이고, 만일 오삼계가 산해관을 중원 천하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말 것입니다.
절실함으로 말하자면 청나라는 더 했습니다. 만주 왕조는 내부적 기근과 혼란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만일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준다면 이 모든것은 삽시간에 해결되고 만주 왕조는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삼계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명나라 왕조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지, 혹은 다른 계산 때문인지. 그의 군단은 가만히 상태를 지켜보고만 있었을 뿐입니다. 홍승주가 대패를 당하고 산해관 외곽의 모든 성들이 점령을 당했던 1641년의 전투. 그 전투에서는 29살의 청년 오삼계도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대패의 와중에 간신히 사로잡힘을 피해 빠져나온 오삼계는, 숭정제가 사망한 33살까지 오삼계는 자신의 평생을 북방에서 만주족과 싸우는 일에 바치고 있었습니다.
오삼계의 형 오삼봉, 외삼촌 조대수 등 이미 청나라에 항복한 여러 인물들이 오삼계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 젊은 청년 장군은 고작 5만 남짓한 병력으로 기개를 잃지 않은채 만주족들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이후 오삼계의 행보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 오삼계에게, 이번에는 이자성의 접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접근은 형이나 외삼촌의 접근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이자성의 군단에게 포로로 잡힌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吳襄)은 아들에게 하나의 권고장을 보냈습니다. 대세가 결정되었으니, 형세에 따라르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삼계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충성심을 이야기 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음덕을 입어 출정했습니다. 적 이자성도 곧 박멸될 것이라 여겼습니다……그러나 나라에 사람이 없어 바람을 맞아 쓰러지고, 소문을 듣자하니 주군도 돌아가셨다 합니다."
"눈가가 찢어지는듯 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여겼던 것은, 아버님께서 망치를 휘둘러 일격을 가하셔서 맹세코 적과 생을 하지 않으시고, 그렇지 않으면 곧 목을 쳐서 국나에 순사하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 목숨을 훔치시고 가르치시기를 의가 아닌 것으로 하십니까!"
"아버님은 이미 충신이 아니십니다. 그러한데 어찌 소자가 효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소자는 아버님과 갈라서겠습니다. 어서 적을 도모하지 않으신다면, 적이 아버님을 가마솥과 도마 곁에 놓고 소자에게 회유를 한다 할지라도 돌아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애첩입니다. 오삼계가 사랑하는 애첩 진원(陳沅)은, 이자성의 부하 중에서도 무례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는 유종민이 손아귀에 떨어저 버렸습니다. 청나라 초기의 시인 오위업(吳偉業)은 원원곡(圓圓曲)에서, 이때 오삼계의 모습을 묘사하며 머리털이 관(冠)을 찔러 격노한 것은 홍안(紅顔 : 미녀)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격노' 라는 두 글자에는 사랑하는 여인의 무뢰한에게 유린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33살의 장부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산해관을 지키고 있는 청년 장군의 뜻은 명확해졌습니다. 그러자 이자성은 오양을 비롯한 오삼계의 일족을 모조리 도륙하고. 스스로 10여만이 넘는 대병력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습니다. 오삼계는 남은 군단을 모두 산해관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에게는 지원군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산해관 남쪽의 중원 천하는 이미 이자성의 손아귀에 떨어진 상태입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세력은 오직 북쪽에 있을 따름입니다.
5월 20일, 청나라의 실권자 도르곤은 숭정제의 사망 ─ 곧 제국의 몰락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토록 기다리던 서한이 도착했습니다. 오삼계의 서한이었습니다.
─ 뜻밖에도 도적의 무리가 하늘을 거스르고 궁궐을 범했다. 그 좀도둑, 오합지졸들이 어찌 능히 일을 이루겠는가. 그러나 어찌하랴, 북경의 인심이 굳지 않고 간사한 자들이 문을 열어 적을 들여서, 선제는 불행(죽음) 했고, 구묘(九廟)는 재가 되었다. 지금 적은 존호를 참칭(僭稱)하고 부녀자와 재물을 노략하며, 죄악이 이미 극에 달했다. 참으로 적미(赤眉), 녹림(綠林), 황소(黃巢), 녹산(祿山)과 같은 무리다. 천인공노, 민심은 이미 떠나갔다. 그 패망을 서서 기다리면 될 것이다. 삼계는 명의 후은(厚恩)을 받았기에, 그 백성이 난에 화를 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변방의 문을 막아 지키고, 군대를 일으켜 민심을 위로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경동(京東)의 땅은 작아 병력이 아직 모이지 않았다. 특히 피눈물로 도움을 청한다. 우리나라와 귀조(歸朝)는 좋은 관계에 있기를 200여년, 지금 까닭없이 난을 만났다. 귀조는 이를 측은히 여기라! 또한 난신적자(亂臣賊子)는 귀조 역시 마땅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힘을 합쳐 도성의 문에 도달하여 도적을 궁궐에서 멸하고, 대의를 중국에 보이면, 곧 우리나라가 귀조에게 보답하는것이 어찌 제물에만 그치겠는가. 무릇 열토로 보답하겠다. 이는 결코 허언이 아니다.
그 문장은 중후했지만, 내용은 군사를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모르긴 모르되 도르곤은 만세를 부르고 싶었을 기분이었겠지만, 차분함을 유지하며 범문정, 홍승주와 논의하고 몸이 바싹 달아있는 청년 장군에게 답신을 보냈습니다. 그 답신은 오삼계의 충성심을 칭찬하고 있었지만, 실제 본론은 다음의 구절에 있었습니다.
─ 지금, 그대가 만약 무리를 이끌고 귀순하면, 반드시 고향 땅에 봉하고 번왕으로 삼을 것이다. 하나는 곧 나라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는 곧 몸과 집안을 보존하여 세세 자손 오래도록 부귀를 누리기가 산하처럼 오래일 것이다.
처음 오삼계의 서한이 보였던 늬앙스를 묘하게 바꿔버린 것입니다. 도르곤은 오삼계의 직접적인 투항을 요구했습니다.
오삼계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아직 서한이 도착하기전인 5월 5일, 그는 이자성의 대군을 상대로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5일이 지난 10일 날에 또다른 공격을 저지해내었습니다. 최후의 명나라군은 분투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닥쳐올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도르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오삼계가 피가 튀기는 혈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도르곤은 만주족의 운명을 가를 이 전투에 직접 주력 부대를 이끌고 출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또한 양익 사령관으로 영친왕 아지게(阿濟格), 예친왕 도도(多鐸)를 사령관으로 삼았는데 이들은 모두 어머니가 도르곤과 같은 형제였습니다. 도르곤은 작금의 때를 만주 왕조의 기회로 삼는 동시에, 스스로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23일, 청나라군은 안에서 열려진 산해관을 마침내 통과했습니다. 태조 누르하치의 시대로부터 30여년이 이르는 장구한 시간동안 기리던 소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도르곤은 오삼계를 만나, 그의 군대가 모두 변발 할 것을 요구 했습니다. 이제 오삼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산해관의 군단은 스스로 머리를 잘랐습니다. 도르곤이 오삼계와 대면한 바로 그날, 최후의 명나라군은 이자성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청군은 상황을 지켜보며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르곤은 아지게, 도도, 홍승주, 조대수, 공유덕, 상가희 등과 함께 말 위에서 양군의 혈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양패구상 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고, 싸움을 결정짓기에도 나중에 끼어드는 편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자성의 군대는 이미 엄청난 대규모가 되었습니다. 그 숫자는 20여만에 이르렀으며, 산에서 해안에 이르기까지 늘어서 세상을 뒤엎는 기세였습니다. 오삼계의 5만 정예 부대는 4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이틀동안 놀라운 분투에 분투를 거듭했지만, 칼은 이가 빠지고 화살을 당길 힘도 사라졌습니다. 한계에 달한 것입니다. 오삼계의 운명이 결정된 것처럼 여겨졌을떄, 갑자기 어마어마한 모랫 폭풍이 불어닥쳤습니다. 그때의 바람 소리는 천둥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그 천둥의 바람이 거치는 순간,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이자성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정체불명의 기마군단이 노도와 같이 진격해오고 있었습니다. 만마(萬馬)가 튀어올랐다. 라고 기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기마대는 격전으로 지친 이자성의 군대를 눈깜짝할 사이에 도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병사들의 머리는 모두 변발이었습니다. 이자성은 드디어 사태를 깨달았습니다. 이 당시 상황을 기록할수 있는 주체는 결국 만주족 뿐인데, 만주족의 기록에서는 이자성이 만주족이 나타났다며 고함을 지르고, 가장 먼저 도망쳤다고 합니다.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한번 기세를 잃은 도적군단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했으며, 반대로 만주족 부대는 기세를 타고 배 이상의 힘을 내고 있었습니다. 오삼계 역시 보병과 기병 2만명으로 이자성을 추격하고, 달려갔습니다. 선제의 복수를 하고, 연인을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자성은 산해관에서 북경까지 내달리듯 도망쳤습니다. 최후의 발작인듯, 그는 즉위식을 치루고 스스로 황제라 일컫었습니다. 그 즉위식는 조악하기가 이를데 없었으며, 여러 대신들도 도망치거나 살해되었습니다. 이자성은 황제가 되어 하룻밤을 보내고 즉시 도망쳤습니다. 자금성의 수많은 보물들은 '가져가기 힘들다' 는 이유로 모두 녹여져서 금괴 등으로 변해 실려갔습니다.
위대한 역사의 도시, 북경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방에서 약탈하는 자들이 넘쳐났고, 미처 이자성의 뒤를 따르지 못한 추종자들은 군중들에게 사로잡혀 죽었습니다. 반란군에 부역했던 자들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혼돈의 소용돌이에서 들려오는 정보도 불분뭉했는데, 일부는 오삼계가 이자성을 물리치고 황제의 아들을 앞세워 귀환하고 있다고 떠들어대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이자성이 떠난 바로 다음날, 일단의 군대가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도르곤이었습니다. 도르곤은 조양문으로 입성했으며, 살아남은 명나라 관리들은 성밖 2킬로미터 까지 나가 그를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이 만주족의 지배자를 환영했습니다. 도르곤은 약탈을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는 이제 이곳이야말로 청 제국의 수도가 될 곳이기 때문입니다. 명나라 관리들은 옛 직에 복귀할 것을 명 받았지만, 관청의 인자에는 만주문자가 새겨졌고 사방에 삭발을 강요하는 사자들이 움직였습니다. 도르곤은 또한 청나라에 투항하여 순종하는 자는 용서를 받지만, 거부하는 자에 대해서는 단호히 조치를 취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만일 항거하여 따르지 않는 이 있다면, 대병이 단번에 가서 옥석(玉石 : 선인과 악인)을 함께 태우고, 모두 도륙해 버릴 것이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입니다. 그리고 그 가장 주요한 대상은 물론 이자성입니다.
이자성은 우선 섬서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청군과 오삼계의 추격은 매우 집요했으며, 특히나 홍이포의 위력에 이자성의 군단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도도, 공유덕, 아지게, 상가희 등도 모두 나서 이자성 군을 협공 했으며. 한번 기세를 잃은 이자성은 계속해서 도망치고, 또 도망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지게는 이자성의 군단과 13번을 싸워 13번을 이겼고, 결국 버티지 못한 이자성은 혼자 목을 매고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성무기'에 따르면 이자성의 시신이라는것은 얼굴이 가래에 맞아 죽었다고 했기에, 얼굴이 뭉개져 이자성인지, 혹은 체격이 닮은 사람인지 확증할 수 없어, 사실 이자성은 민간에서 숨어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북방이 살육과 혼돈에 놓여질 무렵, 강남은 아직 그 참화가 닿지 않았습니다. 남경은 본래 명나라의 수도였고 위대한 태조 주원장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천하를 차지했습니다. 영락제 시절에 제국의 수도는 북경이 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남경은 대단히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고 토목보의 변때는 남경으로 천도하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남경에는 형식적이나마 작은 정부가 있었고, 이제 북경이 함락된 이상 남경이 명나라 잔존 세력의 가장 중요한 요지였습니다. 명나라의 멸망과 숭정제의 자살, 이자성의 패망과 오삼계와 청의 연합 등 천하의 사태는 너무나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남경에 도착하는 장계들은 제때 도착하지도 않았고, 순서가 뒤바뀌어지는 일도 흔해서 이로 인한 혼란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자성이 수도를 장악하고, 명 황제가 죽고 새 황제가 즉위했다고 하는데, 새로 즉위한 황제가 이자성인가? 명 황실의 계승자인가? 그도 아니면 오삼계인가?
그렇다면 오삼계는 누구 편인가? 오삼계와 새로 동맹을 맺었다는 '본 적 없는'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어린 만주족 황제를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섭정왕 도르곤, 그자는 또 대체 어떤 인물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실의 조각들은 하나둘씩 맞추어지기 시작합니다. 현실을 바라볼수 있게 되자, 남경은 곧바로 전시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전겸익(錢謙益) 등의 인물들이 남경 조정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도 새 황제를 즉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황족을 찾는 일은 대수로울게 아닙니다. 명 제국 전체에 주원장의 후손은 8만명여명이 있었고, 남경 지역만 해도 존경받을만한 황족들이 여러명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숭정제와 가까운 혈족의 황족을 즉위시켜야만 하는 일입니다. 곧 조건에 어울리는 두명의 후보가 제시되었습니다.
복왕(福王) 주유승(朱由崧). 그는 이자성에게 살해당한 만력제의 손자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살해당했을때 알몸으로 도망쳐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노왕(潞王) 주상방(朱常淓). 그는 융경제의 손자였습니다. 황통으로 따지자면 복왕이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복왕은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고, 전겸익등은 복왕에게 "일곱 가지의 옳지 않음(七不可)"가 있다고 하여 반대했습니다. "복왕은 탐욕, 음란, 주란(酒亂 : 술주정),불효, 학하(虐下 : 아랫사람을 학대), 부독서(不讀書), 관리에 간섭하는 악덕이 있소이다. 이는 옳지 않은 일이오." 반면에 노왕은 말끔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두사람을 두고 남경의 정부는 당쟁을 벌였습니다. 이는 동림당과 환관당의 대결이었습니다. 환관당이라고 하지만 실제 환관들이 당파를 이룬것은 아닙니다. 과거 조정을 좌지우지 했던 위충현등의 환관에게 빌붙어 승진하려 하다가 숭정제의 즉위로 일이 실패하여 남경으로 쫒겨난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고, 처음에 복왕의 즉위를 반대하던 남경의 병부상서 사가법(史可法)은 결국 위급한 시기에 국론이 분열되는것을 막기 위해서 복왕의 즉위에 찬성했습니다. 사가법은 남경의 병부상서로 숭정제를 도우러 갔다가 일이 이미 늦어버리자 돌아왔던 인물입니다. 환관당의 마사영(馬士英)이 봉양 총독을 겸해 군대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던것도 복왕이 즉위한 원인이었습니다.
사가법
이리하여 복왕은 남명 정권의 황제로 즉위, 홍광제(弘光帝)가 되었습니다.
강남의 경제력은 중국의 중심 입니다. 만일 남명 정권이 청군의 공세만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과거 남송과 금나라같은 상황을 기대해볼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홍광제는 기대 이상으로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직계 황족으로서 일체의 근로가 금지된 그는 거처에서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오로지 주지육림에만 빠져 지내왔던 것입니다. 청군이 언제 남쪽으로 말을 향할지 모를 위급한 시기, 홍광제가 처음으로 행한 조치는 놀랍게도 '숙녀 고르기' 였습니다. 홍광제는 항주 출신의 여자가 좋다고 고집하였고, 남명 조정에서는 결혼 적령기 여성을 찾아 민간의 혼인을 금지하여 여자를 선발했습니다. 강남의 민심이 진동한건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이 채홍사(採紅使)들은 여러 도성들은 물론 먼 지방의 유곽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녔고, 홍광제가 처녀들과 과연 무엇을 하고 노는지 알 도리야 없지만 홍광제의 침소에서 하룻밤에 2명의 꽃따운 소녀가 죽어 나가기까지 했습니다. 남명 정부는 어찌되었건 많은 귀족과 장수들을 새로 임명했습니다. 재정 조달이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남명 조정은 관직을 마구 팔았고, 60여개가 넘는 작위를 지방의 유력한 재력가에게 내리고는 충성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인물 중에 남중국해의 해적이자, 중국과 대만, 일본과 필리핀에 이르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대세력 정지룡도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그에게 남안백(南安伯)의 작위를 내리고 남경 방어를 지원할것을 부탁했습니다. 해적 정지룡의 입장에서 이것은 자신의 위상을 높일 기회였습니다. 정지룡은 곧바로 동생 정지봉이 이끄는 병력을 파견하였습니다. 정지봉은 정지룡의 형제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사나이로, 그는 장강 유역의 한 거점에 주둔했습니다. 정지봉 외에 다른 남명의 부대 중 한쪽은 사가법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남명 정부의 무능한 모습에 진저리가 나서 적과 대치하는 변경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 외에는 고걸(高杰)이라는 다른 인물은 본래 이자성 반란군의 일파였습니다. 그는 이자성의 부인인 형(刑) 씨를 건드려 명나라 조정에 투항해 온 인물입니다. 조정의 군대와 해적 출신, 그리고 이자성의 반란군 출신까지. 출신 성분이 전혀 다른 남명의 장수들은 서로 으르렁거렸고, 이를 진정시켜야 할 홍광제가 한심한 행보를 계속하는동안, 청나라는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도르곤
천하의 도르곤 조차 당초에는 과연 강남 지방 원정이 가능할까 의심스러웠던 모양으로, 그는 먼저 남명 정권과 서신을 교환했습니다. 그러나 남명 정권은 상상 이상으로 부패와 무능을 가지고 있었고, 도르곤은 움직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청은 명나라를 위해 숭정제의 원수를 잡고 간적 이자성의 뒤를 쫒고 있는데, 과연 남명의 정부라는것은 병사를 한명도 내지 않다니 이는 어찌된 일인가? 복왕 주유숭이라는 자가 즉위했다고 들었는데 선제의 유조가 과연 있었는가? 도르곤은 이렇게 명분을 들이밀었습니다. 자살한 숭정제는 자신과 무능한 대신들에 대한 책망, 백성들의 원망에 관한 이야기만 적었지 후계자에 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만일 기록이 남아있었다손 쳐도 청나라에서 조작을 해서 지워버렸을 것입니다. 여하간에 유조가 없으니 '명을 공식적으로 이어 받은 청'은 남명 정부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리하여 청나라 남벌군이 조직되었습니다. 정국대장군(定國大將軍) 도도의 군대가 남하를 시작했고, 이에 맞서 남명 정부는 강북에 4개의 진을 치고 회북(淮北)에 유택청, 사수(泗水)에 고걸, 임회(臨淮)에 유랑좌, 여주(廬州)에 황득공(黃得功) 등 네 총병을 주둔시켜 대응 했습니다. 그러나 이 총병들은 서로 엄청난 분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사가법은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황득공을 의진(儀眞)으로 옮기려도 시도했지만, 고걸이 복병을 배치하여 300명의 병사를 살해했습니다. 황득공은 대노하여 고걸과 사투를 벌이겠다고 소리쳤고, 사가법이 이를 간신히 무마시켰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남명 군대의 사정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남 총병인 허정국(許定國)은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 청나라 쪽에 투항한 상황이었습니다. 허정국은 고걸을 연회에 초청하여 간단하게 대취하게 만들고는 제거하여 청나라에 바칠 선물로 삼았습니다. 남명 군대의 상황이 이런 모습이니, 청나라 남정군의 상대가 될리가 만무했습니다. 청사고 순치 2년 3월 기록에서는, ─ 지나는 곳마다 나와서 항복하여, 하남 땅 모두를 평정했다. 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주족이 그들이 지나가는 동안 저항은 미미했습니다. 만주족 본대는 교활하게도 최전방에 투항자들로 조직된 부대를 배치하여 숫자적으로 소수이자 이 이상 줄어들면 중국 통치에 문제가 생길 만주족이 직접적인 위험에 처하는것을 막게 했고, 여러 한족들을 투항시키고 변발을 시켜 자신들의 병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만주족의 목표는 북경에서 시작된 대운하가 양자강의 지류와 맞나는 지점인 양주에 이르렀습니다. 양주에 이르는 두 갈래 주요 길목은 모두 함락된 상태로, 그곳의 명나라 장수들은 만주족에게 투항하여 변발을 하고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도성들과는 달리 양주는 항복할 의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44세의 사가법, 그는 명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장수였는데, 홍광제를 수차례 군사 문제로 수위 높게 비판할 정도로 꼿꼿한 무인이었습니다. 도르곤은 이 기골 있는 인물에게 그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명 왕조' 가 아니라 '부패하고 무능한 군주' 일 뿐이라고 환기시켰고, 어떻게든 그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습니다. 꿈쩍도 하지 않은 사가법이지만, 만주족 부대보다도 괴로운것은 그들이 말한 '무능한 군주'라는 이야기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무능한 군주 밑에는 무능한 인물들이 모이기 마련이라, 고걸이 죽은 뒤 허공에 뜬 고걸 휘하 10만의 부대는 당초에 사가법의 지휘 아래 있기로 되어있었지만 사가법을 시기한 마사영이 ─ 聖武記에 따르면 ─ 헛소문을 퍼뜨려 여러 곳으로 흩어져 버리는 바람에 사가법의 휘하로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청나라 군대. 나라가 곧 망할지도 모르는데, 오직 경쟁자를 시기하는 일에만 열중하는 정부. 남명 정부의 종말은 바야흐로 목전 앞까지 다가왔고, 이 양주에서 청나라 군대가 중원에서 행한 만행 중에 가장 잔혹하고 비참한 대학살이 벌어지게 됩니다.
도르곤의 동생, 도도는 군사를 이끌고 양주에 하고는, 한발 앞서 만주족에게 투항한 명나라 장수 이우춘(李遇春)을 보내 사가법의 투항을 권유했습니다. "황제는 장군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만주족과 힘을 합쳐 이름을 구하고, 공훈을 세우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도는 친필로 설득을 해보는 해 사가법을 달래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오히려 사가법은 부하들을 시켜 양주 성곽을 따라 나무 받침대를 설치한 뒤, 그 위에 대포를 배치했습니다. 북경에 있을 시절, 그는 아담 샬을 기용하여 화포를 제조하자는 계획에 찬성했던 인물로 화포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때, 명나라의 총병 유조기(劉肇基)는 계책을 하나 내었습니다.
"성 안은 지세가 높고 성 밖은 지세가 낮습니다. 회하의 둑을 터뜨려 적군 진지에 물을 몰아 넣는다면 저들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듯한 소리지만 사가법은 거절했습니다. "백성을 귀히 여겨야 하오. 사직은 그 다음이라오." 청군은 물에 휩쓸리겠지만, 회양 백성들도 대량으로 익사하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직이 백성 다음이라는것은 맹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가법의 대포는 과연 효과가 있어 청군은 예상 이상으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상자가 수천 단위에 이르자 군대를 이끌던 도도도 격분하기 시작습니다. 7일간 전투가 이어지자, 결국 양주성도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습니다. 청군은 시체를 밞고 올라가 성내에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성 수비대 병사들은 투구를 벗어던지고 창을 내팽개친 ,채 성벽 아래 가옥으로 뛰어내려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소음에 놀라서 집 밖으로 뛰쳐 나온 주민들이 도망치는 수비대 병사들을 목격하면서, 거리는 순식간에 피난민으로 넘쳐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달아날 곳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도성 남문을 열어놓았으나, 그 최후의 탈출로 마저 만주족에 의하여 차단되기에 이르고 맙니다. 사가법은 성문을 연 자를 처단하라고 하였지만 명령을 시행할 부하는 이미 없었습니다. 유조기 등도 전사했고, 만주족은 마침내 도성을 점령하였습니다. 도도는 끌려온 사가법 앞에서 그의 충성심이 자신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요란을 떨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항전은 참으로 놀라웠소. 이제 그대가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하였으니, 내 그대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는 것이 기쁠 따름이오" 하지만 사가법은 거부 의사를 단호하게 밝혔습니다. 그는 답했습니다. "죽음 이외에 더 바랄 것은 없소이다." 며칠동안 사가법을 회유하던 도도는 시간이 지나서 약이 올라 사가법을 참수했습니다. 그리고, 사가법에 대한 처우와는 별개로 양주을 공략하는데 든 상상 이상의 시간과 인적 손실에 대해 격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휘하 군사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격전을 치루며 약이 오를데로 오른 야수같은 병사들이 성안으로 진입하였고, 이때가 4월 25일이었습니다. 악몽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뒤에 벌어진 일에 관해서, 성무기에서는 "우리 병(청병)이 머물기를 10일, 그리고 이를 도(屠) 했다." 하여 그저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10일 동안 청나라 병사들은 야만의 극치를 달리며 수없이 많은 주민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빼앗고, 망가뜨렸습니다. 남자들은 학살당하고 부녀자들은 겁탈당했으며, 이전까지 만주족이 북쪽의 항복한 도성에서 보인 자비심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건물들은 불에 타올랐습니다. 사방에 올라온 불꽃은 폭우가 내리면서 가까스로 진정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처참하게 도륙당한 양주 백성들의 숫자만 무려 80만명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삼국시대 촉나라 인구 전체에 가까운 인구가 살육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항이 심했다? 그리하여 아군의 피해가 커졌다? 사가법의 대포로 인해 청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허나 어떤 이유로도 80만명을 대학살하는데 적법한 이유가 되진 못합니다. 이 지옥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왕수초(王秀楚)라는 사람은 은밀하게 이때의 모습을 적어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를 만들었습니다. 문자의 옥 등의 탄압이 심하던 청나라 시대에는 당연히 이 책은 금서로 분류되어 지하 출판물로 몰래 나오거나 불에 태워져 일반인은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주십일기는 역으로 일본에 전해졌고, 메이지 시대 청나라 유학생들은 이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침 반청에 대한 열망이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갔을때, 이러한 책은 그들의 가슴을 격동시켰고 결국 반청혁명이 일어나 청은 패망하게 됩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대문호 루쉰은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또한 (유학생의) 일부 중에는 명나라 말기 유민의 저작이나 만인(蠻人)의 잔학 기록을 모으는데 전심(全心)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도쿄와 그 밖의 도서관에 들어앉아 글을 베껴 와서는 인쇄하여 중국에 들여와, 잊혀진 옛 원한을 부활시켜 혁명 성공에 일조하려 했다. 이렇게 해서 양주십일기, 가정도성기략(嘉定都城紀略), 주순수집(朱舜水集), 장창수집(張蒼水集) 등이 번역, 인쇄 되었다. 사가법은 백성들이 상할까봐 수공(水攻)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수많은 백성이 그의 투항 거부 때문에 도륙당했습니다. 만주군의 잔학함이 상상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남정군의 이와 같은 만행은 본보기 목적도 있었으나, 어떤 이유건 간에 양주에서 벌어진 10일은 저항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자들에게 벌어진 비열한 폭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양주를 문자 그대로 쓸어버린 청군은 거칠 것 없이 대운하를 따라 양자강으로 진격했습니다. 전겸익은 홍광제에게 남경보다 남쪽으로 피신할 시기가 되었다고 조언했지만, 간단히 무시되었습니다. 남명군의 다음 후방 기지는 진강(鎭江)이었습니다. 진강은 양자강 남안의 중무장한 도성으로 남경 동쪽 인근에 위치에 있습니다. 양주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맞은편의 장대한 양자강과 만나는 곳으로, 필연적으로 진강은 만주족의 다음 공격 목표가 될 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지키는 인물은 홍광제로부터 관작을 하사받은 인물인 정지봉, 정지룡의 동생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정채와 같이 말입니다. 부대는 참호를 파고, 남중국해의 유럽 세력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화기를 배치하여 청군을 맞을 채비를 했습니다. 정지봉은 고걸이 죽은 뒤 혼란에 빠져 도적군대로 돌아간 과거의 남명군대와 교전하여 1만여명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승리는 근본적으로 아무 의미없는 승리였습니다. 패잔병들은 변발을 하고 만주족에게 투항하여 그들의 충실한 새 부하가 되었던 것입니다. 도도의 군대는 투항한 한족들의 가담으로 더욱더 수가 불어 양자강 북안에 이루어고는 정지봉의 군대와 대치했습니다. 몇일간의 대치가 벌어지고 난 후, 어느날 밤에 청군 진영에서 뗏목들 위에 등불을 놓아 반대편으로 보내게 됩니다. 정지봉은 그 땟목들이 적군이라고 판단하여 소총과 대포를 발사하게 했는데, 실상 청군의 주력은 어둠 속에서 상류쪽으로 지나가 도강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속은것을 판단한 정지봉은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퇴각했습니다.
이 퇴각은 자기 전력을 이런 싸움에 소모시키기 싫은 정지룡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 남명 조정에서도 정지봉이 당초부터 오래 지키고 있을 생각이 없지 않았느냐고 수근거리는 판이었습니다. 정지봉을 제외한 나머지 정씨 집안들은 이미 그들의 본거지인 복건으로 철수한 뒤였습니다. 즉, 정지봉이 진강을 떠난것은 이제 정지룡의 군대가 남경 방어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청의 도강 소식이 전해졌을때, 홍광제는 연회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원(왕실 가무단)에는 예술이 능한 자가 없단 말이다. 어떻게든 찾아내서 데려오고 싶다." 이는 제정신인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홍광제는 술에 취한채로 말에 걸터앉아 달아났습니다. 전겸익은 이제 상황이 다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의 젊은 부인이자 애첩이며 시인이었던 유여시(柳如是)는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전겸익이 존경받는 유가인 만큼 자살할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전겸익은 자살을 할 생각이었지만, 물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이 차가울 것 같다." 그리고 만주족에 항복하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유여시는 정색하면서 '이게 옳은 것인가'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전겸익은 한평생 곧은 유학자로 명성을 쌓으며 권신들을 비판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면서, 이때는 무엇인가 홀린듯이 만주족에게 항복하는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홍광제에 대한 진저리가 그 탓인지도 모릅니다. 홍광제가 그토록 형편없기에, 수십년 후의 만주족은 더욱 편하게 자신들을 명의 후계자로 자처할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형편없는 인물이 어찌 중화제국의 주인이 될 법하겠느냐면서 명사(明史)의 마무리를 지으면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전겸익은 양주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침략군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면서 항복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마침내 도도의 군대는 폭우를 뚫고 성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별다른 문제없이 인수인계가 이루어졌고, 도도는 문제의 가짜 황태자 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의견을 내었습니다. "진위 여부는 지금 파악할 순 없다. 북경으로 돌아가야 모든것이 밝혀질 것이다." 남경의 한 구역은 만주족의 거주지로 정해지고, 한족 주민들은 쫒겨나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격리시킨것은 막대한 희생을 치른 양주의 전례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남경은 비교적 평화롭게 만주족의 수중으로 돌아갔습니다. 전겸익은 변절자가 되었지만, 수만의 목숨을 살릴 수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쯤엔 도망친 홍광제도 붙들려 남경으로 압송된 후였습니다. 백성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졌으며, 이 몰락한 군주는 비참한 꼴로 도도에게 끌려갔습니다. 도도는 홍광제가 이 자리에 도착하자 그를 자리에 앉히고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홍광제가 그 자신의 주장대로 중화제국의 진정한 황제라면, 왜 이자성의 잔당을 청나라 군사들이 뒤쫒아 소탕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홍광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을 몰랐지만 도도는 그를 더욱 몰아부쳤습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떠했기에 청군이 진군해 오자마자 황제가 남경에서 비겁하게 도주했는가?"
"진정 홍광제가 천명을 받은 황제라면, 마땅히 두려울 것이 없는것이 아닌가?" 마침내 도도는 홍광제가 무능력한 겁쟁이 주제에 황위를 찬탈했다고 비난하며 추궁을 마무리하고는,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만주족은 본래 남경까지 내려올 계획은 없었지만 저항이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족들이 기꺼이 투항해 왔기 때문에 계속 남진 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홍광제가 양자강 북쪽에 군대를 주둔시켜 막았다면, 만주족은 수많은 한족 투항자들을 확보를 못했을테고 지금같은 사단이 일어나기 전에 격퇴할 수 있지 않았겠나는 소리입니다. 홍광제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도도는 지루해져서 그를 끌고 가라고 명령했고, 만주족은 다른 정보를 얻기 위해 홍광제를 강도 높게 심문한 다음 처형해버렸습니다.
실제 청나라 초중기에 변발을 이런식으로 하면 죽습니다. 머리가 시작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밀어야 합니다. 저런 식의 스타일도 용납이 되었던것은 최소한 청 중기 이후, 말기쯤은 되서야 가능했던 일입니다. 남경 점령후에 청군은 변발을 강제적인 조치로 변경했습니다. 맨 처음 청군이 산해관 안으로 진입할때는 변발을 강제의사로 하다가, 남정군을 조직할때 무렵에는 자유의사로 변경되었습니다. 청군이 그토록 많은 한족 투항자를 얻을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는데, 남경이 함락되자 다시 강제 조치로 변경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반청 감정이 한번 더 꿈틀거리게 됩니다. 한편, 그런 반청 감정도 구심점이 있어야 득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강남 전체를 아우를 수 있었던 위치의 홍광제는 절호의 기회를 바보짓만 하다 끝내어 처형당했고, 홍광제와 제위를 다투던 노왕 주상방은 홍광제 몰락 후 자신을 옹립하려는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청에 항복했습니다.
"대사는 다 끝났소." 라는것이 그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를 따라 청에 항복한 사람들도 있었고, 따르지 않고 자결한 인물도 있었습니다. 장국유 등은 노왕(魯王) 주이해(朱以海)를 옹립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웠고 이들은 항주를 취하려고 했지만 청나라 총독 장존인(張存仁)에게 패배하여 퇴각했습니다. 노왕 정권 이외에도 망명 정권은 계속해서 생겨났는데,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이 바로 그 인물이었습니다. 주율건은 해적 정지룡과 함께 세력을 만들었고, 이후 융무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정지룡의 배신(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으로 실패했고, 그 세력 역시 무너졌습니다.
융무제의 동생은 광저우(廣州)까지 달아나 제위에 올랐고, 이 사람이 소무제(紹武帝) 입니다. 그런데 소무제가 등극하고 난 뒤 몇일 뒤,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광저우 부근에서 만력제의 손자이자 22살이었던 영력제(永曆帝)가 즉위했습니다. 융무제는 짦긴 했지만 명 왕조의 적통을 이어받았고, 영력제는 북경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가장 가까운 혈통 중 한명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둘 다 정통성이 있다보니 어느쪽이 적법한지 혼란이 일게 됩니다. 여러 보고에 따르면 만주족은 겨울 동안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에 소무제와 영력제는 마음 놓고 서로 싸우면서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소무제는 해적 세력을 협조자로 거느렸는데, 숫자가 많아 영력제를 물리치고 그를 굴복 직전의 상황까지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기병 수백명이 등장하게 됩니다. 처음에 광저우의 사람들은 이들이 남명 정권을 지원하려고 온 비적일 것이라 여겼지만, 경비병들을 공격하는 그들을 보고 경악하게 됩니다. 그들은 만주족의 기병대였습니다. 만주족 병사들은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성문은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 꼼짝 말아라. 얌전하게만 있는다면 두려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기실 만주족은 단 한번도 진격을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만주족이 겨울을 나고 있다는 보고는 전부 거짓으로, 남명 조정의 각종 문서와 인장을 손에 넣은 청나라 측이 날조를 해서 정보에 혼선이 일게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놀라 도망쳤고, 도성의 수비대는 도망을 치는 한편 기마병들은 저항 세력을 색출했습니다. 혼란의 와중에 만주족 병사 4명이 붙잡혀서 소무제 앞에 끌려왔습니다. 이 황제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라곤 환관과 후궁 몇 명밖에 없었습니다. "저 자들이 나보다는 빨리 죽어야 한다. 처형하라!" 4명의 만주족 병사들은 처형 당했습니다. 이게 청군이 광저우를 점령하는데 입은 피해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날이 저물 무렵 다른 청나라 병사들이 황궁에 도착하자, 그들의 눈에 비친것은 황실 일가의 사람들이 죽어서 널부러진 모습과, 자살한 소무제가 황상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은 영력제는 당초에는 소무제의 기만책이라고 여겼으나, 실상을 알게 되자 서쪽으로 멀리 피하게 됩니다. 그는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의 해상 세력과 연계를 취하면서 재기를 꿈꾸었지만, 남중국해의 바다에 있는 정씨 세력과,내륙 서부로 깊숙이 도주중인 영력제 집단과의 의사소통은 매우 드물게, 그리고 아주 위험천만하게 이루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습니다.
정성공의 대규모 반청운동이 실패한 후,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는 장장 15년간을 도망 다니면서 지냈습니다. 해안 지방에서 쫒겨난 영력제와 남명의 조정 신료들은 내륙을 향해 서쪽으로 몸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중국의 국경까지 벗어났고, 황실 여인들은 가지고 있는 귀금속까지 팔아치우면서 연명했습니다. 황제는 그들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이들에게 피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회복하면 영광을 누릴것" 이라는 약속 밖에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을 떠나, 버마에 도착하여 사가잉(Sagaing)이라는 한 도시에서 빈탈레(Bintale)라는 왕에게 몸을 의탁했습니다. 그들은 2년 동안 버마에서 나름대로 행복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1616년 6월, 프롬(Prome) 지역의 영주이자 빈탈레의 동생인 폐 민(Pye Min)은 형을 죽이고 옥좌를 찬탈했고, "신성한 물"을 마시기 위한 의식 행사에 영력제 일행이 참가할것을 권했습니다. 영력제의 금위대장은 이것이 미심쩍다고 여겼습니다. 폐 민이 영력제 일행을 달갑지 않게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폐 민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1개 부대와 무려 100여 마리의 코끼리를 보내 불쌍한 영력제 일행을 학살했습니다. 수천명이 죽어갈 무렵, 돌연 폐 민은 일을 중지시켰고, 영력제는 태후, 황후, 후궁, 아들, 그리고 한 환관과 함꼐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병사들은 모두 코끼리등에 처참하게 당해 의식이 불분명했습니다. 이들이 명 제국 최후의 군대였습니다. 영력제는 폐 민이 자신들을 죽이지 않은 것이 한 통의 서한을 받았기 때문이라는것을 들었습니다. "명 왕조에 충성스런 장수가 보낸 서한일 것입니다! 그가 폐하를 모시러 올 것입니다!" 황실 사람들은 기대에 차서 이런 소리를 했지만, 영력제 일행은 40일동안 또 갇혀있다가 폐 민으로부터 나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고, 문제의 그 부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5,000여명의 기병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표지도 없었고 아직 동이 틀 무렵이라 어두워 황실 사람들도 그들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무장을 하지 않은 병력이 영력제의 처소로 와서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명의 유신들로서, 폐하를 본토로 모셔가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4년 전까지 남명 군대에서 복무하던 자로, 영력제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지만, 영력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삼계가 보냈는가." 잠시, 침묵만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침묵은 곧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영력제는 그들을 꾸짖었고, 기세에 눌린 병사들은 자신들이 만주족을 위해 복무하며, 다만 황실 인사들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고 영력제를 안심시켰습니다. 선택의 여지는 이제 없었기에, 영력제는 변졀자들과 함께 버마를 떠나, 3개월간의 고통스런 여정을 견뎌 중국까지 도착했습니다. 황제는 점점 견디기 힘든 고통에 시달리며 끼니를 거부했고, 갈수록 천식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홍무제 주원장으로부터 이어진 대제국의 마지막 후예는 이제 처량한 꼴로 운남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운남의 지배자는 오삼계였습니다. 과거의 이야기에서 산해관을 열어주었던 청년 장수는 이제 50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명 왕조에 대한 충성을 이야기하며 아버지를 꾸짖던 그는, 이제 청나라의 장수로서 남방을 평정하여, 실질적인 지배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이야기입니다. 영력제를 본 오삼계의 병사들은 동요했습니다. 이제 나이도 들고, 만주족 정권의 밑에 알랑거리며 부귀와 목숨을 연명하는 그들이지만, 그 옛날 그들은 산해관에 남아 만주족의 공격으로부터 명 왕조를 수호하던 마지막 정예군이었으며, 숭정제를 죽게한 이자성군과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을 벌였던 부대였습니다.
늙은 병사들은 오랫동안 잊고 지내는 뜨거운 충정이 핏속에서 다시 꿈틀거렸지만, 혈기에 넘치던 청년 무장 오삼계는 이미 노회해질대로 노회해진 뒤였고, 다른 성가신 문제가 생기기전에 일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영력제의 구금을 북경에 알렸습니다.
당시는 아직 네명의 대신이 어린 강희제의 업무를 대리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그들은 영력제의 처형을 명령했습니다. 오삼계는 일을 지체없이 처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662년 5월 9일. 영력제와 세레명이 콘스탄티노인 그의 아들 주자훤은 오삼계 앞에 섰습니다. 영력제는 최후의 순간을 예상하고 오삼계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조용히 군말없이 따랐습니다. 오삼계는 북경에서 내린 칙령을 자신이 직접 읽었습니다. 그 칙령의 마지막 구절이 끝나기도 전에, 부하들은 영력제와 그의 아들을 붙잡고는, 밧줄로 두 사람의 목을 졸라 살해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황후는 도자기 그릇을 깨어 부수고 누가 말리기도 전에 자신의 목을 쳐 죽었습니다. 하늘이 노한것인지, 곧바로 구름이 일고 어두워지고,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여름철 우박을 둘러싼 폭우가 내렸습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사람들은 이런 사태를 보고 죽은 영력제를 깊이 동정했고, 오삼계의 부하들도 죄책감과 회의감에 빠진 사람들이 상당 수 있어, 이 조짐을 불길하게 여긴 오삼계는 많은 병사들을 처형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날씨도 좋아지자, 사람들의 분위기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제 중국의 영역에서, 청에 대항하는 마지막 명나라의 잔존세력은 소멸했습니다. 과거의 이야기에서 충성심 하나로 산해관을 지키던 청년 장수 오삼계는, 이제 제 손으로 명나라의 황제를 목졸라 살해한 운남의 노회한 지배자이자, 남부의 제왕이었습니다.
젊은 강희가 상대해야 할 남자는 바로 이런 사나이였습니다. 실로 만만찮은 효웅(梟雄)을 적수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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