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초기까지 조선의 골치거리였던 왜구는
대마도 정벌 이후 세종 중기부터는 급격히 줄어듭니다.
간간히 보이는 왜구도 태종 초기 때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고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약탈을 해서 도망갈 경우 추적해 잡아들이는 성과까지 보이죠.
또 평시에도 관할 구역을 순찰하여 미리 대비하고,
봉화로 인한 통신 수단과 각 항구마다의 병선 체계를 확실히 하였으며,
태종의 강경책과 다르게 세종은 삼포라 불리는 부산포, 제포, 염포를 개방하여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척박한 땅에서 사는 대마도인들로서는 자체 생산만으론 살아갈 수 없었기에
살아갈 수 있는 숨통을 어느정도 트여주면 약탈을 해야할 필요성이 줄어들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죠.
하지만 지금의 개성공단과 마찬가지로 회유책으로 쓴 삼포개항은 조선 입장에서 부담이 될 수 있는 정책이었습니다.
왜인이 무역을 위해 들어오는 포구다보니 그 지역에선 왜인들이 많이 살게 되고,
만약 지금의 평화가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곳은 당연히 삼포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회유책은 분명 효과가 있었고 이 덕분에 남쪽 바다의 위협은 과거와 다르게 급격히 줄어듭니다.
바다의 평화는 문종과 단종, 세조, 예종, 성종, 그리고 연산군 때까지 근 100년동안 이어집니다.
물론 성종 중기부터는 왜구가 간혹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왜구는 다 소탕했고 가끔 소탕에 실패할 땐 더 철저히 방비하기 위해 노력했죠.
하지만 이때부턴 확실히 과거와 다르게 왜구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하니 조정에서도 슬슬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아직까진 대부분의 왜적을 소탕할 수 있었음이 다행이었고,
간혹 대마도주가 직접 나서 왜적을 잡아들여 조선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00년 동안의 평화를 한 번에 깨뜨리는 사건이 중종 5년 발생합니다.
그 유명한 삼포왜란입니다.
삼포왜란이 일어난 원인은 조선과 왜인들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삼포에는 왜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들이 사고를 치는 경우가 있었고 이 때문에 해당 관리들은 왜인에게 상당한 강격책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조선과 거래를 하거나 일을 하는 왜인에 대해 조선의 관리들이 부당한 대우를 하여,
임금을 주지 않는다거나 과도한 물품을 요구하기도 하였고,
제포 첨사의 경우엔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왜인 4명을 죽이지요.
이건 왜적만의 주장이 아닌 조선쪽에서도 어느정도 인정한 바였습니다.
삼포왜란이 일어나기 전 제포에서 왜인이 방화를 일으켰는데,
사간이 말하길 자신이 지방에 있을 때보니 수령 들이 왜인을 다스리는 방식이 분명이 잘못되었었고
왜인들을 어루만졌으면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조선의 지방관 측에서도 잘못이 있음을 지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간언을 듣고도 조정에서 아무런 조치를 않다가 삼포왜란이란 더 큰 피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여하튼 이들은 스스로 대마도주가 보내어 왔다고 주장하며,
100여척의 배를 이끌고 5천명 정도가 침략하여 부산포 제구 등을 함락하지요.
조정에선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급박하게 논의하여 중앙 정부에서 내려보내 상황을 지휘할 인물을 선택합니다만....
100년간의 평화가 너무 길었던 걸까요.
김종서나 한명회 같은 조선 초기 조정 주요 인물들도 국경으로 가 방비를 하고 야인들과 싸우기도 하였는데,
삼포왜란을 진압키 위해 선택하는 인물 들마다 전부다 병이 있다. 몸이 안 좋다. 변방의 일을 알지 못한다..
이런 중임을 해낼 수 없다..하며 안 가려고만 하는 겁니다-_-;;
그러면서 지방에 살고 있는 자기 가족들은 한양으로 불러 대피시키려고만 하는 한심한 모습만 보이죠.
조정 대신들이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이는 사이 지방의 절도사 등의 왜적들과 최대한 맞서 싸우면서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그러자 왜적 측에서도 화친을 요구합니다.
조정에서도 적극적으로 내려가 토벌하려는 인물이 없고,
백성들도 오랜 평화에 감히 나서 싸우려 들지 않자 조정에선 화친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었지요.
중종은 화친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이에대해 의논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대신들을 불러 이야기를 합니다만..
직제학 김극픽이 백성들이 왜적에 의해 피해를 이었는데 그 당사자와 화친은 절대 할 수 없다 주장하자,
이에 많은 신하들이 동의하며 화친을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
결국 중종도 화친하기 위한 논의를 접고 왜적을 토벌할 것을 결정하지요.
이렇게 되니 남쪽으로 가길 계속 망설이며 계속 시간만 끌었던 병조참판 안윤덕, 좌의정 유순정 등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도성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들이 해당 지역까지 채 내려가기도 전에 군관들이 이미 제포에서 대승을 거두어 상황을 거의 다 종결시킵니다.
조정에선 서로 자긴 못하겠다고 미루고 회피하는 사이에
지방에 있는 군관들이 목숨걸고 싸우며 사태를 정리한 거였죠.
삼포왜란이 종결되고 조정에선 대마도와의 무역을 대폭 줄여버립니다.
그리고 삼포도 문도 닫아버리죠.
그런 난리가 있었으니 당연한 조치였습니다만, 이때부터 문제는 점점 더 커져버립니다.
앞에 말했다시피 대마도는 자체적인 생산만으론 살아갈 길이 빡빡한데,
조선과의 무역이 대폭 줄어들었으니 살기위한 나머지 선택은 당연히 약탈 뿐인 것이죠.
과거의 왜적은 민간인을 침략하여 약탈한 후 도망가는 식이었다면,
이 이후의 왜적들은 군관들과 과감히 싸우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그것도 징과 북을 치면서 진격하여 싸우려는 모습은 이미 단순한 도적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태가 이러하니 조정에선 남쪽의 방비를 과거처럼 쉬이 여길 수 없었고
이때부턴 나름 남쪽 바다의 방비를 철저히 하려 노력합니다만...
중종 18년, 문제는 자꾸만 더 복잡해집니다.
대부분의 왜구가 경상, 전라도, 아무리 많이 나아가도 충청도에서 횡포를 부렸다면,
황해도에서 왜구가 나타난 것입니다.
왜구가 연속하여 출몰하니 전라도 경상도의 방비를 어느 정도 하자
이제는 수군이 전혀 없다시피 한 황해도, 더 나아가 평안도까지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왜구는 아니었지만,
여하튼 조정 입장에선 점점 더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되었죠.
특히 삼포왜란의 경우 바다에서 적이 왔다고는 하나 육지에서 전투를 했다면,
이때는 바다에서 전투를 치룹니다.
그 과정에서 조선 병선의 약점이 노골적으로 들어났던 사건이었죠.
이 사건에 대해선 과거 썼던 글이 있으니 참고하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https://pgr21.com/?b=17&n=541
https://pgr21.com/?b=17&n=544
https://pgr21.com/?b=17&n=545
이번 편은 함선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못했네요.
아무래도 당시 분위기를 아는 것이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기 쉽다 생각하다보니
배경 설명이 길어졌습니다.
다음편에선 본격적으로 병선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