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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6/14 17:31:01
Name tyro
Subject [일반] 내 생애 최고의 순간
0.

'똥인간은 고속버스를 타지 않는다.'

예전에 어디선가 봤던 말이 머리 밖으로 슬며시 빠져나왔다.
"그래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근데 왜 난 오늘 아침에 화장실을 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약 30분여분 전에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순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1.

봄날의 기운이 화사하게 가득한 어느 날의 일입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나무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고, 화창한 날씨와 달리 분위기는 적막하기만 했습니다. 듣고 있던 노래의 음량을 살짝 높여봅니다. 가락에 맞추어 기분을 끌어올리는데 어디에선가 세련된 향기가 풍겨오네요. 음량을 다시 내립니다. 점점 향은 짙어져 가고 가슴은 두근두근 뛰기 시작합니다. 옆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살짝 고개를 돌려봅니다.

그래, 그때만 해도 좋았다.


2.

""
보통 사람이 정신적으로 가장 긴장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시험을 망쳐서 성적표를 숨겼는데 부모님께서 그것을 발견했을 때? 그게 아니라면 야간 순찰에서 장성과 맞닥뜨렸는데 암구호가 생각나지 않을 때? 내 경험으로는 급대변의 신호가 왔는데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한, 바로 그 순간이다.
""

"잔액이 부족합니다."
지폐를 넣고 앉을 곳을 찾았지만, 빈자리가 없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냥 내렸다가 다시 탈까?'
'다음 버스를 타려면 20분 넘게 기다려야 할 텐데.'

잠시 고민하던 중에 사람이 다 올라탔고, 곧이어 버스가 출발했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의 흐름은 절대적이지 않다. 간단하게 풀어보면 시공간의 왜곡으로 관찰자는 실제와는 다르게 시간 흐르는 걸 느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왜곡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두 물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강력한 상호작용일 것이다. 물론 물리를 전공한 사람이 보면 실소를 지을만한 얘기지만 이러한 내용을 대변에도 범박하게나마 적용할 수 있다. 즉, 나와 대변 사이에서 무언가가 존재하여 시간의 흐름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현상을 직접 경험하는데, 처음으로 인지하는 대상은 작은 신호이다. 이를 통해 장 속에 있는 대변은 나로부터 엑소더스하고 싶다는 의지를 전달하지만, 내 몸은 관성에 의해 그러한 대변의 의견을 묵살한다. 대개는 이 선에서 멈추고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 사라진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2008년경 쇠고기 수입 협상 등 혼란스러운 시국 속에서 촛불 시위를 통해 국민이 정부를 향해 메시지를 보낸 것처럼 대변은 평소와 달리 나의 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나는 평소와 달리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공기 중으로 냄새가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3.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점점 안 좋게 진행되는 게 느껴졌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따라 신나게 달리고 있었는데, 물론 정차 현상이 전혀 없었다는 건 나에게 희소식이었으나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버스 고유의 진동은 나를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외부 상황도 좋지 않았다. 주위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금 전에 공기 중으로 퍼진 방귀를 맡았던 탓이리라. 또한,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어제 술자리에서의 음식량은 평소보다 과다했으며 그 질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이런 경험이 거의 없었던 애송이였기에 노련하게 그가 공격해오는 걸 능수능란하게 받아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 되더라도 도중에 내릴 수 없다는 심리적 압박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직접 서술하기보다는 이 분야의 대가이신 제임스님의 심정 묘사(https://pgr21.com/?b=1&n=1432)를 인용하는 편이 좋을 듯싶다.

""
생각해 보세요. 네이버 메인에 '3호선 길똥남, 아비규환이 된 출근길의 양재역' 같은 제목으로 기사가 뜬다면? 네이트톡이나 웃대, 오유 등에 월간 베스트로 '크크크크 길똥남 목격담'이 사진과 함께 올라간다면? 코갤러에 의해 길똥남의 신상이 털린다면? 그런 이유로 인해 똥인간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약간의 변의라도 느껴지면 무조건 내려야합니다. 막상 내렸더니 참을만 해서 다시 타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일단 내려야합니다.
""

그렇다. 나는 '아침의 광역버스, 대변으로 큰 소란'과 같은 기사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심정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여러 가지 안 좋은 환경들을 홀로 극복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고, 결국에는 연이은 대변의 공격으로 아랫배가 적에게 굴복하면서 나는 패배의 소리를 주위에 알리게 되었다. 내릴 정류장은커녕 사방에 차들이 달리는 광경만 눈에 들어오는 절망적인 상황.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차라리 영화에서 보던 강도납치단이 갑자기 나타나 이 버스를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살짝 들었다.


4.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는 내 힘으로 조절할 수 없는 한계 영역에 도달했다. 이미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인 것은 받아들였으며, 남은 건 오직 정신력 뿐이다. 시간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대변과의 1:1 승부를 계속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타임아웃이 없는 시합과도 같았다.

정말 그날은 이상하게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지요.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건 오직, 오직 대변의 공격뿐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한 턴 한 턴, 아니 긴장과 이완의 반복 속에서 주변의 풍경, 사람, 사물 같은 것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타이어는 계속 돌아갔고, 어느덧 버스는 정류장이 있는 장소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자기 가족을 베고 황산벌로 출진한 계백 장군과도 같은 다짐을 하며 눈물을 머금고 적의 마지막 공격을 대비하던 바로 그 순간에 버스 문은 열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가장 가까운 상가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는 게 아닌가.
크게 당황하며 급하게 주위를 돌아보니 한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 잠시 상가 공사로 8시부터 10시까지 출입을 통제합니다. 이용에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


그리고 내가 마지막까지 잡고 있었던 이성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5.

그래, 그 때 그 느낌을 과연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다행히도 피지알에서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 설명하는 글(https://pgr21.com/?b=8&n=43979)을 우연히 접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부처의 경지와 그것은 다른 이야기겠지만, 여기서 부처가 머문다는 그 경지를 묘사하는 대목은 내가 느꼈던 그 찰나를 절묘하게 나타내는 것 같았다. 이른바 상락아정(常樂我靜)이다.

""
대변이 급할 때 나는 없죠. 왜냐하면, 내가 아닌 어떤 다른 존재에 모든 정신을 쏟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그 상태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어느 방향을 향해 가게 됩니다. 그리고 곧 나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전의 나는 누구인가, 조용히 생각합니다. 느낌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변기 안의 물은 돌아가고.
""

세상은 아름다워 보였다. 아니, 아름다웠다. 늘 조용하고 즐거운 상태.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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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14 17:33
수정 아이콘
어제 추게에 올라 온 글(https://pgr21.com/?b=1&n=2298)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이것 저것 짜집기를 해서 적어보았습니다. 역시 어렵네요.
군인동거인
13/06/14 17:36
수정 아이콘
일단 추천 드립니다.
흑백수
13/06/14 17:55
수정 아이콘
아니, 간만에 똥이야기라니. 흥행성공이 예상되네요.
안동섭
13/06/14 17:55
수정 아이콘
일단 추천부터..
켈로그김
13/06/14 18:22
수정 아이콘
요시 그란도 시즌. 항문이 터졌어요~
냉면과열무
13/06/14 19:03
수정 아이콘
아 크크크크크크 이 사이트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순간입니다.
아우디 사라비아
13/06/14 19:09
수정 아이콘
추천하지 않을수가 없네요....




오줌인간....

종점에 다 와서 막히는 고속버스 속에서 방광은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체의 안전매카니즘으로 결국 세게끔 만들어져 있는것이다
적어도 똥은 고유한 리듬을 타기라도 하지만 오줌은 그런것도 없다 그냥 줄곧 거세게 밀어 붙일 뿐인것이다
처음에는 여유롭게 기사아저씨에게 "혹시 여기서 내릴수도 있습니까".... 그러나 규정상 절대 안된다는 아저씨에게 이를 악물고 대들고 규정이란 것으로
나를 억누를순 없다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울며 그렇게 매달릴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버스로 부터 재동댕이쳐져 심지어 느린 서행으로 모두가 보는 와중에 그저 등돌린것 만으로 완전한 은폐을
확보한것이라 그렇게 위안하며 서서히 아니 확실히 부르르 떨며 피안의 세계로 오를수 있었다
오후의산책
13/06/15 04:16
수정 아이콘
쌋네 쌋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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