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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8/06 01:04:03
Name 눈시BBver.2
Subject 희망과 절망 - 6. 가장 성공한 기동
"한국에서 전쟁이 났습니다. 군복을 다시 입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한국에 가거든 반드시 이 대통령을 찾아뵙고 문안을 드려라.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는 생전에 그분의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지하셨다. 그 어른도 네가 인사를 드리면 몹시 반가워하실 거다. 꼭 찾아뵙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군은 한국어를 아는 병력이 절실히 필요했고, 한국계를 다시 부르게 됩니다. 이 때 가장 유명한 한국계 미국인이 재소집과는 별도로 자원입대합니다. 자신의 전우였던 일본계 미국인들이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그를 막지 못 했죠.


그의 아내 아이다도 남편이 유럽 전선에 투입되자 간호장교로 유럽으로 갔었죠.

김영옥은 이렇게 미군으로 돌아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요. 그는 이미 코인 세탁기 사업으로 돈을 쏠쏠히 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걸 찾은 것이죠. 태어나 처음으로 밟는 아버지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국으로 오는데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죠.

... 왜 이걸 깜빡하고 있었을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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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동고서저로 군사적인 부분에서 서쪽과 동쪽의 차이가 어떤지는 백제와 신라 때 이미 답이 나온 상태입니다. 북쪽에서 공격해 올 때 말이죠. 백제는 밀릴 때는 그냥 한 방에 밀려버린 반면 신라는 소백산맥에서 어떻게든 막아냈습니다. 그 외에 전라도 쪽으로 우회하거나 동해안으로 남하하는 방법이 있긴 했습니다만.

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군이 맡은 중부전선에 비해 미군이 맡은 서부전선이 난이도가 더 높았죠. 그럼에도 미군이 서부전선을 맡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건강을 헤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나를 죽일 담배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스미스 임무부대가 너무 쉽게 무너지긴 했지만 미군은 아직 전쟁이 더 커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맥아더는 충청도에서 적을 막은 후 후방으로 상륙작전을 해 적의 주력을 포위 섬멸할 생각이었죠. 인천상륙작전은 이 때 이미 구상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작 실행했을 때는 이 때와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지만요.

7월 6일 당시 미 24사단은 34연대가 평택부터 안성까지 방어진지를 만들고 있었고, 21, 19연대가 4일 부산에 도착해 전선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국군의 수도사단은 진천, 1사단은 음성, 2사단은 증평으로 이동해 방어를 준비했고 6사단은 19연대를 안성, 7연대를 동락리, 2연대를 충주에 배치합니다. 8사단은 단양으로 이동했고 동해안의 23연대는 한 차례 막아낸 후 계속 울진에서 적을 막고 있었죠.

이 날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3차 공세, 여기서 국군과 미군은 예상 외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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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24사단이 한국에 온 것도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였습니다. 전쟁 시작하자마자 바로바로 왔으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들의 전의도 그리 높지 않았죠. 신병이 많았던 이들은 일본에서 여자 꼬시는 데 집중했고, 성병이 자꾸 퍼져가고 미군의 자존심 및 일본에 끼치는 피해 문제도 있고 해서 점차 영외로 나가지 못 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떨어지는 사기를 스포츠로 채웠죠.

이런 상황에서 전쟁 참전, 영 잘 되지 않았습니다. 부산에 내리기는 했지만 그들의 주둔지도 제대로 결정 안 난 상태였고, 누굴 먼저 전방으로 끌어올리느냐도 문제가 됐구요. 뭐 올라오긴 했습니다만, 문제는 여전히 쌓여 있었습니다.


24사단장 딘 소장은 스미스 임무부대에 이어 34연대를 평택 북쪽으로 북상시킵니다. 이 때 1대대는 한국에 와서 신임대대장을 만나게 됩니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준비를 하게 됐고, 무전기도 없어서 스미스 임무부대가 무너진 것도 한참 후에 알게 됐으며, 그들에게도 대전차무기가 제대로 없는 상태였죠. 이 때 유선은 피난민들이 노끈 대신으로 쓰려고 잘라갔다고 합니다 (...);;;

이런 상황에서 5일 11시, 스미스부대가 적 전차를 격파하지 못 한다는 상황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스미스부대와 국군 17연대를 격파한 전차가 이들 앞에 나타납니다. 18시에 시작된 전차 1대의 공격, 여기서도 미군은 전차를 격파하지 못 했죠.

미군이 스미스임무부대의 전멸 소식을 들은 것은 6일 01시, 이제 문제가 된 것은 전방에 배치된 34연대 1대대였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현진지를 고수하되, 특히 후방경게를 강화하고 퇴로를 확보하여 스미스부대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라."

부사단장 바스는 평택-안성에서 적을 막는다는 딘 사단장의 계획과는 달리 병력을 천안에 집중해 결전을 시도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죠. 어느 쪽이 맞을지는 판단 못 하겠습니다만,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계속 오고 있었습니다.


전차의 진격에 맞춰 다리를 끊었지만 전차는 다리 좌우의 개울을 이용해 계속 진격해 왔고, 관측병이 전사하면서 화력요청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에 연대장 러브리스 대령은 1대대와 안성을 맡던 3대대의 철수를 명령, 이들은 천안으로 가게 되죠.

딘 소장은 이 소식을 듣고 대노, 천안으로 달려가 연대장을 심하게 추궁합니다. 다시 평택-천안선을 사수하라고 하려 했지만 이미 밤은 늦은 상황이었죠. 그나마 21연대와 19연대가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에 21연대를 대전으로, 19연대를 전략예비로 대구에 두면서 방어를 계속하려고 했죠. 사단장의 명령 없이 단독으로 후퇴한 건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통신의 중요성이 피아 가리지 않고 계속 강조되는 거죠. 소통의 중요성이라 해야 될까요.

+) 뒤의 상황을 보면 후퇴가 맞는 것 같긴 해요 -_-a 이 때 미군은 국군이 겪었던 전차공포증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거든요.

아직 열이 안 풀린 딘 소장은 아예 연대장을 갈아버립니다. 러브리스 대령이 해임되고 마틴 대령이 천안에 파견됐죠. 하지만 뭘 하기도 전에 북한군이 계속 몰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남은 건 천안에서의 결전 뿐이었죠.

7일 밤, 적은 야습을 시도했지만 다행히 대전차고폭탄을 집중해 2대를 격파해서 격퇴시킵니다. 하지만 8일 06시부터 북한군이 다시 돌격해 왔죠. 대전차지뢰를 잔뜩 깔아놔서 안심했는데 너무도 쉽게 지뢰지대를 지나옵니다.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밤에 몰래 제거했거나 불량품이거나 "여기가 아니네?"의 상황으로 짐작할 뿐이죠.

전차는 천안 시내로 진입해 왔고 시가전이 계속됐으며, 상황은 계속 악화됩니다. 연대장 마틴 대령은 적 전차를 어떻게든 깨뜨리려고 자신이 직접 로켓포를 들고 전차와 대결하다가 전사하고 맙니다. 08시였습니다. 연대장의 전사와 함께 전투는 끝을 향해 갑니다. 연대장 대신 지휘를 맡은 3대대장 스미스 중령(다른 사람이예요)은 09시에 포병에 연막차장을 요청, 병력을 천안에서 철수시킵니다. 이후 10시에 연대지휘소에 도착해 기절했다고 합니다.


미군의 첫 연대장 전사, 미군은 또 한번 북한군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에게는 첫 십자훈장이 수여됩니다.

천안에 고립됐던 3대대의 피해가 특히 컸는데 이들 중 돌아온 것은 175명 뿐, 연대장부터 해서 장교 사상자도 속출했고 작전과장 던 소령 등 60여명이 포로가 되었죠. 그리고 천안에서 탈출하면서 공용화기 대부분을 버리고 오게 됩니다. 북한군의 피해가 얼마나 됐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때 미군을 공격한 북한군은 3, 4, 6사단과 105 전차사단, 말 그대로 주력이었죠.

아, 이 때 미 전차가 처음 등장합니다. 하지만 M-24 경전차는 북한군의 T-34를 상대하지 못 했고, 1대 격파하는 동안 7대가 격파됩니다. =_=;;; 아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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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은 금강 방어선 확보였습니다. 딘은 큰 피해를 입은 34연대를 공주로 보냈고 북상하던 21연대에게는 조치원을 확보하게 했으며 예비대인 19연대도 불러 조치원 남쪽 14km에 있는 대평리를 점령하게 합니다. 어떻게든 금강에서 막겠다는 것이었죠. 이 때 25사단장 킨 소장이 대전에 도착하는데 (딘, 킨 -_-a) 딘은 후방예비를 25사단에 맡겼죠.

"사단은 어떠한 손실을 무릅쓰고라도 금강선을 고수하려 한다."


이는 워커 중장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습니다. 아니 그는 진심으로 금강방어선을 확보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만... 실패했죠.

당시 미군은 블루하트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미 제 1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한다는 계획이었죠. 하지만 10일에 이를 정식으로 취소하고 대신 포항에 상륙시켜 북상, 24사단을 지원하려 했습니다. 딘 소장의 24사단이 믿을 건 이것 뿐이었죠. 당시 국군은 미군의 후퇴에 맞춰 철수하고 있었고, 금강방어선을 지키지 못 하더라도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더 버텨야 국군의 측면을 지킬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지 못 하면 미군이고 국군이고 다 망할 상황이었죠.

9일, 북한군이 전의-조치원 축선에 나타납니다. 그래도 이 때에 이르러 미군이 자랑하는 공군 및 포병사격이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죠. 전방을 맡은 21연대 혼성 1대대는 공군을 호출, 11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게 됐고, 10일에는 대규모 폭격으로 전차 38대, 반궤도차량 7대, 트럭 117대 등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리면서 북한군이 야간기동으로 전환하게 했죠. 또한 155mm포가 등장해 몰려오는 전차 11대 중 5대를 격파했구요.

하지만 북한군은 여기서도 대규모 포위를 시도합니다. 마침 안개도 끼면서 쉽게 이루어졌죠. 10일부터 혼성 1대대는 모든 방향에서 공격받았고, 계속 막아냈지만 박격포 진지까지 공격받으면서 후퇴를 택합니다. 이어 11일 새벽에도 34연대 3대대 후방에 침투해 지휘소와 박격포 진지에 포사격을 유도하고 후방을 차단, 3대대는 60%나 되는 병력 손실을 입고 조치원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한편 북한군도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 공군, 포병의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습니다. 북한군의 진격은 밤에 집중됐고, 병력 부족으로 서울, 경기에서 병력을 뽑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좌익들의 자원으로 이루어졌지만 피해가 커질수록 강제로 끌고 오는 게 많아졌죠. 한편으로 8일부터 한국 전 지역에 토지개혁을 선포하면서 공산화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 상황과 맞물리면서 영 신통치 않았고 원래 좌익이었던 이들이라면 모를까 북한도 별 다를 바 없다는 걸 느끼게 해 버렸죠 -_-a 점령지마다 인민재판도 계속됩니다.

+) 한편 UN에서는 포로 학살에 대비해 13일에 적십자에서 감시단을 보냅니다. 전쟁이 일어났으니 당연한 걸지 모르겠는데, UN도 슬슬 한국 측의 학살을 알게 된 것 같아요.

11일부터 12일까지 미군은 금강 이남으로 내려가 금강 방어선을 완성했고, 금강에 있던 다리도 폭파됩니다. 북한군은 4사단이 공주로, 3사단이 그대로 조치원으로 진격하게 됩니다. 다행인 점은 3사단 이영호 소장이 늦게 와서 4사단이 공주 방면으로 가는 게 늦어졌던 것이죠. 한편 이 무렵 수색을 맡은 국군 기병중대가 인민재판 후 환영식으로 술에 쩔어 있던 북한군을 공격해 약간의 전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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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방면을 맡은 34연대와 대평리 방면을 맡은 19, 21연대,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많았습니다. 21연대는 전투에 더 투입하기 힘든 상황이라서 19연대의 후방에 배치됐고, 34연대도 큰 피해를 입은데다 천안 전투에서 연대장이 전사하면서 사기도 떨어질대로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19연대가 그래도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잘 싸우길 기대하는 건 무리였죠. 이들은 여전히 서로간에 통신이 안 되는 상황이었고, 34-19연대간의 거리도 40km로 너무 멀었으며 계속된 이동과 전투로 지칠대로 지쳐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4일 아침, 34연대 정면에 대규모 포격이 시작되면서 관심이 쏠리는 사이 하류에서 도하가 시작됩니다. 이걸 관측병이 보고했는데 소규모 병력으로 무시했고, 이게 컸죠. 북한군은 곧바로 포병대를 공격했고 이어 34연대 후방을 강타합니다. 이 공격을 받으면서도 서로간에 통신은 안 된 상태였습니다. 나름 역습을 시도하긴 했지만, 단 하루만에 방어선은 뚫려 버렸죠.

한편 19연대도 휘하 대대가 2개밖에 없는 상태였고, 34연대의 붕괴 보고를 듣고 예비대를 좌측에 투입합니다. 병력이 부족하면서 지킬 수 있는 곳이 너무 좁았고, 15일 오후 시작된 공격을 어느 정도 막아냈지만 곧 측면에 침투한 북한군에 밀려버렸죠. 예비대를 너무 빨리 써 버린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금강은 강폭이 500~1000m에 평균수심이 2.5m라서 미군은 다리와 배를 없애는 것으로 적이 쉽게 도하하지 못 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은 한강을 건너면서 충분히 도하에 익숙해진 상태였죠. 이들은 전면에서 포격으로 미군의 관심을 끌고 그 사이 측면에서 주력을 도하해 후방을 찌르는 작전을 계속 했고, 병력도 사기도 부족했던 미군은 계속 당합니다. 믿었던 19연대까지 너무 쉽게 무너졌고, 금강 방어선은 붕괴됩니다.


다음은 대전이었죠. 이 때 미군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병력, 장비, 통신 등의 부족과 함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북한군이 온다, 전차가 온다는 것 하나만으로 두려움에 떨고 후퇴하는 상황이 연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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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투 및 중부전선에서 국군이 싸운 건 다음 편으로 돌리고, 이 때 일어난 신묘한 기동을 소개하도록 하죠 -_-a

미군은 24사단만으로 못 해도 금강까지는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적은 병력이라도 보내도 된다 생각했고 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문제 외에도 병력이 적은 탓에 모든 부분을 막을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설마 북한군이 방어가 안 된 부분을 우회, 그것도 전술적 우회가 아닌 전략적으로 우회할 것이다고는 생각하지 못 했죠.

대전 전투가 한창 벌어지던 20일, 미 정찰기는 군산부근에서 남하중인 북한군을 발견합니다. 큰 충격이었죠. 이들은 자신들이 상대한 4사단일 거라 여겼지만 아니었습니다. 하필 장마철이라서 21일, 22일에 비가 내렸고 발견했던 북한군을 놓치게 됩니다. 수색대라도 보내야 되는데 뺄 수 있는 병력이 없었구요.


"치고 달리라우. 멀리 높이 더 빨리 쏴보라우!"

이들은 방호산의 6사단이었습니다. 대부분 팔로군 출신이었던 이들은 4사단의 후방에서 별 피해 없이 진격하다가 18일부터 금강을 도하해 미군을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목표는 전라도였습니다.

당시 전주까지 이르는 축선에 배치된 것은 5사단을 모체로 한 민부대(민TF라고 하면 좀 있어 보이려나요) 뿐이었고, 여러 부대가 모병을 하고 있었지만 전투 준비는 전혀 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거기다 이들이 북한군의 진격에 대한 보고를 했지만 미군은 믿지 않았죠. -_-;

애초에 미군은 금강 방어선이 뚫리면서 전라도를 포기하려 했습니다. 국군은 경상도로 가고 있었고 미군의 증원과 물자 지원 역시 경부축선으로 있었던 상황에 전라도로 보낼 병력이 없었거든요. 방어하기 좋은 곳도 경상도였구요. 금강에서 잘 막았다면 전라도에도 미군이 투입되거나 국군이 왔겠습니다만 -_-a 워커의 경우 금강 방어선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그게 제대로 되지 않았죠. 그리고 북한군은 이들에게 "전라도를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릴 시간도 주지 않았습니다.


23일, 6사단은 전주에서 다시 발견됩니다. 그리고 이 날로 광주가 떨어졌고, 재보급 후 25일에 순천에 집결, 부산으로 향하게 되었죠. 18일에 금강을 도하한 후 겨우 일주일만이었습니다. 이를 막아내려던 국군 및 경찰들은 와해되거나 부산으로 철수하거나 수복할 때까지 게릴라전을 벌이게 되죠.


이 충격은 컸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한다는 것이 확실히 결정됐고, 이들이 측면을 찌르는 것을 막기 위해 급히 진주-마산에 병력이 증원됐죠.

이 6사단의 "호남우회기동"은 한국전쟁 중 가장 성공한 기동으로 평가됩니다. 미군의 허를 찔렀고 단기간에 하나의 도를 완전히 점령한 것이었으니까요. 단 일주일만에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죠. 뭐 결과적으로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진 않습니다만. 미군은 이에 대응해 이범석을 전라도로 보내 게릴라전을 펼 것을 요구합니다만 이범석이 거부합니다. 솔직히 그의 짬에 할 일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라는 생각은 드네요.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북한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3/4이 이 호남에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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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건 다음 편이요 _-)/~ 주말도 끝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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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06 01:43
수정 아이콘
김영옥대령님이 왜 안나올까 했었는데 나왔군요!!!

현대전의 최강의 OP 장교중 하나인...
자이체프
12/08/06 02:19
수정 아이콘
서울을 점령하면서 잘 알려진 3,4사단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팔로군 소속되서 전투 경험이 있던 일부 북한군의 전투능력은 정말 후덜덜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렇게 전라도를 휘저은(?) 6사단은 퇴각때도 편제를 유지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6사단 말고 북한군 부대 중에 걸어다니는 공수부대라는 별명이 붙은 사단도 하나 전쟁 후반에 나타납니다.
12/08/06 10:35
수정 아이콘
그냥 여행을 가도 저렇게 못가겠네요.... 그나저나 25일이면, 이제 이틀 남았군요. 너희들은 적인가 아군인가~~~~
Je ne sais quoi
12/08/06 11:58
수정 아이콘
언제나 그렇듯 기동전의 위력이란 정말 대단하네요 -_-
blue wave
12/08/06 13:34
수정 아이콘
소설 태백산맥이 생각나네요. 현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존망은 매우 위태로운 순간 이네요~
김영옥 대령의 일대기는 드라마로도 만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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