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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7/18 08:53:02
Name 눈시BBver.2
Subject 희망과 절망 - 1. 한강, 3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희망과 절망"으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그냥 쭉 밀린 것 같은 게 낙동강까지의 지연전이지만 희망고문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는 막을 수 있겠지, 어디서는 막을 수 있겠지 이런 식이죠. 그리고 그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고, 낙동강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가 갑자기 희망이 찾아 왔습니다.

시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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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왕웅, 그는 조만식 문하에서 공부하고 오산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중국으로 망명, 중국군 소위로 임관해 23년에는 한국의용군 사령관을 지냅니다. 이후 중국군에서 일 하면서 임시정부를 도우며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를 지원하기도 했죠.

그의 꿈은 임시정부에서나 한국에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의 확실한 군대를 갖는 것, 만주에 있던 각종 독립군이 망한 이후 임시정부는 국민당에 세들어 사는 거나 다름 없었고, 장개석이 광복군 창설을 도와주긴 했지만 중국군 내에 있던 집단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일단 군 통수권이 없었어요. -_-; 거기다 인사권도 없었죠. 광복군은 9개의 행동 준승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나마 김홍일이 김구와 만난 후 장개석과 면담, 그 날로 중국군을 떠나 광복군으로 옵니다. 이걸로 광복군에 대한 제한은 풀리고 독자적으로 나설 수 있었죠. 그래도 수가 너무 적어서 중국군 대신 미군과 협조해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려 했지만............ 해방이 왔습니다. =_=;

이 때의 한은 그에게 진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광복군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남의 나라 군대에서 일 하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이건 다른 독립군 계열도 마찬가지라서 김일성은 러시아로, 조선의용군 등은 팔로군에 완전히 소속돼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는 광복군이 좀 낫긴 하지만 광복군엔 병력이 없었죠. -_-; 이후 미군이 광복군을 받아들이지 않자 다시 중국군으로 갔다가 이승만의 정식 초대로 48년 말에야 귀국하게 됩니다. 이 때 만주군 출신들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모함했다고 하죠.

이런 한은 귀국 후 그의 국방군 건설에 대한 계획으로 나타납니다. 높은 위치에 있었던만큼 군에 대한 지식이야 최고였죠. 하지만... 역시 그 때 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 38 이북의 공산 집단의 침략을 예상할 수 있는 현 상황 하에서는 강대한 국방군의 건설이 필요하나, 국가의 경제, 자원, 산업, 문화는 이를 허용하지 않으며 우리나라의 2천만 인구는 상비군 병력을 16만으로 제한한다. (하지만 이게 절대적이 아니다. 노력으로 이걸 개선해 나가자) 우리는 다소간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국가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교대 병력은 보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 (2차 대전 독일 vs 폴란드, 프랑스의 예를 들며) 조직과 장비는 시대에 떨어지거나 겨우 시대에 따라가는 정도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
- (육군 vs 해군) (우리는 식민지가 없고 가질 생각도 없으며 일본도 해군 재건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은 38 이북의 공산주의 세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육군을 주력으로 하는 국방군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 차량 : 경탱크 287량, 중탱크 10량, 정찰차 276량, 운병 트럭 28량, 이륜 모터사이클 408량, 삼륜 모터사이클 201량, 화물트럭 1000량
-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부뢰정, 소뢰정, 어뢰정 등의 소형 함정 약 심만 톤
- 적어도 천 대 이상의 공군. 1/4의 폭격기와 2/4의 전투기와 1/4의 각종 항공기

....... 수로 들어가니까 어마어마해요. -_-; 이런 식으로 "부족하더라도" 나라를 지킬 힘을 가지는 것, 그게 그의 꿈이었죠. 뭐... 이게 제대로 됐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귀국한 그는 참 바빴습니다. 일단 육사 교장을 맡아야 했죠.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무엇보다 이게 제일 중요했습니다. 이제 막 4년제로 정규 과정을 통해 제대로 된 초급 장교진을 양성하기 시작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간 곳은 참모학교, 역시 정말 중요했죠. 당시 한국에 필요했던 것은 미래였으니까요. 그를 본 생도들은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 출신이라면 꾀죄죄한 몰골일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지금 눈으로 봐도 꽤 미중년 아닌가요?

하지만 전쟁이 난 상황에서 경험도 없는 젊은 층으로 구성된 군 수뇌부는 개전 후 혼란에 휩쌓여 우리가 잘 아는 결과를 낳았고, 그는 구원투수로 등판합니다. 그는 최소한 이응준이라도 그 때 참모총장이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거라고 아쉬워 했죠. 하지만 개전 때 이 모두를 지휘하기에 가장 적합했던 이는 바로 그였을 겁니다.

7월부터 8월 초까지 있었던 낙동강까지의 지연전, 그는 여기서 마지막 활약을 하고, 미군과의 갈등으로 조용히 물러납니다. 그 역시 미군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밀려난 노장 중의 한명이었죠. 하지만 다른 일본군 출신의 노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쉽습니다. 평생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광복 후에도 이범석처럼 정치가로 빠진 게 아닌 끝까지 군인의 길을 택했으며, 다른 일본군 출신들처럼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낡은 교리에 매달리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가 유명하지 않은 이유도 이것일 겁니다. 지연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빛나다 사라졌으니까요.

+) 미군은 그를 "미국화" 돼 간다고 좋게 평가했습니다. 좀 짜증나는 평가긴 하지만 결코 나쁜 평가가 아닙니다. 그 나이에도 그 위치에도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계속 배우고 있었다는 거니까요. 어디 미국 이민 가려고 미군에 대해서 배웠겠습니까.


오성 장군, 대통령 이승만이 그에게 붙여 준 별명입니다. 그가 조금만 더 군에 남았다면, 그리고 정말 원수가 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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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 폭파, 북한군 서울 진입, 미 군사고문단 서울 고립"
"해공군만으로는 남진 저지 불가"


"미 지상군 투입이 필요"

맥아더는 지령 1호(한국군에 장비, 탄약 지원, 한국 거주 미국인 철수, 조사단 파견)에 따라 사령부 군수참모부 차장 처치 장군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여기에 "조사임무 외에 주한 미 군사고문단을 지휘하고 한국에 대한 지원임무를 추가로 부여"한다는 지령 2호에 따라 ADCCM, 미 극동사령부 전방지휘소겸 연락반이 편성됩니다. 이들이 수원에 도착한 것이 27일 14시였죠. 이후 맥아더가 한국에 직접 가기까지...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어떻게든 혼란을 진정시켜야 했습니다.

당시 상황은 정말 공황이었습니다. 한강 이북에서는 다리가 끊겨도 피난 가려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졌고, 헌병들을 강 건너편에 보내 이들을 통제합니다. 나중에 가면 북한군이 장악한 강변과 국군이 장악한 강변으로 나뉘어서 후퇴하는 국군은 사복으로 갈아입거나 운 좋게 국군이 장악한 지역으로 가야 했습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동안 희생된 수는 2만 2천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을 겁니다. 강제로 끌려갔음에도 부역자로 집계돼 빠진 이들도 많을 것이고 반대로 저 수 중에 자발적으로 참가해 엄밀하게 "희생"이라고 할 수 없는 이들도 많겠죠. 아무튼 이들 중 가장 억울한 이들은 보도연맹원들이었습니다.

"6.25가 터지자 나는 서울 보련 1만 6천 8백 명을 각 구별로 집합시켜 그들의 동태를 장악했어요. 이들을 시켜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난민 안내, 구호사업, 포스터 작업 등의 일을 했어요. 일부 시민들이 피난을 떠났고 행정이 마비되었지만 1만 6천 8백 명의 보련은 일사불란하게 상부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한강다리가 끊긴 것입니다." -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심사실장 정희택 검사

이들은 이렇게 명령을 충실히 따르며 대한민국에 충성했지만, 정부에는 버려지고 북한군에게는 배신자로 낙인 찍혀 우선 징집됩니다. 그리고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부역자 처형에 가장 주요한 타겟이 됐죠. 그나마 다행인 건 6월 5일에 7천명을 탈퇴시킨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많은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향했고, 민심을 안정시킨다는 목적으로 7월 6일, 한창 밀리고 있을 시점에 영등포를 탈환했다는 거짓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아... -_-;

그 외에 김규식, 조소앙을 비롯한 참 많은 정치인과 이광수 등 많은 유명 인사들이 납북됩니다. 이들 중에는 스스로 들어간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걸 욕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이광수처럼 끝까지 북한에 협조를 거부한 이들은 숙청되거나 조용히 (이광수의 경우 홍명희가 최대한 쉴드 쳐 줘서) 죽었고, 아닌 이들은 북침설을 받아들여 남한을 비난했죠. 근데 이것도 당시 북침설이라 생각할 만한 게 워낙 많기도 했구요 -_-; 뭐 그렇다고 이들 중 북한의 요직에 앉은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김일성에게는 자기를 위협할만한 정치인은 필요가 없었죠. 그저 이승만의 정적들을 끌어들여 명분을 얻으려는 것이었을 뿐, 그리고 이 전쟁을 이용해 자기의 입지를 강화합니다. 북한이 망하지 않은 이상 그에게 정치적으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것이죠.

반면 이승만은 자기의 정적들을 알아서 제거해 준 아주 고마운 일이었죠. 그 후 자기의 큰 정적이 됐던 조봉암은 정작 자기가 했을 일을 대신 하고 왔구요. 나중에 조봉암을 만나서 왜 월북 안 했냐고 물었다죠? 한국이 망했다면 모를까, 그에게도 이 전쟁은 정치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자, 그럼... 이제 군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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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인도교 폭파로 한수(漢水) 이북에서 싸우고 있던 장병 가운데 4만4000 명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7사단의 경우 (약 1만 명 가운데) 장병 500명과 기관총 4정만 도강할 수 있었다. 1사단은 5000명만 도강하고 각종 대포는 유기됐다. 제2, 3, 5사단 역시 흩어진 채 도강했기 때문에 부대의 편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 한국전쟁사

한강을 건너서 재편한 국군, 하지만 수는 극히 줄었고 분산돼 후퇴해서 편제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나타나지 않은 이도 있죠. 죽지 않았으면서요.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김포사를 처음 맡았던 계인주 대령, 이래저래 찾아봤지만 확실한 듯 하네요.

그에 대한 얘기는 혼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구까지 도망쳤다느니 부산까지 도망쳤다느니 하는 것이죠. 대구까지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헌병에게 붙잡힐 때 가족과 함께 있었다고 하죠. 이 정도면 계획적이라 봐야겠죠.

그 중요했던 김포사, 그 사령관으로서 단 하루만에 도망쳤다는 것, 일단 그 자신은 자기 휘하의 "빨갱이"들 때문이라고 한 모양입니다. 김포사 자체를 맡은 것 자체에 불만을 가졌다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그의 도주는 레드 컴플렉스로 봐야겠죠. 그냥 반공 수준이 아니라 이 나라 전체가 이미 빨갱이로 뒤덮혔고, 전쟁 이전에 자기가 그 빨갱이에게 죽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한 공포요.

어느 쪽이든 옹호할 건덕지가 없습니다. 헌데 그는 멀쩡히 살다가 미국으로 가서 역시 잘 살았습니다. 뜬금 없이 인천상륙작전 때 공을 세우기도 했죠. 군에서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파악 못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죠. 그는 켈로 부대로 갔거든요. 미군이 만든, 한국인들로 구성된 첩보 부대요. 켈로 부대의 아는 사람이 미군에 부탁해 사형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를 빼돌린 것이었습니다. 국군에서는 그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던 것도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가 빨갱이라고 욕 했던 김포사의 장교들은 많은 이들이 전사했고, 패배를 부끄러워 해 자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폭풍에서 다뤘듯 그들은 한강 이남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을 막아냈죠. 이런 사람이 회고록까지 내면서 맥아더와의 관계를 자랑했구요.

그 외에 유명한 것이 7연대 2대대의 0중대장 H 대위가 있습니다. 누군지는 못 알아내겠더군요. 그 춘천으로 가는 혈전 속에서 그는 가장 먼저 춘천으로 도주합니다. 여기에 트럭을 불법으로 빼돌려 쌀 60가마를 비롯한 재산을 챙겨서 부산으로 도망갔죠. 이후 7연대의 부상병들이 있던 병원에 그가 나타났고, 임부택이 이걸 알게 되면서 체포령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체포대가 그 집에서 밥을 대접 받는 동안 사라져 버렸죠. 다음 날 찾아가 보니 갑자기 맹장 수술을 했답니다. 군의관을 매수해 멀쩡한 배를 가른 거죠. 열 받긴 했지만 그에게 신경쓰기 어려웠던 시절, 어느순간 그를 찾아 보니 이미 타부대로 전출간 상태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유흥업을 하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돈이 제법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체포대를 매수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죠. 더 웃긴 건...

이 인간이 장군 진급까지 갔다는 것이죠. 다행히 누가 심사원에게 그 일을 제보했고, 그는 욕만 죽어라 먹은 후 쫓겨납니다.

그 외에 포천을 맡았던 7사단 9연대 2대대장 김XX 소령(이름은 모르겠고 공식 전사에는 쪽팔렸는지 아마도 후임자인 사람을 넣어놨습니다)은 휘하 병사들이 주저항선을 점령하는 동안 혼자 의정부로 도망갔으며,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_-; 그리고 이형근의 동생 이상근은 개전부터 세 차례의 도주를 감행, 29일에도 배가 아프다며 후방으로 튀었죠. 7월 중순에 지뢰 밟고 죽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군 수뇌부는 "니가 빨갱이지?"라고 서로를 욕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뭐 7월 초의 기록입니다만, 육본에 들린 미군의 증언이더군요. 원문이 어디갔나 모르겠네요. 다만 거기서 나온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참모부장 김백일 -_-; 잘들 하는 짓거립니다.

많은 이가 전사하거나 돌아오지 못 했고, 도망간 이도 있으며, 왔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무장도 없고 편제도 엉망이었던 그 때, 김홍일은 이런 국군을 재편해야 했습니다. 일단 단 하루라도 적이 한강을 넘지 못 하게 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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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아군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길은 한강을 방어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선배님께서 한강 방어의 대임을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28일 정오, 수원의 육본에서 채병덕은 눈물을 흘리며 김홍일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이건 무슨 이순신 장군에게 내 탓이오 하던 선조와 다를 게 뭐랍니까. 하지만 김홍일은 그걸 따릅니다.

"총장님, 그 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소관이 신명을 바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군이 다리를 건너 오는 것이었습니다. 한강교를 폭파해놓고 왠 다리인가 하겠는데........... 경인상행선과 경부복선 두 철교가 폭파되지 않았던 것이죠. -_-;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북한군이 강 건너편에 온 상태였습니다. 이후 미 공군에 의해 경인상행선은 폭파됐지만 경부복선은 끝까지 폭파되지 않았죠.

이미 많은 병력이 흩어진 상황, 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더 빨리 한강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때문에 시흥에서 병력을 수습, 500명이 채워지면 바로 혼성 x 대대로 명명하고 투입하는 식이었죠.


가장 우선권은 7사단, 7사단은 혼성 7개 대대로 적의 주공으로 예상되는 노량진-영등포의 강변을 맡고 동작-노량진에 있는 고지대를 확보하게 합니다. 사단장은 여전히 유재흥이었습니다.


이 때 7사단은 참 자랑스럽던 군기를 북한군에게 뺏깁니다. 조선시대의 군기를 찾아내서 그걸 사단마크로 쓴 정말 유서 깊은 군기였는데 말이죠.


이 때문에 현재의 사단마크가 나온 것이죠.


한편 수도사단에는 혼성 3개 대대가 주어집니다. 여기에 장갑대대 1개와 대전차포 2개 소대도 주어졌죠. 이들이 맡은 임무는 영등포 정면, 그리고 여의도였습니다.


그리고 2사단은 3개 대대로 신사 일대의 방어를 맡게 됩니다.


또한 계속 후퇴하고 있었던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5개 대대로 증원돼 빼앗긴 김포비행장을 탈환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죠.


마지막으로 광나루 쪽으로 육사 생도들이 또 -_-; 투입됩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입지 않고 재편된 3사단에 맡기고 후방으로 빠집니다만.

http://www.army.mil.kr/history/참고/그림/한강.html

그 동안 그래도 많이 넘어 온 1사단은 예비대로 시흥에서 대기했고, 백선엽은 김포사 사령관을 제의받지만 1사단을 계속 맡고 싶다고 거절합니다. 정작 1사단의 장교들은 나중에 김석원이 복귀하자 거기로 가 버립니다만 = =a

문제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일단 병력, 대대니 연대니 하는데 한 개 연대가 한 개 대대 병력도 안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연대라는 말 뺐어요 -_-;) 때문에 적이 도하할만한 다리와 나루터 주변에만 병력을 집중 배치했고, 그래도 부족했죠. 그리고 부대간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위에 이렇게 배치됐다고 했지만 김홍일이 직접 파악할 수 있었던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화력 역시 결정적이었습니다. 박격포 한두문이라도 있었으면 다행일 수준이었죠. 대부분의 물자는 한강에 버리고 왔으니까요. 그야말로 맨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혼성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모르는 부대에 편성된 병사들은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 익숙치 않은 장교들 역시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 했죠.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이들로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 진정한 적도 시간이었습니다. 하루라도 더 버텨내야 국군이 조금이라도 더 안정될 수 있었고, 미군의 증원이 올 것이었죠.

처치 준장이 요구한 것은 3일이었습니다. 29일 맥아더가 와서 육군 투입을 결정한 후 7월 1일에 2개 대대가 선봉으로 수원 비행장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이게 유일한 희망이었죠.

국군은 이렇게 버티기만 하면 미군이 올 것이고 그럼 살았다고 생각했고,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도 자기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북한군이 어마 무섭다 하면서 도망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절망으로 바뀌죠.
그래도 그 안에 남은 희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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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레브
12/07/18 09:06
수정 아이콘
기대가 현실이 되는 전투 전쟁은 별로 없는듯 음
잘읽었어요 :)

ps 초반부에 '하에선느' 오타용~
blue wave
12/07/18 09:32
수정 아이콘
알고 있는 결말이지만 두근두근 기대가 됩니다. 어떤 변수가 발생해서 결국 버틸 수 있게 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저의 마음은 벌써 낙동강 전선에 가 있네요.
12/07/18 09:32
수정 아이콘
연재 속도가 늘어질까 걱정했는데, 빨리 올려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12/07/18 10:05
수정 아이콘
이... 씨..... 보도연맹 불쌍해서 어쩐대요..... ㅠㅠ
군인동거인
12/07/18 10:09
수정 아이콘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12/07/18 10:45
수정 아이콘
적이 점점 집 근처로 오고 있군요.... -_-;;;;
눈시BBver.2
12/07/18 11:41
수정 아이콘
저희 집은 이미 학교 뒷산에서 전투 벌어지고 점령됐으요 ㅠ
고향 집은 마지막까지 안전해요 ^0^)
권유리
12/07/18 13:01
수정 아이콘
글 잘보고있습니다 . ^ ^
그리메
12/07/18 13:21
수정 아이콘
이제 스미스 대대 출동할 시간이 다가오네요. 그거 하나면 전면전 벌인 애들이 물러날줄 알았던 미국의 오판도 컸죠. 무슨 16세기 스페인 1개 기병대에 나라 망한 잉카제국도 아니구요.
12/07/18 14:26
수정 아이콘
조금 있으면 개인적으로 한국전쟁 최고의 수훈갑이라 평하는 워커의 눈물겨운 사투가 시작되겠군요.
영원한초보
12/07/18 17:49
수정 아이콘
현실적인 드라마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영웅만들기 드라마 말고요.
도망치다가 죽거나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 이야기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찬밥신세를 받는 이야기
Je ne sais quoi
12/07/18 22:12
수정 아이콘
제목은 희망과 절망인데 시작이라 그런지 희망은 없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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