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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0/26 16:12:47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5) 폐가입진,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1. 전 그냥 역사글만 쓸게요 휴 orz;
2. 오늘 꼭! 투표사셨죠? ^^
3. 시험 끝나니까 무슨 서양 제국주의 발표군요 -_-; 취직전선은 빨간불인데 이거;;
4. 늦었지만 이전 글 댓글 달았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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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가면 반드시 싸울 터이니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
"백성의 오이 한 개라도 빼앗으면 역시 죄를 받을 것이다"
이렇게 이성계는 행여 백성들이 동요될까 저어하며 사냥을 하며 아주 천천히 군율을 지키며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 9일만에요. -_-; 이전 글 마지막에서 다뤘지만 이 정도면 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왔다고 봐도 될 겁니다.
그리고... 최영 과 다시 만나게 되죠. 이제는 적이 된 옛 동지와...
1. 황금을 보기를...
이성계의 회군 소식을 들은 우왕과 최영 은 급히 개경으로 돌아와서 병력을 소집합니다. 하지만 그 수는 얼마 안 됐다고 하죠. 하지만 최영 은 그것만으로 이성계의 대군과 싸우려 했습니다.
6월 1일. 이성계는 개성 근처에서 진을 친 후 최영 을 요구합니다. 요동으로 향했을 때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이 때 최영 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이성계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상상하기 힘드네요. 다만 우왕의 모습은 새롭죠.
"그러나 군신의 대의는 실상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경이 글 읽기를 좋아하니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리오."
"하물며 또 강토는 조종에게서 받았으니 어찌 쉽게 남(명 나라)에게 줄 수 있는가."
"비록 최영 을 지목하여 핑계하였지만 영이 내 몸을 호위하는 것은 경들이 아는 것이요, 우리 왕실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 역시 경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냥 최영 에게 끌려다닌 어린 왕이었다면 이런 말을 쉽게 하지는 못 했겠죠. 고려사는 이 시기 우왕의 비행에 대해 이리저리 적고 있지만, 그가 이 때도 이랬다면 쉽게 하지는 못 할 말이었습니다. 요동 정벌은 우왕이 확고한 자신의 의지로 했다고 봐야겠죠.
이 때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동북면의 여진족 등이 "이성계의 소식을 듣고 앞다투어" 왔고, 백성들과 대신들은 우왕을 버리고 이성계를 반겼다고 하죠. 뭐 그렇다 칩시다. 우왕과 최영 은 곡식과 보물을 풀어 최대한 맞설 병력을 만들고, 이성계를 기다렸죠.
이틀 후,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됩니다. 이성계는 부하 유만수를 보내고 조민수 역시 다른 곳을 쳤는데, 최영 은 소수의 병력으로 모두 물리칩니다. 노장의 마지막 활약이었고, 그가 지켜야 하는 건 우왕 뿐만이 아니라 고려라는 나라 자체였습니다.
+) 이 때 이성계는 지가 보내 놓고 "유만수 질 거다"면서 태평했고, 자기 화살 솜씨를 보여주며 정신승리를 시전했습니다. (...)
하지만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습니다. 최영 은 울며 말리는 우왕을 뿌리치고 스스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시 만난 두 명장... 이성계는 울면서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변이 나의 본심은 아니오. 그러나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
이 말에 최영 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고려사에서는 이 말을 넣고 있죠.
이인임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성계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영이 듣고 매우 노하였으나 감히 말은 못하였다. 이 때가 되어 탄식하기를,
"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다"
이후 최영 은 계속 장소를 옮겨 유배됩니다. 쉽게 죽일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살려둘 수도 없었죠.
최영 이 죽던 날, 고려사는 많은 부분을 최영 을 칭찬하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의 단점을 적기는 했지만 정말 적죠. 걸리긴 했는지 "공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를 덮었다"는 식의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요.
최영 역시 한계가 있었고 단점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장군은 한국사에 쉽게 찾아볼 수 없죠. 그가 죽던 날의 기록입니다.
" 형에 임하여 말과 얼굴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죽던 날에 도성 사람들이 저자를 파하고, 말을 전해들은 자와 거리의 아이와 골목의 부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시신이 길 옆에 있으니 길가는 자가 말에서 내렸다."
예전 후삼국 이야기를 쓰며 많은 도움을 주셨던 길공구님께 몇 가지 여쭤 보았는데, 이인임을 공민왕의 고명대신, 즉 공민왕의 뜻을 이어받은 것으로 평가하시더군요. 안정복 등 후대 역사서를 쓴 이들이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의문을 가졌고, 결국 "태조께서 어쩔 수 없어서"라는 말로 돌려서 썼다고 합니다. 뭔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더 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인임, 최영 . 고려의 보수파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하나씩 죽어 나갑니다. 사실상 이 때 고려는 마지막 숨을 들이쉬었다고 봐야겠죠. 하지만, 그래도 끝은 아니었습니다. 필사적으로 고려를 지키려는 무리는 남아 있었거든요.
아무튼... 고려의 마지막 두 명장, 최영 과 이성계. 그들은 이렇게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요.
2. 조민수의 역습
회군 당시 이성계는 조민수와 "다른 왕씨를 세우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일단 이성계에게 울면서 "님 없으면 어쩜"이라고 했던 인물 조민수, 하지만 그 역시 만만한 건 아니었죠.
최영 이 귀양간 후, 우왕은 이판사판이다 생각했는지 80명 정도의 병력으로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을 습격합니다. 하지만... 없죠. -_-; 마침 그 둘은 집에 있지 않았고, 그게 알려지자 이성계는 우왕을 축출하기에 이릅니다.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우왕이 강화도로 유배가면서 남긴 말입니다. 그의 측근들은 엎드려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헌데... 이 때 뜬금 없는 일이 일어나니...
대신 왕이 누가 될 것인가... 이 때 조민수는 급히 이색에게 달려가죠. 이색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당연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그래도 신진사대부의 뿌리였던 이색, 조민수는 그를 업고 우왕의 아들 창왕을 세웁니다. 몇 가지 가설이 나올 수 있습니다. 힘에 밀리긴 했지만 이성계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는, 좀 좋게 보는 입장, 이성계가 이인임파인 자기를 그냥 둘 리 없으니 반격해야 된다는 것, 아니면 그냥 자기도 권신이 돼 보고 싶었던 것 등등이죠. 이색 입장에서 역시 꼭 필요한 동맹이었습니다.
이성계파는 한 방 먹었지만, 최영 까지 죽여서 인심이 나빠진 상황에서 성급히 일을 벌일 수 없었습니다. 만약 위화도 회군이 우연이었고 이 때까지는 고려 자체를 엎을 생각이 없었다면, 이 때쯤 그런 마음을 먹었겠죠. 이성계파가 이 때부터 토지 개혁에 박차를 가하거든요.
조민수가 창왕을 옹립할 무렵, 이성계는 여론을 느꼈는지 한 차례 사직을 청합니다. -_-; 하지만 그 때 이성계가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죠.
그 후... 정도전, 조준 등은 이성계를 등에 업고 과전법을 밀어붙입니다.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며, 관리들은 녹봉만 받아 먹고 살게 된 것이죠. 허나 반대에 부닥치게 되고, 조준이 좀 수위를 낮춰서 다시 제안하지만 역시 어려웠습니다. 이에 신진사대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죠. 반대하는 이들을 몰아붙인 겁니다. 위화도 회군이 우연이었다면, 나라를 뒤엎을 생각을 확실히 한 게 이 때부터였을 겁니다.
조민수는 이 때 토지 개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단 명분상으로는 권문세족이 했던 것처럼 남의 땅을 빼앗으려 했다는 것 때문에 쫓겨납니다. 위화도 해군 다음 해 12월, 그의 권세는 1년이 조금 넘은 수준이었죠. 우왕이 무너지고 조민수가 무너지고... 남은 창왕과 이색은 위기에 처하게 됐죠.
창왕이 옹립될 무렵, 이색은 그를 지키려 한 바탕 도박을 합니다. 명나라에 창왕을 직접 데리고 가서 승인을 받으려 한 거죠. 명나라가 창왕을 확실히 인정한 상황이 되면 이성계조차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 할 거라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헌데...
orz 대비가 그걸 막았죠. 안 그래도 고려에 이런저런 협박을 가하던 주원장에게 창왕을 데려 가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미 간다고 말까지 해 놓은 상황, 그렇다고 자기 혼자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릅니다. 이색은 또 한 번 도박을 벌였죠. 이성계에게 직접 명나라까지 가기를 요청한 겁니다. 이성계는 대신 아들 이방원(!)을 보내는 걸로 합의 보죠.
이성계가 놀랐을지, 그냥 재밌게 봤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참으로 깡다구 있는(강개한 (...)) 늙은이로다"
고려사에서나 실록에서나 이 때 이색이 좋은 대접을 못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중국어 실력이 별로 안 좋아서 주원장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 했고, 말이 이래저래 엇갈렸다고 하죠. 거기다 최영 이 죄를 지었고 이성계가 그를 죽였다고 이성계 칭찬만 했구요. 이색은 돌아와서 이렇게 말 합니다.
"지금 이 황제는 마음에 주장이 없는 임금이다. 내 생각에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을 것이라 여겼으나, 황제는 묻지 아니하고, 황제의 묻는 것은 모두 내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조는 모두 이색을 놀리는 건데, 어쨌든 그가 명에서 좋은 꼴 못 본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명나라 역시 이성계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명망 높은 신진사대부의 뿌리, 조민수가 쫓겨난 후에도 계속 정승으로 임명되면서 나름 자리는 있었지만... 그게 온전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었죠. 그의 제자들 역시 그와 척을 졌다고 봐야 될 겁니다. 그는 토지 개혁에도 반대했고, 권문세족 및 불교와 어울려 지냈으며, 이인임 미에서 부귀를 노렸고, 신돈의 손자 창왕을 왕위에 올렸으니까요. 아직까지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예. 아직까지는요.
+) 한편 정몽주는 사이에서 찬반 어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수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는 외로웠습니다. 버티는 데 한계는 있었고, 그 끝이 다가오고 있었죠.
3. 폐가입진
최영 의 친척, 김저와 정득후는 어느 날 강화도에 있는 우왕을 찾아갔습니다. 우왕은 울며 말했다고 하죠.
"답답하게 이곳에 있으면서 손을 묶고 앉아 죽음을 받을 수는 없다. 역사 한 사람만 얻어 이성계만 해친다면 내 뜻은 성취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예의 판서 곽충보를 좋아하였으니 네가 가서 보고 이 일을 도모하라"
이성계 암살 계획의 시작이었죠. 그 둘은 우왕의 말대로 곽충보를 찾아갔지만, 그는 곧바로 이성계에게 고변합니다. 그 둘은 곽충보만 믿고 이성계의 집으로 가지만 함정에 걸렸고, 정득후는 자살, 김저는 옥에 갇힙니다. 이어 무시무시한 사실이 밝혀지죠.
우현보, 변안렬, 왕안덕, 우홍수 등 아직 남은 구세력과 어린 창왕까지 이 일에 모두 가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직후 김저는 죽습니다. 자...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요? 우왕과 이 둘까지는 그럴 듯 하다 하겠습니다만, 이들 모두가 가담했다면 저렇게 쉽게 잡히지 않았겠죠. 개혁 혹은 역성혁명에 반대되는 모든 이들을 한꺼번에 엮었다고 볼 수 밖에요.
무언가 결심을 하게 된 이성계. 그는 다른 중신들과 함께 흥국사에 모입니다.
이성계 . 정도전 . 조준. 심덕부 . 지용기 . 설장수 . 성석린 . 박위 . 그리고... 정몽주.
"우와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니 종사를 받들게 할 수 없으며, 또 천자의 명도 있으니 마땅히 가왕을 폐위시키고 진왕을 세워야 될 것이다. 정창군 요는 신종의 7대손으로 그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이 때부터 나온 것이 바로 "왕씨가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준이 잠시 딴지를 걸죠.
"정창군은 부귀한 집에서 나고 자라서 자기의 재산을 다스릴 줄만 알고 나라를 다스릴 줄은 알지 못하므로 왕으로 세울 수 없다"
이에 성석린이 반박합니다.
"임금을 세우는 데는 마땅히 어진이를 가려야 될 것이고, 그 족속이 가까운지 먼지는 논할 필요가 없다"
해석하면 "그러니까 정창군으로 해야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비를 뽑았다고는 하는데 뭐 나름 공정한 투표였나 봅니다. 당연히 정창군이 나왔죠.
이 일을 폐가 입진,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홉 명을 흥국사 9 공신이라고 칭했죠.
정창군은 이 때 45세. 왕이 될 거라 생각도 못 하고 나름 부족함 없이 잘 살아 온 왕족이었습니다. 그에게 크나큰 대임이 주어졌죠. 안정되게 나라를 그대로 이성계에 넘기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평생을 한가로이 놀고 있었는데 오늘날에 이 자리를 얻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경은 나를 도와 달라"
그의 취임사였습니다. 근데 이 말을... 이색에게 했죠.
모든 것은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토지 개혁도, 그 뒤의 일도 마찬가지였죠. 새로 세운 왕은 무기력해 보였고, 그를 도울 자도 없었습니다. 이색에게 기댈 모양인데 그의 목숨 역시 신진사대부가 쥐고 있었죠.
하지만... 그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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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에서 공양왕이 즉위하는 모습이군요.
다음 편에 나와야 될 것 같지만 뭔가 애매해서 우왕과 창왕이 죽는 장면도 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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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날에 이런 거 쓰니 뭔가 착잡하네요. 얼마 안 된 옛날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탄핵했던 충격적인 일이 떠오릅니다. 뭐 어찌 보면 민주주의의 발전일가요? 글쎄요...
꼭 투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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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