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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7/19 1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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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중세 봉건제는 없다?

Breviarium_Grimani_-_März.jpg 중세 봉건제는 없다?



1. 고전적 의미의 봉건제(Feudalism), 혹은 봉건 체제(feudal system)는 흔히 9세기에서 15세기 사이의 서양 중세 시대를 지배했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법적 관습들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표현이다. 



 협의의 봉건제는 쌍무적 계약관계를 핵심적 개념으로 한다. 



Codex_Manesse_Reinmar_von_Zweter.jpg 중세 봉건제는 없다?


 즉, 영주는 신하에게 봉토(Fief)를 하사해 봉신(Vassal)으로 삼고, 그 대가로 그에게 군사적 원조나 여러 법률적 조언 등과 같은 서비스들을 제공받을 권한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더 넓은 의미의 봉건제, 혹은 봉건 사회(feudal society)는 '중세의 삼신분'이 갖는 모든 각자의 의무와 그것들이 강하게 결부되어 있는 '장원제(Manorialism)'라는 경제적 토대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서, 꼭 서유럽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근대 농경 사회 전반의 정치 사회적 특징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Map_France_1477-en.svg.png 중세 봉건제는 없다?



2. 중세 시대를 정의할만한 가장 큰 특징, 공통점이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방 분권화, 즉 정치적 분절이었다. 


 중세시대의 통치자들은 말 그대로 오늘날 조직폭력배 집단의 수장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운송 및 교통의 불편함과 공통어의 부재는 통치자와 그의 대리인 및 지역 유지들 사이에 상당한 거리감을 낳았다. 


 지역의 대표자들은 곧 그 지역에서 왕과 같이 군림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사적인 재판권이 있었으며 설령 왕이라도 그의 영지에 들어온다면, 그를 존중해야만했다. 


 교회는 오랫동안 야만적인 세속영주가 그들의 토지에 발을 들이는 것을 역겨워했다. 


 통치자는 지역 대표자를 압도할만한 군사력을 원격으로 투사할 수 있었기에 존중받았지만, 당대의 지리한 공성전은 공격자에게 가망없는 출혈을 강요했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Bayeux_Tapestry_scene23_Harold_sacramentum_fecit_Willelmo_duci.jpg 중세 봉건제는 없다?



3. 오늘날의 조폭처럼, 중세시대의 통치계급을 관통하는 원리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늘상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야만했다. 


 귀족의 자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왕궁의 질자로 보내져 인질 생활을 해야했고, 또 그곳에서 자연스레 귀족의 생활과 문화, 언어와 인간관계를 습득할 수 있었다. 


BNF_Fr_4274_8v_knight_detail.jpg 중세 봉건제는 없다?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각종 맹세나 충성 서약 등 종교적인 의례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귀족들은 고대의 영웅들처럼 명예로운 삶을 살 것이 요구되었다. 



Hommage_du_comté_de_Clermont-en-Beauvaisis.png 중세 봉건제는 없다?



4. 주군과 봉신이 토지나 군사적 봉사 등을 매개로 하여 확실한 계약관계로 묶여있었다는 종래의 대전제는 최근 상당히 의심받고 있으며, 아예 봉건제라는 개념을 해체해야한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봉건제는 로마 제국의 효율적인 조세 제도와 그를 활용한 대규모 유급 군대의 유지와 대비되는 새로운 경향으로서의 중세 군대, 즉 응집력 약한 용병부대나 통치자 개인에게 군사적 의무를 갖고 있는 일군의 종사들로 이루어진 임시적 군대들을 통한 전쟁 수행 방식을 설명하는 용어로서 여전히 쓰일 수 있다. 






Madness_of_Charles_VI.jpg 중세 봉건제는 없다?


5. 첫번째 일천년기 이래 이루어진 각종 군사 혁신 등으로 중세의 전장을 새롭게 지배하게 된 복잡하고 거대한 규모의 기병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세금을 중앙에서 거둬야만 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벌어진 도시의 쇠퇴와 복잡한 관료집단의 결여, 그리고 그로 인한 심각한 조세 비효율은 당대의 지배자들이 간단한 편법을 통해 대규모 기병대를 확충할 수 있는 유혹에 빠지도록 유도했다. 


 중세의 그러한 새로운 경향이 곧 정치의 파편화, 즉 대규모 기병대 확충을 위한 인간관계에의 의존으로 흘러갔다면, 봉건제는 여전히 이러한 경향을 설명하는 하나의 틀로서 유효하다. 




3447px-Autor_nieznany_(malarz_z_kręgu_Lukasa_Cranacha_Starszego),_Bitwa_pod_Orszą.jpg 중세 봉건제는 없다?


 결언: 간단히 말하자면, 중세의 통치자들은 꼿꼿하고 시끄러운 관료 집단을 오랜 투자를 통해 육성해 세금을 걷은 다음 그 돈으로 다시 말을 키우고 군사들에게 급료를 주는 지난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느니, 그저 믿을 만한 몇몇 사람에게 땅을 나눠주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직접 기마병 육성하도록 유도해, 비상 시에 소집하는 편리한 방식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외관상으로는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식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훨씬 미묘하고 불안한 방식이기도 했다. 


 지방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지역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도의 중앙 통치자에게 훨씬 더 쉽게 반기를 들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권력은 관료집단의 목줄을 쥔 자가 아니라 토지를 지배하는 자의 것이 되었다.




(3. '명예와 신앙으로 다스려지는 땅, 중세'에서 계속)





참고문헌:

Reynolds, Susan. Fiefs and vassals: the medieval evidence reinterpreted. OUP Oxford, 1994.

Fried, Johannes. The Middle Ages.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Wickham, Chris. Medieval Europe. Yale University Press, 2016.


세부적인 내용은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시리즈나 Cambridge Medieval Textbooks 시리즈의 책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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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9 20:17
수정 아이콘
이런 글을 보면 항상 크킹이 땡긴다 이 말입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5/07/19 20:39
수정 아이콘
마차와 와인과 테라스가 땡기...응?
미드웨이
25/07/19 23:04
수정 아이콘
편의에 따라 분류를 하는거고 그 분류의 이름이 대중의 편의에 맞으면 되는거죠. 역사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게 다 그런거고 매니아들의 의견을 대중이 반영해줄 리도 없고 그래야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되는건 대중이 아니라 매니아들이 그 편의적인 분류를 비판하는게 아니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상한 경우인데 "중세"는 여기 해당은 안되는거 같아요. 이런 글은 오히려 너무 많이 본 느낌.
25/07/20 02:30
수정 아이콘
제가 본문의 어느 부분에서 대중이 매니아들의 의견을 반영해야한다고 했나요? 저는 제가 공부한 내용을 다른 분들에게도 공유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갖습니다. 제 글에 달린 비판적인 댓글들도 웬만하면 굳이 반박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분들을 훈계하려는 글이 아니니 안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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