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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12/23 23:47:07
Name meson
Subject [일반] 한국-민족-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소고 (수정됨)
※예전에 썼던 글(https://pgr21.com/freedom/101567)에서 상당 부분 이어지는 글입니다.

근대민족과 전근대민족

오늘날 민족(Nation)과 종족(Ethnic group)을 구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종족은 민족에 선행하고 민족보다 훨씬 수월하게 그 실재성을 인정받는다. 왜냐하면 유사 이래로 인류가 인간집단을 분류하고 구획한 기록이 무수히 많으며, 그 기준들 중 언어·신화·물질문화 등을 비롯한 몇몇은 객관적이라고 인정될 수 있을 만큼 명확하기 때문이다. 물론 종족을 분류할 때 쓰이는 기준들이 언제나 동일했던 것은 아니며 분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해당 종족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종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는 어디서나 존재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존재해왔다.

민족은 이러한 종족을 전제한 뒤에야 비로소 정립될 수 있는 개념이다. 종족은 대개의 용례에서 혈연적이거나 문화적인 의미로 쓰이며 얼마간 비정치적이다. 반면에 민족은 종족 공동체가 [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고 지향할 때 ] 비로소 탄생한다. 그 정치적 입장이란 자신들의 공통성을 의식하고 집단의 자율성·통합성·정체성을 옹호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런 입장은 흔히 자결권이나 주권의 추구와 등치되기도 하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가트(Azar Gat)가 종족과 민족 사이에 인족(People)을 설정하고 정체성·역사·운명에 대한 공동체 의식을 그 기준으로 제시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종족이 자신들이 종족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에 기반한 공동체 의식을 가진다면 그들은 종족인 동시에 인족이다. 또 어떤 인족이 공동체 의식에 기반해 정치적 자결권을 주장하고 단결을 추구하며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한다면 그들은 인족인 동시에 민족이다. 비록 민족주의의 지향점과는 달리 모든 민족이 저마다의 국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모든 국가에는 민족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한 국가는 복수의 종족들로 구성되며, 어떤 경우에는 복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 내에서 주권을 장악하고자 각축하기도 한다.

물론 개념의 정의는 어떤 방식으로든 가능하므로 반드시 위와 같은 관점이 민족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라고는 할 수 없다. 예컨대 민족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측에서는 평등한 시민권과 대중 주권이 민족의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가 수많은 민족을 응집시키고 민족주의를 유행시킨 것과는 별개로, 앞 문단에서 제시한 기준들이 [ 전근대 사회에서도 충족될 수 있다 ] 는 것은 역사적으로 수차례 입증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의 민족이 이전보다 훨씬 본격적이었고 뚜렷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면, 그것은 '근대민족'과 '전근대민족'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전근대민족

선언적으로 말하자면 동아시아 역사상의 한국(Korea)에는 전근대민족이 있었다. 민족 탄생의 시대적 상한선은 상고할 수 없으나, 하한선은 임진왜란 이후로는 결코 내려가지 않으며 대체로 여몽전쟁 시기가 지목된다. 사실 한민족의 성립이 아니라 그 이전의 분리주의 운동까지 고려한다면 고대의 삼국에도 저마다 민족이 존재하였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종족이 객관적 분류에 가까운 반면 민족은 주관적 인식에 의해 성립되므로 제한적인 사료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 전근대에는 군주에 대한 충성이 민족을 위한 희생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으며, ] 이러한 착종은 근대민족과 전근대민족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사에서 종족과 국가의 결합이 뚜렷하게 간취된다는 점이다. 한국 종족(Ethnic Koreans)의 조상은 크게 북방의 예맥과 남방의 삼한으로 나뉘지만, 7세기와 10세기에 있었던 두 번의 통일 운동을 거치며 예맥의 상당 부분이 삼한에 흡수되었다. 이 작업이 완료된 고려시대에 삼한과 예맥은 융합된 것으로 여겨졌고 한국 종족의 공통된 선조로 인정받았다. 그 이후의 한국에서 정치적 주권은 약 1천 년 동안 한국 종족에게 있었다. 중국사나 베트남사에 이민족이 정치적 주권을 차지한 시기가 존재하는 것과 달리, 전근대 한국에는 [ 언제나 하나의 민족만이 존재했고 ] 그 민족이 인구의 절대 다수였다.

한국 민족(Korean Nation)의 존재를 대세론적으로 논증하는 접근이 팽배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한국의 역사적 궤적 때문이다. 백년전쟁이나 후스 전쟁의 유명한 사례에서 보이듯이, 정치적 자결권을 위한 대중적 투쟁은 가장 뚜렷한 전근대민족의 증거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중국인들이 북방 유목민의 지배에 저항했던 것에서, 또 베트남인들이 중국인의 지배에 항거했던 점에서 그들이 전근대민족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고려나 조선처럼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종족적으로 구분되지 않은 국가에서는 종족성이 국내정치의 주요 변수가 아니었고, 그래서 민족의 존재 역시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지리적 격절로 말미암은 상대적 평온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지배하려는 외세의 공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1세기에 거란이, 13세기에 몽골이, 16세기에 일본이, 17세기에 만주가 한국을 침공했으며 이들 모두는 한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 네 번의 큰 전쟁에서 한국은 늘 강렬한 민족의식을 드러내며 항전 의지를 고취하고 상대를 타자화했다. 당연히 그 당시에 주관을 표출하고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대부분 지배층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대규모 전쟁에 동원되고 때로는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기층민들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 민족의식의 작용 ] 을 하나의 동인으로 놓아야 한다.


민족적 가시성과 문화적 보편성

흥미로운 점은 한국 민족이 종족적·정치적으로는 뚜렷하게 식별되지만, 문물이나 제도 측면에서는 그 고유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문화는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전통문화의 일부이며 중국·일본·베트남과 유사성을 보인다. 공유문화가 존재하는 것 자체는 어떤 문화권에서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요점은 [ 다른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층위(Layer)를 한국문화 내에서는 찾을 수 없다 ] 는 데 있다. 예컨대 유교·불교·한자는 동아시아의 공유문화이며 일본은 여기에 신토와 봉건제를,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공유문화를, 중국은 도교와 유협문화를 중첩함으로써 자국의 전통상을 확립했으나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에 한국 민족은 문물과 인종으로는 다른 동아시아와 거의 구분되지 않으며, [ 오직 언어에 의해서만 구별된다. ] 물론 언어는 문화의 중추이며 가장 일반적인 종족 구분의 지표이다. 그러나 언어가 민족 정체성에서 가지는 커다란 지분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족이 의지하는 공동체의식과 단결의 근거가 다소 협소해 보인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언어는 무척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매개체이며, 그 내용과 대상이 될 만한 한국 민족의 유산과 문물은 한국사를 걷어내면 대개 공유문화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 서술의 난관으로 꼽히는 민족주의 정서의 영향력은 상당 부분 이러한 사정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당연히 한국 민족이 상징으로 삼을 만한 문화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식이나 한복으로 대표되는 생활문화는 대체로 고유한 습속을 반영했다고 인정되며, 판소리와 남사당놀이를 비롯한 공연예술은 한국적인 것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중요한 전통 중 하나이다. 문제는 [ 이러한 요소들이 전부 뿌리보다는 가지에 해당하며, ] 전통문화의 중심축으로 파악될 만한 고유한 사상체계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무교(巫敎)는 만신전조차 확립하지 못했을 만큼 미발달했고, 풍류도(風流道)는 실재성 자체가 의심스러우며, 동학(東學) 이후의 소위 민족종교들은 그 역사가 소략하다. 그리고 그 외의 전통사상들은 모두 공유문화에 속한다.

그러므로 외국인의 눈에 비추어 본다면, 동아시아의 공유문화에 더해 신토나 봉건제가 강조되는 전통상은 일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동아시아의 공유문화에 동남아시아의 공유문화가 융합된 전통상은 베트남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공유문화에 더해 도교나 유협문화가 강조되는 전통상은 중국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상에 이르러서는, 동아시아의 공유문화에 고유하게 중첩할 만한 층위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한국의 전통문화콘텐츠가 그동안 한국사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 그렇게 해야만이 그 콘텐츠를 한국적이라고 부를 수 있었기 때문 ] 인 것이다.


한국민족의 문화특성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한국 민족에게 고유한 사상체계가 부재한다고 주장하기는 성급하다. 흥(興)이나 한(恨)에 대한 해묵은 갑론을박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집단은 나름의 정신문화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두드러지는 면모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을 포착하는 한편 환경적 조건으로 원인을 규명하고 역사적 궤적을 사례로 삼는다면 한 민족의 사고방식을 조형하는 사상을 통찰하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지형과 기후가 이론을 도출한다면 역사와 사회는 근거를 제공하며, 전자가 총론을 맡는다면 후자는 각론에 해당한다.

지리적으로 고찰한다면 한국사는 한반도와 남만주를 주요 무대로 삼았다. 이 공간은 서북쪽으로 초원에 닿으며 동북쪽은 반농반목이 요구되는 동토를 만나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중국이 있으며 동남쪽 바다 너머로는 일본을 마주하는 농경민족의 땅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일본처럼 분권화되기에는 초원에 너무 가까웠고 베트남처럼 중국을 경계하기에는 중원과 격절되어 있었다. 이것이 곧 한국이 중국을 통해 동아시아의 공유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런 조건에서 한국은 [ 중국이 분열되었을 때는 외부로 힘을 투사해 소천하를 구축했고 중국이 통일되었을 때는 내부로 힘을 투사해 보편문명을 이룩했다. ]

고구려와 고려가 소천하를 구축한 사례라면 신라와 조선은 보편문명을 이룩한 사례이다. 고구려는 동북쪽으로 말갈을 복속시키고 서북쪽으로 초원을 견제했으며 서해 건너로는 중국과 교류했다. 그러나 중국이 통일되자 전쟁 없이는 소천하를 유지할 수 없었고 결국 멸망했다. 반면에 신라는 삼한일통 이후 불교 진흥에 주력했고 국제적으로 영향을 미친 승려들이 많이 나왔다. 고려는 다시 동북쪽으로 여진을 복속시키고 서북쪽으로 거란을 견제했으며 서해 건너로는 중국과 교류했다. 그러나 여진의 통일을 저지하지 못했고 여몽전쟁 이후로는 소천하가 완전히 소멸하였다. 이후 조선은 유교 진흥에 주력했고 그 수준이 중국과 대등했다.

이러한 조망은 그동안 한국전통문화에 대해 제기된 한탄들, 예컨대 토풍이 화풍으로 너무 많이 대체된데다 국가별로 문화와 지향점이 제각각이었다는 인식을 확인해준다. 하지만 정신문화의 기저에서 예의 변화들을 가능하게 한 어떤 특성이 있음을 전제한다면 그것만은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지적되었듯이 그런 특성은 존재하며 흔히 [ 역동성(Dynamicity) ] 이라고 표현된다. 한국 민족이 발전시킨 대부분의 문물은 외부에서 차용한 것이었지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형세와 여건이 명백히 바뀐 경우 새로운 보편문화에 충성하는 것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수월했다고 볼 수 있다.


정상성의 추격자

물론 민족성이 역동적이라는 것은 단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 속도로만 따진다면 한국은 그리 특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대신에 한국 민족에게서 정말로 두드러지는 것은 정상성의 기준이 분명해졌을 때 생겨나는 [ 보편문화를 향한 강력한 충성심 ] 이다. 이 때문에 한국은 언제나 늦게 출발하지만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정상성에 도달하며, 일단 보편문화를 담지한 뒤에는 돌연 정체되곤 했다. 이런 고착은 기존의 체제가 효력을 잃어버릴 때까지 완고하게 유지되며 국가의 몰락을 야기하고, 그 다음에는 다시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이것이 한국사에서 간취되는 문화적 쇄신의 간략한 도식이다.

이 견지에서 이른바 역동성은 패스트 팔로잉(Fast following)과도 다르지 않다. 정상성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역동성이 발현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기에 먼저 출발한 경쟁자를 기어이 추격할 수 있다. 정상성에 미달하는 상황에서 한(恨)이 생겨나고, 거기서 말미암은 쇄신을 통해 결국 흥(興)을 성취해낸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현대 한국의 습속으로 꼽히는 [ 비교문화와 도덕경쟁 ] 역시 정상성을 추격하는 의식의 일환이다. 그리고 정부가 강한 동시에 시민사회도 강하다는 한국 정치사의 역설은 정상성의 선봉을 자처하는 쪽이 여론의 지지를 획득한다는 이면의 논리를 전제했을 때 비로소 매끄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계승된 한국 민족문화의 중심축은 정상성의 추격이라는 기조로 요약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상성의 내용은 시대마다 달랐으며, 때로는 정상(正常)이 아니라 정상(頂上)이 추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소천하를 경영할 가능성이 망실된 여몽전쟁 이후의 한국 민족은 신채호가 1925년에 지적한 대로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는 양상을 보였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정상성을 향한 역동적인 추격은 20세기에도 계속되었고, 남한과 북한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 결과 남한은 시류에 알맞은 정상성을 확보한 반면 북한은 빗나간 체제를 완고하게 유지하는 중이다.

6세기 초의 신라에는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다[今聞佛敎淵奧, 恐不可不信]"고 단언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20세기 말의 한국에는 "문화가 반드시 우리의 운명일 수만은 없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운명인 것"이라고 선언한 사람이 있었다. 1,500여 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입장을 같이하는 이러한 열정들은 한국 민족이 겪어온 추격자로서의 궤적을 함축하는 듯하다. 당연히 이 같은 움직임은 어떤 민족에게든 존재하며 한국 민족이라고 언제나 일사불란하게 추격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도를 평가한다면,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역사를 직시한다면 한국에서는 분명 그런 경향이 뚜렷하게 두드러졌다.


결어結語

오늘날 한국의 문화콘텐츠는 유독 정상성을 의식하는 전개를 지향한다. 전근대에 추구되었던 정상성은 현대의 기준에서 냉소당하고, 현대를 관통하는 정상성들은 서로 길항할 때에만 비판받는 식이다. 대중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지닌 조선의 위인들은 그들이 조선을 변혁하려 했다고 기대되기에 인기를 유지한다. 역성혁명의 기간인 여말선초는 구체제를 쇄신한다는 매력 때문에 몇 번이고 영상화된다. 산업화를 성취하려 했던 근대의 독재자들은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해석할 때 마침내 반동인물이 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야만을 실격자의 시선에서 고발하는 작품군은 현대 선진국들이 인권을 중시하며 생겨난 조류의 첨단에 위치해 있다.

그렇기에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기보다는 [ 세계적인 것이 한국적 ] 이다. 한국이 시야에 넣은 세계의 범위가 지구와 일치하는 대한민국에 이르러 한국의 추격은 실제로 세계의 기준에 미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로는 20년이 넘도록 경제대국이고 민주주의로는 세 명의 독재자를 몰아냈으며, 앞으로도 독재를 시도하는 자가 온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류는 현대문화의 중요한 특징들을 집약해 성공을 거두었고 일반적으로 무국적성이 강하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한류의 무국적성은 서구 선진국의 대중문화를 모방하는 한에서의 무국적성이며, 정상성을 추격하는 한국의 성취는 언제나 그 정도의 보편성만을 띠었다.

이상에서 돌아보자면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의 한국론은 여전히 한국 민족을 설명하기에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상성의 추격이라는 지향성은 문화의 축으로 인지되기에는 지나치게 간단한 개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뿌리깊게 가진 것이 그뿐이었기에 한국이 '한국적인 것'을 찾는 일을 제외한 다른 모든 분야에서 예상외의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시선에서는 서유럽 국가들은 고사하고 서유럽과 동유럽의 전통상조차 사실상 구분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공유문화와 구분되는 특유의 문화적 층위가 미약한 것이 [ 반드시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것 ] 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전통상을 길어내는 일은 역사를 반영하기보다는 역사를 활용하고, 정상성의 통치를 묘사하면서도 정상성에 주목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공백을 산천의 가담항설로 채우는 상상력을 발휘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 된다. 그렇게 했을 때 도출되는 전통상은 역사상의 강조라기보다는 창조에 가까울 것이며, 그런 뒤에도 확연히 한국을 대표한다고 여겨지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여건이 한국 민족이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구조에서 창출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인식한다면 적어도 그 작업이 엇나가는 일은 줄어들 법하다.

앞에서 열거한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는 민족의 기수들이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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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4/12/24 01:15
수정 아이콘
보통 '혓바닥이 길면' 좋은 평을 받을수가 없는데 의외로 깔끔하고 좋은 글입니다.

왜 인터넷 커뮤니티에 썼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댓글은 많을 것 같진 않은데 - 논의가 전개될때 기본적으로 당연히 인지하고 있거나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범위가 가볍진 않습니다. - 너네 이건 다 알고 있잖아? -

잘 쓰여진 글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너무 정론에 가까워서 댓글을 '수집'하기 힘든 글에 속하기도 할 것 같네요.


그래도 이런 글들을 읽으면 괜히 제가 잘난 것 같아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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