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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4/03 09:50:25
Name 아랑
Subject 12인의 도전자들을 위하여
확실히 봄인 모양입니다. 알러지가 있는 제 기관지가 조금씩 괴로워지는 계절이죠.
캠퍼스 안을 누비면서 여기저기 핀 꽃들에 즐거워하면서도, 몇 번씩은 재채기를 합니다.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저는 식물에 관심이 많습니다. pgr에 올린 글들 중에서도 꽃을 소재로 쓴 글이 몇몇 있는데요. 사람이 꽃을 좋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요. 꽃다발 선물은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불과 1, 2년 전쯤이었던 저였기 때문에 꽃을 그리 좋아했던 사람이라고는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캠퍼스 곳곳에서 하느작대며 봄빛 즐거움으로 저를 유혹하는 꽃들을 보며, 작년까지만해도 알러지만을 생각하며 괴로워하던 저였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책을 한 권 발견했습니다. 소설가 윤후명씨가 쓰신 "꽃"이라는 책이었지요. 알려진 꽃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우리의 야생화와 나무들을 다룬 책이었습니다. 워낙 윤후명씨가 필력이 뛰어나신 탓이었는지, 아니면 도서관엔 꽃가루가 들어올 틈이 없어 알러지가 발동하지 않아서였는지 저는 책에 깊숙히 빠질 수 있었습니다.



겨우살이를 아십니까?

커다랗게 자란 나무 위를 바라보면, 웬 새집같은 것들이 나무에 주렁주렁 붙어 있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나무가 그 잎을 떨어뜨려 가지 사이가 훤히 보이는 겨울에 그것들을 보기가 쉬워 겨울의 앙상한 모습 속에서 더욱 자주 볼 수 있는데요. 가지가 삐죽삐죽 솟아 있는 탓에 어떤 이들이게는 새집이라기보다는 검은 말미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겨우살이를, 백과사전에서는 '기생식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겨우살이가 커다란 나무에 대롱대롱 붙어있는 이유는 그들의 양분을 빨아먹기 위함입니다. 그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요. 기생식물이라는 것의 존재를 배우면서 그 예로 배우는 것이 바로 겨우살이이니까요. 하지만 겨우살이는, 마냥 남의 것만 빼앗아 먹고 사는 식물은 아닙니다.

겨우살이에게는 앙증맞은 파란 잎사귀가 있습니다. 백과사전의 상세분류로 들어가 보면, 단순한 기생식물이 아니라 '반기생 상록관목'으로 분류해놓은 데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나무의 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식물들에게는 광합성 작용을 할 잎사귀가 없어도 되지만, 겨우살이에게는 새 생명의 손 같은 잎사귀가 있지요. 잎이 있는 이유는 당연히 광합성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가 필요한 양분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겨우살이는 열매도 맺습니다. 그 열매는 맛이 좋아 새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새들이 그 맛에 기뻐하며 하늘로 날아올라, 다른 곳으로 떠난 뒤 어딘가 나무 위에서 배설을 하면 그 씨앗이 퍼집니다. 나무 위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겠죠.

겨우살이, 그들은 힘이 없어 남의 힘을 빌리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잎사귀는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열매를 위하여 작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이런 그들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앞에 '반'자가 붙기는 하지만 '기생식물'이라고 부르기가 웬지 미안해집니다.



Challenge, 그 앞에 선

새로운 도전을 앞에 둔 이들이 있습니다. 축제의 장으로 나아갈 첫 발을 위한 싸움에서 안타깝게 떨어진,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12명의 승자가 있었던 것처럼, 12명의 패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마지막 싸움으로 가는 그 날까지, 그리하여 축제의 마당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까지 일어나고 또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이 패배한 이유는, 글쎄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몇 가지 기존 지식과 트렌드에 의한 추측일 수밖에 없지요. 그들이 패배한 이유는 그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 12명의 안타까운 패자들은 말이죠.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한 번만 더 들어주세요.

도약을 위한 웅크림으로 그들은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상관없이, 그 길에 이미 그들이 들어서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처럼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들로 인해 즐거웠고, 행복했고, 감동받고, 흥분하고, 슬퍼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런 우리 탓에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지요.

응원하는 이들을 저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응원하는 그 순간을 살아 숨쉬며 기쁨을 느낀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주었으니 나는 나쁜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팬들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패배의 이유와 당신의 슬픔, 그리고 아쉬움일랑 고이 접어서, 벽에 걸린 편지꽂이나 책상 서랍같은 곳에 남겨만 두세요.
그 남겨둔 것을, 펼쳐는 보시되 젖지는 마시길. 당신들만의 아쉬움이 아니니까요.


물푸레나무를 아시나요?

이름이 참 특이하지 않습니까? ash tree라는 영어 이름에 비해, 특이하고 예쁜 이름을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윤후명씨의 책을 읽다가 이 독특한 이름의 유래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푸레나무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파르란 빛이 물에 퍼진다네요.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 '물''푸레''나무'라고 합니다.



겨우살이의 노력으로, 물푸레나무의 청량한 인자함으로

그들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 고맙고도 멋진 존재들입니다.
자신들만 푸른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우리까지도 푸르게 해 주니까요.

좀 더 자신있고 당당하게 일어서세요.
2%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노력으로 메우면 되는 일입니다.
웅크렸던 몸을 펴 쭉 날아 오르세요.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프로로서의 그대들의 모습입니다.



Junwi_[saM], Sync, [SouL]JunioR, Hexatron_VGundam, hexatron_ElkY, EJi,
fOru, ChoJJa, ChRh, [MuMyung], midas[gm], SLayerS_'BoxeR'.

겨우살이처럼 일어나서, 물푸레나무로 굳게 살아 피어나시길 바랍니다.





ps. 원래 이 글은 중간정도까지, 4/1에 완성했습니다만.. 올리러 pgr에 들어온 순간 '예고구라'에 제대로 당해버린 충격에 늦어지고 말았습니다-_-;;;; 운영자 여러분들의, 간만의 심장떨림을 느끼게 해 주신 번득이는 재치에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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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03 10:46
수정 아이콘
카.... 좋네요..... 12명의 도전자.....
파란무테
04/04/03 14:45
수정 아이콘
아랑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떨어진 12명의 선수들에게도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랑님 글은 참 따뜻해서 좋네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 부탁합니다!^^
아케미
04/04/03 15:56
수정 아이콘
아랑님 글은 정말, 늘 따뜻해서 좋습니다. 선수들을 향한 애정이-_-b
12명의 도전자 선수들, 파이팅! (…그러나 저 중에 몇은 분명 탈락ㅠㅠ)
아 참, 물푸레나무의 어원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것도 감사합니다~ ^^
04/04/04 02:20
수정 아이콘
아....멋지네요..^^
러브히즈님의 주간 피지알을 통해 이글을 알게 되다니^^
이런 멋진 글들이 있기에 피지알 오늘것이 언제나 즐겁습니다.
앞으로도 마구마구 좋은글 기대해도 되겠죠?
한때 제 아이디가 물푸레였는데...여기서 보게되니 반갑네요^^
임마라고하지
04/04/04 09:59
수정 아이콘
이렇게 좋은 글이 추게로 안간다면... 말이 안됩니다.
추게로~ 추게로~
그리고 아랑님의 글, 항상 감탄하면서 잘읽고 있습니다.
눈이 맑아진 기분입니다. 감사드립니다. ^^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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